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09화 (109/262)

제7장. 어디에선가 보고 계셨을 거다. (2)

라커룸에서 선수들끼리 광분의 시간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동료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이기도 했다.

스태프가 준비해 둔 샴페인을 흔들어 이리저리 뿜어 댄 뒤에, 흠뻑 젖은 몰골로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가슴을 부딪친다.

“Ji! 나는 영원히 너와 한 팀으로 뛸 거야!”

기복과 변덕의 화신 레믹이 진실성이 의심되는 멘트를 던져서 주변을 웃겼고,

“뛸 때마다 내 인생 경기가 된다. 고맙다.”

덩치답게 굵직한 음성으로 무둔바가 다가와 정지우의 손을 잡고 가슴과 어깨를 마주 댔다.

중간에 상황을 살피러 왔던 팀 스크립터 클락이 카알의 샴페인 세례를 기쁜 얼굴로 맞은 것을 끝으로 라커룸의 축제가 끝났다.

샤워를 마친 선수들은 마틴과 함께 기자회견실로 들어섰다.

연속으로 터지는 플래시, 즐비하게 늘어선 방송 카메라, 좌석에 앉아 선수들을 기다리는 여러 나라의 기자들까지, 우승팀이 누릴 수 있는 기쁨에는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다.

“우승을 축하합니다. 오늘 경기를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첫 번째 질문은 마틴에게 향했다.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과 스태프, 그리고 관중들이 하나로 이뤄 낸 결과이며, 나는 이 경기에 함께했다는 것으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는 지극히 무난한 답변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했다.

이어서 주장인 데이빗에게 비슷한 질문이 넘어갔고, 곧바로 다음 질문의 주인공은 정지우였다.

“오늘 역시 기대했던 것 이상의 굉장한 플레이였습니다. 오늘 경기를 평가해 주겠습니까?”

정지우는 동료들이 넘겨준 마이크를 받았다.

“나는 이곳의 동료들과 똑같은 경기를 했을 뿐입니다. 운이 좋아서 페널티킥을 막았고, 그 이후로 후반에 여러 차례의 위기가 있었지만 동료들이 몸을 던져 막아 주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무실점도 어려웠을 겁니다.”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인 답이었다.

“리버풀의 축구를 평가한다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충분히 결승에 오를 자격이 있는 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경기에서 유니온 시티가 그들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정지우의 능숙한 영어와 답변에 놀랐다는 듯 시선을 마주친 기자들도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확정 지었는데 어떻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운이 따를 것 같습니까?”

질문을 던진 기자가 ‘이번엔 어떤 답을 내놓을래?’ 하는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축구의 승패는 누구도 함부로 예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행운이 따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고, 분명 좋은 결과를 이뤄 낼 거라고 믿습니다.”

정지우의 답변이 끝나자 아시아권 기자들이 줄지어 손을 들었다.

질문할 기자를 지정하는 것은 정지우였다.

정지우는 가장 앞에 있는 나이 지긋한 기자를 선택했다.

“오늘 경기를 여러 아시아 국가가 방송했습니다. 동양인 최초 FA컵 선발 골키퍼가 되었고, 우승까지 이뤄 냈습니다. 이 경기를 시청한 아시아권 축구 팬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일본어 억양이 뚜렷한 일본 기자였다.

“우선 뜻하지 않은 기록을 얻게 된 점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시아를 대표할 정도의 선수는 아닙니다.”

일본인 기자가 정지우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다음이었다.

“나는 유니온 시티의 선수인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경기를 뛸 수 있는 것에 행복해하는 선수일 뿐입니다. 다만, 앞으로 더 많은 아시아권 선수들과 함께 경쟁하며 경기를 치를 수 있기를 기대하고는 있습니다.”

정지우의 답을 들은 기자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한국 기자들이 연달아 손을 들었는데 정지우는 마이크를 책상에 놓았다. 더는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기자들이 이어서 무둔바와 다른 선수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렇게 기자회견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장진모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정지우 선수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시선이 쭉 몰려들었는데 장진모는 당당한 얼굴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굳이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지우는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FA컵 중계가 한국에서 사상 유례없는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밤새 응원해 준 우리 축구 팬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완벽하고 능숙한 영어였다.

정지우는 그가 장진모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느끼하게 생긴 짙은 쌍꺼풀 덕분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을 텐데 응원해 주신 고국의 팬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우승을 보여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얼른 답을 마친 정지우가 마이크를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박용근 감독님이 유니온 시티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 주겠습니까?”

장진모가 툭 하고 박용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답을 안 하고 넘기기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직 결정 난 사항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제게 정말 커다란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장진모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정지우가 마이크를 내려놓지 못하게 먼저 수를 써 넣고 천천히 질문을 꺼내 들었다.

“앞으로의 목표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지금껏 답을 잘하던 정지우였다.

그런데 지금 장진모의 질문에는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다음 시즌에 프리미어리그에서 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이크를 내려놓는 정지우를 향해 장진모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답을 해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기자회견이 끝났다.

정지우는 스태프, 동료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던 버스로 움직였다.

대한민국 축구판이 벌컥 뒤집혔다.

정지우가 질문을 받아 주었던 일본 기자가 쓴 기사가 시작이었다.

<한국의 위대한 골키퍼, 영국을 사로잡다.>

제목부터 죽였다.

유명한 스포츠 사이트 전면을 완전히 차지한 사진을 시작으로, 그는 두 면을 모두 할애해 결승전에서의 정지우의 활약을 제대로 조명했다.

이어서 지금까지의 무실점 기록을 적었다.

거기까지는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정지우가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는 기록과 함께, 왜 졸업과 동시에 일본에 왔는지를 섬뜩할 정도로 상세하게 보도했다.

선금 지급을 거절한 탓에 어머니의 치료가 늦어졌고, 결국 일본의 팀과 계약했지만 어머니를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의 슬럼프, 항의하던 박용근 감독의 불이익, 그리고 겨우 컨디션을 되찾았지만, 결국 한국 축구는 그를 받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를 적었다.

그 증거로 그는 유니온 시티가 제안한 축구 교실을 박용근 감독이 맡아야 한다는 이유로 한국 협회가 거절했다는 관계자의 증언이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이 정지우를 쓰지 않아서 일본이 본선에 진출할 기회를 좀 더 수월하게 잡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한국의 협회에 감사하고, 우리 주변에 능력 있는 선수들이 외면받는 일이 없는지를 되돌아보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일본 기자가 쓴 기사의 마지막 문구가 그렇지 않아도 울고 싶었던 한국 축구 팬들의 따귀를 제대로 때린 꼴이었다.

이 보도를 가장 먼저 한국의 포털에 올린 기자는 장진모였다.

클릭수는 당장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댓글이 단박에 1만을 넘길 정도로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협회는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출근 시간부터 시작된 전화는 받기 무섭게 ‘야, 이 개새…….’들로 시작됐다.

일단 전화 응대를 중지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동안의 안면을 싹 무시하는 것처럼 기자들이 마구 들이닥쳤다.

조동익은 아침 일찍 회장실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타악, 타악, 타악.

허양수는 한숨 한 번 커다랗게 내쉬고, 들고 있던 신문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런 다음, 다시 한숨과 신문으로 탁자 두들기기를 반복하며 5분 정도 말이 없었다.

“부회장님.”

“예.”

“적당히 쳐드시고 드신 만큼은 일하라고 말씀드렸었지요.”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며 조동익이 겨우 ‘죄송합니다.’ 하는 사과를 꺼냈다.

그의 음성이 입술만큼이나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동익이 겨우 답을 한 직후였다.

“자존심이 없으셔서 그런가요? 속은 편하시겠습니다.”

차라리 뺨을 맞아도 이것보다는 덜 치욕스러울 것 같았다.

떨리는 입술에 억지로 힘을 준 조동익의 눈가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벌겋게 물들었다.

“제가 본선 진출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자신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조동익의 고개가 좀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삼국지에 읍참마속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려면 제가 울면서 부회장님의 목을 쳐야 하게 생겼는데,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조동익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것을 지켜본 허양수가 다시 탁자를 신문으로 두드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하나는 우리 부회장님이 알아서 그 돌대가리 같은 위원과 대표팀 감독의 손을 잡고 물러나면 내가 검찰에 세 사람을 고발하는 것이고.”

조동익이 충격을 받은 것처럼 휘청했다.

“연기 좋으시네!”

그러나 허양수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다음은 내가 부회장과 그 돌대가리 위원, 그리고 국가대표 감독을 바로 검찰에 고발하는 게 있는데, 어떤 방법이 좋겠습니까?”

조동익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야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지를 밝힐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어설프게 변명하려다가는 큰일 납니다. 불똥이 위로 튀면 부회장님 그거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허양수가 신문을 거꾸로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아직 예선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솔직히 예선 탈락이어도 말없이 조용하게 넘어가기만 한다면 내가 굳이 이런 독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 아닙니까? 혹시 부회장님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뜻입니까?”

허양수가 상체를 기울이며 조동익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요? 지금은 외국인 감독을 부른다고 해도 올 사람이 없어요. 아!”

허양수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을 꺼내서 조동익의 시선을 끌었다.

양아치 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시선을 든 조동익의 앞에 있는 허양수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바늘처럼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부회장이 선수로 뛰셔서 남은 두 경기 다섯 골씩 넣으면 되긴 하겠습니다.”

차가운 얼굴에 담겨 있던 허양수의 입술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조동익은 얼른 고개를 떨궜다.

치욕스럽고, 무섭고.

한승관에게 꼭 이 수모를 2배, 3배로 갚아 줘야겠다는 결심에 조동익은 허양수 몰래 이를 악물었다.

“오늘 오후까지 사직서 가지고 오세요. 세 사람 것 모두.”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음성이 탁자를 건너왔다.

“오늘 5시까지 제출하고 나면, 내가 검찰에 정식으로 선수 선발에 관해 뒷거래가 있는지를 수사 의뢰하겠다고 발표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 결백을 밝히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허양수가 입맛을 한 번 다신 후에 ‘가 보세요.’ 하고 신문으로 시선을 주었다.

“회장님.”

“가 보시라니까.”

“축구 팬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본선에 진출할 기회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동익이 아마 나이가 6살인가, 7살 더 많지 싶었다.

그런데도 다리를 꼰 허양수가 그를 옆으로 바라보며 또다시 입술만 움직여 비릿한 미소를 그려 냈다.

“박용근을 국가대표 감독으로 앉히고, 정지우를 기용하면 축구 팬들도 이해할 겁니다. 일단 그렇게 팬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선 진출 여부에 따라서 제 거취를 정하겠습니다.”

“후우-!”

허양수가 한숨을 커다랗게 내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타아악!

그러고는 신문으로 냅다 탁자를 내리쳤다.

“거, 정말 더럽게 구질구질하네.”

조동익의 입술이 다시 부르르 떨렸다.

“당신 지금 나한테 헛소리한 게 몇 번째인 줄이나 알아? 내가 또 위에 가서 지금 같은 소릴 하면? 위에 계신 분들이 오냐, 너 정말 멍청한 소리 지껄여서 기특하다, 그러실 거 같냐고!”

“제가 직접 영국에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조동익은 이 자리를 놓칠 수 없었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이걸 놓는 순간 그는 축구 용품점 하나 운영할 인맥조차 없어진다.

“참 나! 마지막까지 출장 경비와 운영비 빼먹겠다는 생각이 기특하기까지 하네.”

“제 돈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후! 다음 예선이 언제요?”

“두 달 뒤입니다.”

인상을 찌푸린 허양수는 가타부타 입을 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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