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08화 (108/262)

제7장. 어디에선가 보고 계셨을 거다. (1)

애국심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더럽게 유치한 감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다.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 그것도 영국인들이 성지라 부르는 웸블리에서다.

9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꽉 들어찬 경기장.

FA컵 우승팀의 선수들이 허리 숙여 박용근에게 인사하는 순간, 그들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치는 광경을 보는 그 순간에 장진모는 이상하게 콧날이 시큰했다.

‘멋진 놈!’

자랑스럽다는 게 이런 건가?

이래서 축구에 그렇게들 열광하는 거였나?

사회부를 담당하며 더럽고 추악한 일들에 묶여 있느라 이런 세상이 있는 줄은 몰랐다.

월드컵 기간에 광화문에 모여 응원하는 모습을 취재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는 그 뒷자리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들을 취재했었다.

취객, 추행, 소매치기.

그 앞에 이런 열정이 있음을 모르고 살았던 시간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관중들이 어깨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뛰고, 그 아래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함께한다.

한가운데 정지우가 있었다.

맞은편에 마틴, 그 위에 박용근이 모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앞에서.

‘멋지다! 너 정말 멋진 놈이다! 네 팬 하기로 한 거 정말 잘한 짓이다!’

장진모가 낯간지러운 다짐을 뱉어 낼 때였다.

미디어 담당관 에이미가 빠르게 다가왔다.

“장 기자님, 이 경기를 중계한 한국의 방송국에서 협조 요청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나온 기자 중에 누구라도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게 도움을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장 기자님 어떠세요?”

에이미는 시간이 급한 얼굴이었다.

“한국 방송국에서 편성 시간을 조정한 모양인데, 그만큼 급하게 진행해야 할 거 같아요. 카메라와 마이크는 구단 것을 이용하기로 했고, 위성 사정 때문에 시간은 길지 못해요.”

사양한다면 바로 다른 기자를 찾아갈 것 같은 태도였다.

구단 홍보에 도움 되는 일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

힐끔 박용근을 보고 난 장진모가 그녀를 향해 답을 건넸다.

“제가 하죠.”

“감사합니다.”

에이미는 장진모의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대기하던 카메라를 든 직원이 곧장 다가왔다.

“마이크 받으시구요. 이어셋, 그리고 저기가 모니터예요.”

이런 장사는 이골 난 경력자가 장진모다.

마이크를 받은 그는 다른 손으로 이어셋을 귀에 끼우며, 에이미가 가리킨 작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습니다.”

“빨간 불이 들어오면 바로 방송입니다.”

“예.”

에이미가 무전기에 대고 ‘인터뷰 스탠바이!’라고 외치자 카메라 위로 빨간색 빛이 곧바로 켜졌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FA컵 중계를 맡은 종편은 완전히 한낮과 같았다.

당직 직원들은 말할 것 없고, 중간 간부들이 죄 달려 나와 후반부터 대기하고 있었으며,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는 국장급 이상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2시에 종편에 무슨 시청률이 나오겠나.

조마조마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은 방송이 끝난 순간, 다 같이 웸블리의 관중들처럼 환호성 터트렸다.

우승이다.

그냥 우승이나 했나?

정지우가 엄청난 슈퍼 세이브를 연달아 펼치며 승리를 지켜 냈다.

그 덕분에 도박처럼 따낸 FA컵 중계방송이 우승 확정 순간에 20퍼센트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고, 경기가 끝나고도 시청률 집계는 계속 15퍼센트를 웃돌고 있었다.

미치고 팔짝 뛰다 못해 입이 찢어질 정도로 방송국 임직원들을 짜릿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옆에 있었다면 정지우를 둘러업고 서울을 한 바퀴 돌라고 해도 그럴 판국인 거다.

종편 전체를 따져도 최고 기록.

이걸 그냥 끊어?

시청률 1퍼센트도 안 되는 옛날 드라마 방송하자고?

편성을 완전히 바꾸고 달려들었다.

현지 코디네이터에게 간부가 매달리고, 매달렸다.

인터뷰가 성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온 순간, 편성 국장실에서 ‘만세!’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면 말 다 한 거였다.

큐 사인이 들어가고 모두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현지에 나가 있는 장진모 기자와 인터뷰가 성사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장진모 기자를 연결해서 현지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장진모 기자.』

앵커가 그를 부르고 잠시 틈이 있었다.

오른쪽 아래 작은 네모 칸에 있던 장진모의 모습이 화면 전체로 퍼졌다.

『장진모입니다.』

왼손을 들어 이어셋을 꼭 누른 장진모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워낙 함성이 커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먼저 인터뷰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곳 상황은 어떤가요? 보기에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는데요? 우선 현장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어셋을 꼭 누른 채로 질문에 집중하던 장진모가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웸블리입니다. 오늘 승리한 유니온 시티 선수단과 관중들이 함께 승리를 만끽하고 있어서 시상식이 잠시 뒤로 밀릴 정도입니다. 잠시 현장을 직접 보시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장진모가 영어로 ‘선수들을 비춰 주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카메라가 관중들과 선수들을 잡아 주었다.

웃옷을 벗어 던진 관중들 앞에서 선수들이 손뼉을 치고 있는 장면, 벤치 풍경, 그리고 장진모의 작은 음성이 들린 후에 박용근 내외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천천히 돌아온 카메라가 다시 장진모를 담았다.

『장 기자, 오늘 정지우 선수가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박용근 감독에게 인사하는 모습도 나왔는데, 현지 평가나 관중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프롬프트에 급하게 올라온 질문을 던진 순간, 스포츠 국장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청률이 급격하게 올라서 19퍼센트에 근접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지우 선수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국 FA컵 결승 최초의 동양인 선발 골키퍼라는 기록이 있기는 한데, 그것보다는 오늘 경기까지 일곱 경기 무실점을 이뤄 낸 정지우 선수의 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진모가 사인을 보내며 말을 건네자 카메라가 움직여 정지우를 잡아 주었다.

때마침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종편 방송국을 완전히 살려 주겠다는 것처럼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라는 정지우의 응원가를 불러 대고 있었다.

『들으시는 것이 정지우 선수를 위한 응원가입니다. 게다가 구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박용근 감독이 준결승과 오늘 경기의 전술에 관해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이 박수를 치고 있는 박용근을 잡았다.

『현지 반응은 정지우 선수를 미스터 어메이징이라고 부르고 있고, 구단의 수호신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구단 관계자들은 박용근 감독을 마스터라 부르며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화면이 다시 장진모를 잡은 순간이었다.

『이곳 현지 관중들과 구단에서는 쿠웨이트와의 월드컵 예선 경기가 같은 시간에 있었는데, 정지우 선수가 국가대표를 은퇴한 것에 오히려 감사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내용이 불편해지자 앞에 있던 국장이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한 뒤에 검지를 빠르게 돌렸다.

『네, 장진모 기자. 오늘 인터뷰 고맙습니다.』

『한 가지 더 전할 것이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려던 앵커가 당황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고스란히 나왔다.

『쿠웨이트와의 월드컵 예선에서 0 대 1로 패했기 때문에 우리 대표팀은 남은 두 경기에서 모두 이기더라도 골 득실을 따져야 할 상황입니다.』

『네, 장 기자. 허용된 시간이…….』

『협회가 국민들과 우리 축구 팬들이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좀 더 선수 평가와 관리에 공평한 기준을 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 웸블리에서 장진모였습니다.』

화면이 넘어오자 앵커가 어색하게 웃는 표정을 지어 냈다.

『장진모 기자, 고맙습니다.』

프롬프트를 힐끔 바라본 앵커가 ‘오늘 중계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하고는 이름과 해설자를 소개하며 방송을 마쳤다.

“후우!”

한숨을 푹 내쉰 앵커 앞으로 국장이 다가왔다.

“문제 되는 거 아니겠지요?”

“문제는 무슨 문제? 시청률이 이렇게나 나왔는데 이게 문제가 돼? 사장님께서 전화하셨다.”

앵커가 눈치를 살피는 앞에서 국장이 느닷없이 활짝 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둑하게 내려왔어. 회식비가 아냐. 오늘 나온 임직원 전체에게 일 개월분 급여를 보너스로 내리신단다.”

잠시 멍했던 앵커와 직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러 댔다.

재방송을 통해서 얻을 광고 수입을 생각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종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보너스였다.

감독을 시작으로 선수들이 벤치 옆의 통로를 걸어 올라갔다. 경기가 끝났기 때문에 스웰던도 라커룸에서 나와 동료들과 합류했다.

주변에 있던 관중들이 등과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조금 떨어져 있는 관중들은 손을 뻗쳐 선수들에게 내밀었다.

양쪽에서 뻗은 관중들의 손에 손을 부딪쳐 가며 통로를 올라간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선수단 전용 통로 위쪽 공간의 중앙에 섰다.

마틴이 FA컵 결승 트로피를 받아 키스한 후에 높게 들었다.

“이예에에에에에-!”

거친 남자들이다.

직선적이고, 강한 축구를 좋아하는 관중들이다.

흥분을 이기지 못해 함성을 질러 대는 관중들 속에서 몇몇은 또다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주장 데이빗이 우승 트로피를 넘겨받아 입을 맞추고 위로 들었다.

“이예에에에-!”

함성이 또다시 터졌다.

카알과 꼼빠니를 거쳐 정지우의 순서였다.

정지우가 우승컵을 받아 입을 맞추고 위로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이예에에에에에에에-!”

웸블리가 터져 나갈 듯한 함성이 커다랗게 울려 나왔다.

조동익은 소파 팔걸이에 걸친 왼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하필이면 왜 전반 추가 시간 때문에 영국 리그 중계가 좀 더 늦어져 버렸을까?

어쩌자고 전반 마지막 장면이 페널티킥이었고, 그걸 또 막아 내 버렸는가 말이다.

운이 정말 지긋지긋하게 좋은 놈이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지만, 장진모가 마지막에 던진 멘트를 듣는 순간 조동익은 느닷없이 한쪽 머리를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이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

김치나 얻어 먹이더니 결국 지고 말았다.

그놈보다 더 미운 놈도 있었다.

“아니! 나라도 막았겠다! 어떻게 공을 쳐서 넣어!”

조동익은 한 골을 먹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아 댔다.

정말 평범하게 날아온 공을 골대를 향해 방향만 바꿔 준 것처럼 집어넣었다. 골키퍼랍시고 발도 아니고 손으로!

“그냥 날아왔잖아! 이 개……!”

조동익은 차마 남은 말을 뱉지 못하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이 욕을 하면 이진용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 개 멍청이 같은 새끼야! 한 골쯤은 좀 막았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나 그는 두 번째로 치밀어 오른 분통마저 참아 내지는 못했다.

인터넷 기사에서부터 분위기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지우 세 글자가 들어가면 클릭수가 터지고 댓글이 수천 개씩 주르륵 달리는데, 어떤 신문사가 그걸 외면하겠나.

우승컵을 든 정지우의 사진이 앞에 뜨면 클릭수는 좀 더 높아졌다.

새벽 3시.

장진모를 영국에 보낸 부장은 모처럼 입을 헤벌쭉 늘인 채로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휴, 예쁜 새끼. 이래서 내가 널 못 버린다.”

현장에서 찍어 보낸 정지우와 박용근의 사진이야 그렇다고 치자. 그건 다른 언론사들도 비슷비슷하니까.

그러나 다른 언론사와 차별되는 현장 분위기에 구단 관계자와의 인터뷰까지 알차게도 담았다.

기사도 벌써 3보나 올렸다.

“이 기특한 새끼!”

기사가 올라오자마자 바로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린다.

“이대로 가자, 거머리. 우리가 목표했던 놈들을 제대로 잡아낼 때까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게 부장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정지우와 선수들이 다시 내려와 벤치 앞에 섰다.

손을 들어 박수로 응원단에 감사를 표했고, 리버풀 선수들과 뒤엉켜 리버풀 관중들을 향해서도 손뼉을 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우승이다.

오늘만큼은 샤워를 마친 후에 별도로 기자회견 시간을 갖기로 해서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향했다.

이제야 우승했다는 것이 조금이나마 실감 났다.

그래서인지 통로를 향해 걸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통로를 들어서기 전에 정지우는 고개를 돌려 웸블리 스타디움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하늘 어디에선가 보고 계셨을 거다.

‘그렇지? 엄마?’

하늘은 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린 정지우는 묵묵하게 통로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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