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01화 (101/262)

제4장. 잘할 거지? (1)

적당하게 몸을 풀고 난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걸었다.

리버풀 선수들이 날카롭게 던지는 시선 앞에서 피식거리며 웃었고, 의도적으로 기예르모에게 농담을 건네는 여유도 보였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커다랗게 뛸 때마다 얼굴로 피가 솟구치는 느낌도 들었다. 정말이지 오래전에 느꼈었던 긴장감이기도 했다.

라커룸에 들어간 정지우는 위에 덧입었던 조끼를 벗은 다음, 자리에 앉아 골키퍼 장갑을 매만졌다.

“후우-!”

다리에 팔을 걸친 자세로 눈앞에 있는 장갑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경기와 다를 것 없다.

다음 시즌에 매주 나서야 하는 경기는 다 이런 팀과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될 거다.

가슴이 뻑뻑하게 느껴질 정도로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그런데도 폐의 마지막 부분에 숨이 들어차지 않아서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후우- 우!”

숨을 내쉰 정지우는 천천히 호흡 소리를 들었다.

‘긴장돼?’

스스로에게 물었고, ‘응.’이라고 답을 했다.

‘무서워?’

이번엔 ‘그런 건 아냐.’라는 답이 나왔다.

‘잘할 거지? 이전처럼?’

피식 웃음이 나오며 ‘그럴 거야!’란 답을 떠올렸다.

후욱! 후욱!

아직 숨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감독님과 사모님이 계시잖아. 더 뭘 바라?’

그렇지! 한 번쯤 꿈꿔 왔던 경기가 이랬지. 엄청난 관중들 앞에서, 감독님과 사모님 모시고 경기하는 거.

‘철강 노동자들의 도시잖아. 우리 홈 관중에게 트로피 하나쯤 안겨 주어야지. 그러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들에게 우승이란 선물을 하고 싶기는 했었다.

‘누구도 정지우의 경기에서 골을 넣지는 못하게 할 거지?’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숨이 폐를 좀 더 가득 메워 주는 느낌이었다.

“Nobody gets the goal on my game(누구도 내 경기에서 골을 넣지는 못해).”

정지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직후였다.

“뭐라고?”

말을 건 줄 알았는지 데이빗이 질문을 던졌다.

“Nobody gets the goal on my game!”

정지우는 데이빗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을 쏟아 냈다.

라커룸이 삽시간에 침묵에 빠져들었다.

느닷없이 정지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뜻밖의 말을 뱉어 냈기 때문이었다.

“우리 팀에는 확실히 미친 골키퍼가 있군!”

데이빗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웃었고, 스웰던은 정지우를 향해 번들거리는 시선을 주고 있었다.

「선수들은 출전을 준비하세요.」

시설이 좋아서 그런지 벨 소리 대신 안내 방송이 나왔다.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더는 쿵쾅거리지 않아서 그게 제일 좋았다.

“가자!”

데이빗이 숨을 ‘후!’ 토해 내며 라커룸의 문으로 움직였고, 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자가락! 자가락!

라커룸을 나서자 에스코트를 할 어린아이들이 쭉 서 있었다. 정지우는 기다리고 있던 아이의 어깨를 다독여 준 뒤에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해.”

안경을 낀 사내아이였다.

수줍게 웃은 어린아이가 정지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진청색 상의에 아이보리 스커트를 입은 스태프가 선수들을 향해 선 채로 손을 들어 움직였다.

자가락! 자가락!

시작이다. FA컵 결승전이.

“우와아아아아-!”

그라운드의 환한 빛을 향해 나선 정지우는 데이빗을 따라 FA컵 결승을 상징하는 문을 지나쳤다.

문이라고 하니 거창한데, 그냥 예쁘게 칠한 나무틀을 그라운드에 세워 놓은 거였다.

중앙에서 보아서 오른편이 리버풀, 왼편이 유니온 시티다.

리버풀 응원단이 먼저 ‘You'll never walk alone’이란 응원곡을 불렀고, 이어서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라는 특유의 응원가를 불러 댔다.

정지우는 세 번째에 서서 벤치 위를 똑바로 보았다.

‘감독님, 축구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지우는 알아본다.

박용근은 분명 울컥한 감정을 감추려고 좀 더 무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긴장을 감추지 못한 전은주가 한눈에 보기에도 떨리는 손으로 물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니다.

이 많은 관중 앞에서, TV로 이 경기를 시청할 수많은 시청자에게 박용근이 얼마나 정지우를 잘 가르쳤는지, 그가 얼마나 훌륭한 감독인지를 증명하는 경기일 뿐이다.

행사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메기는 오들오들 떨기 시작한 그녀의 소중한 딸 릴리를 좀 더 세게 안아 주었다.

“마미! Ji가 정말 나와의 약속을 기억할까요?”

“클레이와 얀센이 말해 준 거 잊었어? Ji가 어떤 남자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알아요.”

릴리는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떨리는데 Ji는 얼마나 힘들까요? 혹시 너무 떨려서 잊어버릴까 봐 그래요. 그런 거라면 난 이해할 수 있어요.”

메기는 릴리가 쓴 모자에 입을 맞춰 주었다.

“Ji는 강한 남자야.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자.”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에게 축구란 그저 남들이 좋아하는 운동 정도였다.

그런데 릴리와 함께 지켜본 그날 이후로, 병실 앞에서 정지우가 팔을 커다랗게 펼친 자세로 의지를 보여 준 이후로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됐다.

이겼으면 싶다.

경기에 나서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설레고 뛴다.

이런 감정 때문에 경기장에 가고, 아니면 TV 앞에서 응원하는 걸 거다.

데이지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며 숨을 내쉬었다.

골키퍼인 정지우가 골을 먹지 않았으면 싶었다.

져도 좋으니 골만은 먹지 말았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사람이 그냥 그렇게 황당한 바람을 가질 때도 있는 거다. 정지우가 골키퍼로 뛰는 경기라면 말이다.

공식 행사가 끝났다.

“리버- 풀! 리버- 풀! 리- 버푸울!”

리버풀 응원단이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익숙한 민요에 처음부터 끝까지 ‘리버풀’이란 이름을 넣어서 외쳐 댔다.

남녀노소가 섞였는데, 저런 함성은 이상하게 성인 남자들의 고함으로만 들린다.

데이빗이 리버풀의 14번 헨더슨과 주심 앞에 섰다.

동전을 던진 주심이 손가락으로 데이빗을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정지우는 벤치에서 보았을 때 왼편 골대를 엄지로 가리켰다. 곧바로 데이빗이 골대를 택했고, 양 팀의 진영이 결정되었다.

“우와아아아- 아!”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서자 또다시 귀청을 울리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데이빗은 동료들을 그라운드 중앙으로 불렀다.

유니온 시티의 경기 중에 이런 적은 몇 번 없었다. 다 함께 어깨를 잡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우리!”

데이빗이 전에 없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우리의 응원단이 고개를 떨구지 않는 경기!”

그가 악을 쓸 때마다 상체가 커다랗게 들썩였다.

“유니온 시티다운 경기를 하자! 오케이!”

“예에에-!”

고함으로 답을 한 선수들이 상체를 들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이번엔 유니온 시티의 응원 구호가 웸블리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다. 역시나 선수들을 향해 팔을 뻗은 채 단순한 리듬을 타고 지르는 함성이었다.

정지우는 골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왼편에서 오른편 포스트를 걸었다. 그리고 중앙에 서서 높다랗게 뛰어올랐다.

툭!

“이예에에에-!”

정지우의 습관을 아는 관중들이 그 동작에 맞춰 고함을 질러 주었다.

“후우-!”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뱉어 낸 숨은 앞에 뱉어 낸 한숨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파란색 세로줄 무늬 상의에 파란 양말, 하얀색 하의가 유니온 시티, 붉은색 유니폼이 리버풀이었고, 골키퍼 복장은 정지우가 회색, 리버풀의 미놀레가 노란색이었다.

선수들이 포지션에 자리 잡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양 팀 모두 4-4-2의 포메이션이었다.

유니온 시티는 중간중간에 4-2-3-1로 변화할 거고, 리버풀은 4-2-2-2의 형태나 2-4-2-1-1의 다양한 변화를 시도할 게 분명했다.

한 수 위의 팀이다.

그들의 다양한 변화에 우직하게 맞서야 하고, 그 와중에 유니온 시티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골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경기였다.

주심이 시계에 손을 얹은 자세로 대기심, 부심, 그리고 양편에 나뉘어 선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삐이이이익!

“이예에에에-!”

리버풀의 선공으로 FA컵 결승이 시작되었다.

툭!

부담을 덜어 내려는 것처럼 헨더슨은 공을 옆으로 굴렸다.

투우욱!

그리고 그 공을 받은 랄라나가 얼른 17번 사코를 향해 뒤편으로 넘겨주었다.

레믹과 브라운, 포그이와 데이빗이 중앙선을 넘어 달려갔는데 더 이상 무리하지는 않았다.

산통이 완전히 깨졌다.

조동익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두 대의 TV를 번갈아 보았다. 한쪽은 한국과 쿠웨이트의 월드컵 예선, 다른 한쪽은 유니온 시티와 리버풀의 FA컵 결승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흐음!”

고약한 인간이다.

매국노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걸고 나서는 월드컵 예선전을 이렇게 망쳐 놔도 되겠는가 말이다.

쿵.

조동익은 협탁을 가볍게 내리치며 분을 털어 냈다.

장진모가 덜컥 인터넷에 올려 버린 기사가 문제였다.

‘박용근, 유니온 시티 리저브 팀 감독으로 내정.’

그 기사가 뜨면서 축구 팬들의 관심이 확 FA컵 결승으로 쏠렸다.

벤치 위의 좌석에 박용근이 부인과 함께 앉아 관전할 거라는 둥, 이번 영국행이 사실은 감독직을 수락하기 위해서라는 등의 내용이 이어졌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나마 참을 만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덧붙인 기사에 협회가 사실상 축구 교실을 거절하는 바람에 유니온 시티 구단이 욕심내던 박용근을 아예 영국으로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담았다.

댓글로 욕은 욕대로 먹고, 시청률은 월드컵 예선과 FA컵이 비등비등하게 나왔다.

이러면 안 된다.

국민들과 축구 팬들이 그깟 기사 하나에 국가를 위해 애쓰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거다.

조동익은 이를 갈면서 TV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이렇지만, 예선을 통과하면 언제 또 그랬느냐는 것처럼 죄다들 광화문에 모여서 응원할 거다.

“이 거머리 같은 인간! 어디 두고 보자!”

먼저 장진모를 벼른 조동익은 박용근을 떠올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네놈은 우리나라 축구에 발 디디지 못한다! 그리고 그깟 실력이 그곳에서 오래 먹히기나 할 것 같으냐!”

마치 박용근이 앞에 있는 것처럼 조동익은 분통을 터트렸다.

“리버- 풀! 리버- 풀! 리- 버푸울!”

응원단의 함성만큼이나 리버풀은 강했다.

피지컬이 워낙 뛰어나서 데이빗이나 꼼빠니, 카알이 몸싸움에서 계속 밀리고 있었다.

퍼어어엉!

그리고 다음으로 패스의 질이 유니온 시티와는 달랐다.

멋지게 휘며 날아가는 롱 패스, 공을 받을 선수의 바로 앞으로 떨어지는 자로 잰 듯한 패스, 혹은 빈 공간을 찌르는 킬러 패스까지.

라파엘과 카알이 급하게 뻥뻥 걷어 내고 있어서 아직 위험한 장면은 없었지만, 경기 시작과 동시에 공은 주로 유니온 시티 진영을 맴돌았다.

“헉헉! 헉헉!”

이제 경기 시작한 지 10분쯤 되었다.

그런데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절반쯤이 전반을 마친 것처럼 헉헉대고 있었다.

긴장한 탓이다. 너무 긴장해서 페이스를 오버했고, 그 바람에 벌써 숨이 차기 시작한 거였다.

중앙선 부근에서 공은 항상 리버풀의 소유였다.

강한 피지컬, 유니온 시티 선수가 공을 잡으면 삽시간에 협력해서 달려드는 미드필더들, 그리고 빠른 공수 전환까지.

전반 10분을 넘어선 시점이었다.

리버풀의 20번 랄라나가 중앙선과 골키퍼 에어리어 중간쯤에서 공을 받았다.

툭툭!

그는 공을 건드리는 것처럼 몰며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데이빗이 랄라나에게 달려들었고, 카알이 그가 치고 나올 것에 대비해 오른쪽을 막아섰다.

그때였다.

투욱!

21번 루카스에게 공을 차 준 랄라나가 거세게 앞으로 달려들었다.

투욱!

공을 받은 루카스는 방향만 바꾸는 동작으로 앞으로 밀어 주었다.

데이빗과 카알의 틈을 뚫고 넘어간 공을 랄라나가 다시 받았다.

“우와아아-!”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원투 패스의 전형이었다.

“헤이! 각! 각만 잡아!”

정지우가 고함을 지른 직후였다.

랄라나는 달려드는 라파엘을 제치는 척하다가 다시 왼편으로 공을 찔러 넣었다.

“와아-!”

페널티 에어리어 왼편을 파고든 스터리지의 바로 앞에 공이 있었다.

누군가 막아 줬어야 할 상대의 공격수였다.

그런데 그가 혼자서 이렇게 달려들다니!

정말이지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당한 거고, 패스 세 번에 완벽한 찬스를 내준 상황이었다.

정지우가 허리를 낮춘 자세로 팔을 벌리는 순간,

퍼어엉!

스터리지가 오른발 안쪽으로 공을 감아 찼다.

화아아악!

정지우가 몸을 날렸는데 공은 손을 훨씬 벗어나 날아갔다.

털썩!

“우-!”

웸블리 스타디움을 가라앉힐 듯한 탄식이 울려 나왔다.

욕심이 많았는지, 아니면 타이밍이 안 맞았는지는 모르지만, 공은 골대를 1미터쯤 벗어나 아웃됐다.

스터리지가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로 혀를 쑥 내밀 때, 리버풀 관중들은 양손을 이마 앞에 대거나, 아니면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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