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00화 (100/262)

제3장. 한 수 위의 팀이다. (2)

9만 명이다.

그들이 지르는 함성이 바람처럼 그라운드를 휘몰아칠 때마다 옷이나 머리카락이 펄럭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우와- 아!”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대결을 보기 위해 모인 것처럼, 경기를 한참 앞둔 시간인데도 관중들은 이미 흥분한 상태에서 고함을 질러 댔다.

흥분의 강도만큼이나 선수 대기실로 넘어오는 함성의 크기도 이전과 전혀 달랐다.

서브 명단에 이름을 올린 기예르모가 물병을 입으로 가져갔는데,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정강이 보호대를 대는 무둔바 역시 자꾸만 손을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그도 서브 명단에 이름이 들었는데 말이다.

정지우는 전에 없이 눈빛을 빛내며 마음을 다독였다.

이겨 내야 한다. 이겨 낼 거다.

저 엄청난 관중들이 주는 중압감, 그리고 유니온에 비해 분명하게 한 수 위인 리버풀을 상대한다는 부담감을.

문이 열리고 마틴이 들어섰다.

그의 코와 입가가 조금 전에 보톡스를 맞고 온 사람처럼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었다.

이런 순간에는 사실 딱히 전술 지시는 없고, 대개 선수들을 격려하는 말을 전한다.

“느낌이 나쁘지 않지?”

그가 억지로 만들어 낸 농담을 던진 직후였다.

“Oh-O! When you walk through a storm!”

폭풍을 헤쳐 나아갈 때!

“Keep your head up high!”

고개를 높이 들어라!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그리고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라!

엄청난 함성에 올라탄 리버풀의 응원가가 라커룸을 파고들었다.

마치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리버풀을 이길 수 없다는 단호한 외침 같았고, 만약 승부에서 진다면 우리는 절대로 곱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들렸다.

응원가는 계속 이어졌다.

방음이 제법 되는 라커룸에서도 이렇게 실감 나게 들리는데, 그라운드에 나서면 어떤 느낌일까?

마틴이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피식!

정지우는 별 같잖은 걸 들었다는 얼굴로 웃었다.

마틴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동료들이 모두 정지우의 그런 웃음을 보았다.

여기서 눌리면 이 경기 어렵다. 지고 싶지 않았다.

“코치! 한마디만 해도 됩니까?”

경기를 앞두고 정지우가 이렇게까지 도발적인 표정과 태도를 보인 적은 없다.

마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 나도 들어 보고 싶군!’ 하고 팔짱을 끼었다.

“Walk on! Walk on!”

나아가라! 나아가라!

“With hope on your heart!”

너의 가슴에 희망을 품고!

아직도 리버풀의 응원가는 끝나지 않아서 함성을 뒤집어쓴 채로 라커룸의 공간을 버적버적 삼키고 있었다.

“And you'll never walk alone!”

그러면 너는 절대 혼자 걷지 않으리!

“봐! 우리는 손해 볼 게 없어!”

정지우가 동료들을 돌아볼 때였다.

“우와아아-!”

응원가를 마친 리버풀 관중들의 함성이 정지우의 입을 막고 싶은 것처럼 날아들었다.

“우린 이 경기에서 져도 본전인 거야. 어차피 승격 팀이잖아. 그런데 저들은!”

정지우는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우릴 이겨야 체면이 서는 거야! 우리에게는!”

정지우가 다시 한 번 말을 끊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지지 말라는 것처럼 고함을 지르며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지우와 동료들, 마틴까지 관중석이 있는 방향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블레이트가 사이좋게 지냈지!”

“들리지? 우리에게도 저런 관중들이 있어! 이제껏 이 결승을 위해 응원해 준 관중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가 시합에 나가면 블레이트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보다 한 수 위의 팀인 건 인정하자!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믿어도 좋다! 저번 경기에서 기예르모를 도와주었던 것처럼 하나로 뛴다면!”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정지우와 동료들, 마틴의 심장이 쿵쿵 소리에 맞춰 뛰는 느낌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눈들이 정지우를 바라볼 때였다.

“오늘 우리는 최악에도 비긴다! 내가 절대 골을 허용하지 않을 거니까!”

말을 마친 정지우가 이를 꽉 깨물고 다시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예에!”

스웰던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지우에게 걸어왔다. 마치 주먹을 날리기라도 할 것처럼 험악한 인상이었다.

“내 자리는 맡겨 달라고! 어떤 놈도 못 지나가게 할 테니까!”

꽈아악! 쿠웅!

위로 든 스웰던의 손을 잡은 정지우가 그와 거칠게 오른쪽 가슴을 부딪치고 난 다음이었다.

데이빗이 좌우로 시선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에게는 미친 골키퍼가 있지!”

“우히히히!”

긴장된 순간에 뜻밖의 말을 뱉어서인지 희한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Oh when the reds go matching in’이란 리버풀의 응원가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동료들하고 사이좋게 지냈지!”

선수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얼굴로.

“미친 골키퍼가 공을 막으면 우리는 이렇게 외쳤지!”

“예에에에-!”

데이빗을 따라 선수들이 오른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Come on!”

“예아-!”

다 함께 고함을 질렀고, 미친놈들처럼 움직여 손을 부여잡고 가슴을 부딪쳐 댔다.

“재미있군! 사령관! 오늘만큼은 그라운드를 지배해!”

이미 분위기를 탔다.

정지우는 릴리에게 약속할 때처럼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렸다.

솔직히 말할까?

장진모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경기에 나서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팀의 스태프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깡 하나는 누구에게 밀리지 않는 장진모의 무릎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후우- 우!”

장진모는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내뱉었다.

양 팀의 벤치에 있는 스태프들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긴장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9만 명이 몰려들 줄은 몰랐다.

그들이 모두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서 머플러를 흔들며 응원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장진모는 침을 삼키며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서 경기를 하는 심정은 어떨까?’

감정이입이 심하게 잘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정지우의 입장을 떠올리는 순간에 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긴장이 있는 대로 올라온 거였다.

어쩌면 관중들도 긴장을 털어 내기 위해 저렇게 악을 써 대는지 모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 노부부의 자녀, 손자, 손녀들, 덩치가 커다란 남자, 여자, 어린아이들이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승리를 갈구한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분명 늘상 들었던 응원가였다.

그런데 지금 듣는 건 사흘 전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장진모는 이제야 에이미가 해 주었던 ‘관중들이 자제한다.’란 말뜻을 제대로 이해했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그럼 정말 치고받을 때는 어떤 응원이 펼쳐지는 거야?

이런 속에서 선수로 뛰라면?

장진모는 역시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 달리 있는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전쟁을 하는 군인이 있다면, 그들을 취재하는 종군기자도 필요한 법이다.

유니온 시티와 리버풀은 도시 전체가 아예 FA컵 결승에 맞춰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펍이란 펍은 모두 한계 인원을 훌쩍 넘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TV를 향해 앉았고, 결혼식 피로연조차 한쪽에 켜 둔 TV 앞으로 하객들이 몰리는 수준이었다.

친구들끼리, 가족들끼리 거실에, 혹은 마당에 같은 유니폼을 입고, 맥주나 커피를 손에 든 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꽥꽥거리는 목소리로 TV에서 나오는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이가 나오면, 주변에 있던 이들이 곧바로 그를 따라 함성을 질러 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그래서 유니온 시티 곳곳에서 발을 구르며 외치는 단순한 고함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메기는 병원 1층에 급하게 만든 응원석의 한쪽에 앉았다.

당연하게 모포를 덮고 있는 릴리를 안았는데, 그녀의 오른쪽으로 데이지와 익숙한 병원 스태프들, 그리고 왼쪽에는 얀센과 클레이가 있었다.

아직 선수들이 몸을 풀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엄마, Ji가 나와의 약속을 기억할까요?”

고개를 돌린 릴리가 초록색 눈으로 메기를 바라보았다.

“공주님, Ji는 약속을 지켜! 그건 염려하지 말라고.”

그런데 답은 휠체어 앞으로 깁스한 다리를 걸고 있는 클레이가 했다.

릴리가 그에게 시선을 준 다음이었다.

“준결승 때 나와 약속했었지. 결승에 가기로. 오늘 우리가 그렇게 결승을 보고 있잖아. Ji가 공주님께 키스하는 건, 비를 맞으면 옷이 젖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일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이번엔 코에 깁스를 한 얀센이 끼어들어 릴리를 안심시켰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었을까?

“헤이! 여러분!”

클레이가 주변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오늘 경기에서 Ji가 여기 작은 공주님을 위해 두 손에 키스하고, 검지를 하늘로 올리겠다고 약속했어요!”

“우오-!”

짝짝짝짝짝짝짝짝!

이미 그 약속을 알고 있던 이들까지 놀랍다는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메기의 품에 고개를 파묻는 릴리의 볼이 수줍음과 자랑스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엄마의 품에서 돌린 릴리의 시선 앞에 데이지가 있었다. 팔에 연결된 링거가 그녀와 사이에 대롱거리고 매달려 있었지만, 눈을 마주치는 데 문제는 없었다.

“아직도 걱정돼?”

“아니요, 닥터 데이지.”

“그럼 왜?”

“Ji가 정말 저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키스해 주면 부끄러울 것 같아서요.”

데이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웃을 때였다.

『빠바빠- 밤! 빠바빠빠빰! 빠바빠- 밤! 빠바빠빠빠빠-!』

귀에 익숙한 ‘더 파이널 카운트다운’이란 곡의 앞부분이 TV에서 커다랗게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 아!』

그리고 관중들의 함성이 그 뒤를 따라나왔다.

지켜보던 이들이 박수와 함성을 지를 때, 릴리는 엄마의 품을 더욱 파고들었다.

“추워? 괜찮니?”

“아니, 엄마. 이상하게 떨려요.”

정지우의 등장을 상상하며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

데이지의 사인을 받은 메기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릴리를 꼭 안아 주었다.

빠바빠- 밤! 빠바빠빠빰! 빠바빠- 밤! 빠바빠빠빠빠-!

“우와- 아아아아아!”

함성이 귀를 파고들어서 머릿속을 아예 헝클어 놓는 느낌일 거다.

선수들이 등장하기 직전에 울려 나오기 시작한 음악이 독특한 멜로디를 반복하는 동안, 관중들은 아예 이성을 다 집어던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흥분한 관중들이었다.

‘이렇게까지 자극할 필요가 있을까?’

장진모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관중석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쇼 비즈니스에서는 이들을 따라가기 어렵다고 해도, 가뜩이나 열기가 치솟는 곳에 굳이 기름을 부어 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예에에-!”

리버풀 관중들이 선수들의 등장과 함께 고함을 질러 댔다.

“우와- 아아!”

그냥 지켜볼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아니어서, 역시나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웸블리가 들썩일 정도로 고함을 질러 댔다.

그렇다면 정지우는?

며칠 전, 에이미가 정지우의 등장을 비교해 보라고 했었다.

긴장한 눈으로 선수용 통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빠바빠- 밤! 빠바빠빠빰! 빠바빠- 밤! 빠바빠빠빠빠-!

정지우가 통로에서 나타나는 순간,

“이예에에에에에에에-!”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장진모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깊은 절벽으로 떠밀려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멍한 상태에서 정지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 정말 멋지다!’

바보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정지우를 바라보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라운드로 나온 선수들은 각자 편한 방식으로 몸을 푼다.

정지우는 기예르모와 함께 골대를 향해 걸었다.

음악, 함성, 고함.

중앙 벤치 위 좌석에 박용근과 전은주, 유정호가 있을 거고, 한국에도 방송한다고 했으니 김문호 부부와 신준석의 가족이 지켜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릴리가 정지우의 키스를 애타게 바라고 있을 거고.

“후! 후!”

기예르모가 또다시 긴장에 잡아먹힌 것처럼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Ji! 정말 안 떨려요?”

놈이 고함치듯 던진 질문이었다.

피식!

정지우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솔직히 가슴 안쪽에 담겨 있는 뜨끈한 긴장을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입을 열면 들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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