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99화 (99/262)

제3장. 한 수 위의 팀이다. (1)

기예르모의 홈 데뷔전이 승리로 끝나고 이틀이 훌쩍 지났다.

그 이틀 동안 정지우는 계속 레드 블레이트로 나가 FA컵 결승전에 대비해 동료들과 함께 훈련했다.

내일이 결승전이었다.

조금 더 일찍 훈련을 마친 정지우는 바튼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움직였다.

먼저 간단하게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저녁들 드세요!”

그리고 전은주의 외침에 주르륵 식탁으로 모였다.

밥을 차리는 것은 유정호가, 설거지는 바튼이 돕기로 하면서 전은주의 일이 줄어든 저녁 식사였다.

“잘 먹겠습니다.”

박용근이 젓가락으로 밥을 뜨는 것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리저브 팀의 시즌은 언제부터냐?”

박용근이 던진 질문이었다. 전은주도 궁금했던 모양인지 힐끔 시선을 주었다.

“시즌이 끝나가니까, 그래도 6주 정도 한국에 다녀오실 시간은 있을 것 같아요.”

“6주? 그럼 한 달 반 정도 되는 거구나?”

“예, 사모님. 대개 시즌 끝내고 훈련 시작하기 전에 그 정도 휴가를 주거든요. 그래도 부천 집이랑 꽃집 정리하시려면 부족하실 것 같은데요?”

전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먼저 출발하시고, 내가 나중에 오든가 해야지.”

말을 마친 전은주가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정지우를 보았다.

“고맙다, 지우야. 감독님께 이런 기회 만들어 준 거 절대 안 잊을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아무것도 해 드린 거 없어요. 그리고 함께 지내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전은주와 정지우가 박용근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네가 불편하지 않겠냐?”

“절대 아닙니다.”

박용근이 질문을 던졌고, 정지우가 얼른 답을 했다.

“지우야! 내일 쿠웨이트랑 하는 월드컵 예선전 여기서 볼 수 있는 거냐? 스포츠 채널에서 하는 거 같던데?”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유정호가 대화에 끼어들고 싶어서 만들어 낸 것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런데 쿠웨이트 시간으로 저녁 6시여서 한국 시간으로 자정, 여기 시간으로 오후 3시야.”

“그럼 우린 못 보겠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유정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뚝뚝 떠서 국에 넣었고, 바튼이 그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튼이 돌아가고 소파에 앉아 리버풀의 경기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패턴을 익혀. 저들의 움직임. 어떤 선수를 어디에서 막으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경기를 뛰어 보면 알면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실력 차이지.”

정지우와 유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리버풀의 경기를 보면 잘될 때와 망가질 때가 워낙 분명한데, 중앙 미드필더들의 컨디션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 여기! 여기서 공을 뿌리는 방향과 이후에 이어지는 패턴을 기억해 둬라.”

박용근은 화면을 정지시킨 다음 손가락으로 공을 잡은 선수를 가리켰다.

“이때 2선에서 달려오는 선수들을 제대로 막을 센스를 가진 선수가 유니온에선 라파엘이 유일해. 골키퍼의 위치야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테니 그건 말할 것 없고.”

박용근은 영상을 다시 돌리며 리버풀의 패턴을 설명해 주었다.

축구 팬이라는 이들 중에도 감독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어차피 뛰는 건 선수고, 그 선수들이 맡는 포지션이 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팀을 맡으면 가장 먼저 체력 강화 훈련을 시킨다. 죽어라고 더 뛰면 훨씬 좋은 성적을 이뤄 낼 거라는 계산이 앞서는 거다.

그런데 막상 경기에 나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막말로 선수가 2차원의 공간을 달린다면, 감독은 3차원의 시선으로 경기를 본다.

상대 팀의 성향에 따른 선발, 경기 중간에 적절한 교체, 그리고 그날그날 팀의 색을 바꿔 주는 것이 리그를 끝낼 때의 성적으로 돌아온다.

1시간이 넘게 영상을 함께 보았는데, 감독의 부인답게 전은주는 지겨운 기색 없이 자리를 지켰다.

지난 6년간 이렇게 큰 경기에 나서 본 적은 없었다.

원체 경기에 대한 긴장을 잘 느끼지 않는 성격 탓에 별거 있겠냐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TV를 끄고 나자 보이지 않는 중압감이 서서히 소파 주변으로 몰려들어서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전은주와 유정호가 힐끔힐끔 정지우의 눈치를 살핀 것은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컨디션은 어떠냐?”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부상은?”

“전혀 걸리는 거 없어요. 괜찮습니다.”

정지우는 상체를 기울여 다리를 만져 보았다. 실제로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 시즌에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동안, 매주 맞이해야 하는 게임들과 다를 바 없다.”

“예.”

“리버풀이 올해 성적이 안 좋아서 최고의 스쿼드로 나설 거 같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게 분명해서 쉽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해도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되는 거야. 알았지?”

“예, 감독님.”

이런 날, 박용근과 전은주, 유정호가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낯간지럽게 그걸 또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내겠나.

“잠은 잘 수 있겠냐?”

“예.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정지우가 웃으며 건넨 답에 박용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시간이었다.

“감독님, 전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푹 자라.”

“잘 자, 지우야.”

“예. 편히 주무세요.”

정지우는 차례로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움직였다.

이제는 그나마 익숙해진 침대에 눕자 그라운드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리버풀 선수들이 등장하고,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그 앞에 위치를 잡았다.

최선을 다해 달려드는 한 수 위의 팀이다.

정지우는 최근 며칠 동안 수없이 보았던 그들의 움직임을 그려 냈다.

버거운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잘 시간이었다.

바튼이 운전하는 밴을 이용해서 바로 웸블리로 갈 수 있었지만,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어깨를 두드려 주는 박용근과 손을 잡아 주는 전은주, 그리고 긴장한 얼굴로 웃는 유정호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을 나섰다.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다 긴장됩니다.”

“그 말이 어때서?”

“부담 줄까 봐서요.”

아닌 게 아니라, 바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그려 내고 있었다.

“골키퍼를 했다고 했었지? 그때는 어땠어?”

“별로였습니다. 이상하게 몸을 던지고 보면 공이 지나간 다음이더라고요.”

말을 하고 웃겼는지 바튼이 혼자서 픽 웃었다.

“Ji가 공을 막아 내고 가슴의 엠블린을 두들길 때 있잖습니까. 가끔은 침대에 누워서 그 장면에 내가 Ji 대신 들어 있는 상상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한 번쯤 그런 경기를 해 봤다면 지금처럼 서운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서 정지우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Ji와 함께 움직이는 이 일에 정말 정말 만족합니다. 내가 꿈꿔 왔던 골키퍼가 어느 날 TV 속에 나타난 거였습니다. 그때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지요.”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웸블리로 가는 흥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바튼은 평소보다 유독 말이 많았다.

“당신은 골키퍼를 했었던 나의 영웅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에 정말 만족합니다.”

“고마운 말인데, 우린 그럴 사이가 아니잖아.”

정지우가 웃으며 답을 하는 동안, 밴은 레드 블레이트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행운을 빕니다.”

“나중에 봐.”

바튼이 내민 손을 위로 들어 꽉 잡아 준 정지우가 이동을 위해 서 있는 구단 전용 버스로 움직였다.

“하이!”

굵직한 음성의 무둔바가 정지우를 향해 손을 들었고,

‘Ji!’ 기예르모가 눈빛을 빛내고 있었으며,

‘리버풀을 박살 낼 준비가 됐어?’ 스웰던이 벌써 화가 치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석 대의 버스가 움직였다.

데이빗과 라파엘, 카알, 레믹이 정지우가 탄 버스에 올랐고, 차례대로 인사를 마쳤다.

“후우-!”

정지우는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을 털어 내려 나직하고 길게 숨을 뱉어 냈다.

9만 명이다.

오늘 웸블리 스타디움에 가득 들어찰 관중 숫자가.

FA컵은 예선부터 시작해 모든 경기 일정을 토요일로 정한다. 먼저 불린 팀의 홈구장에서 경기를 하고, 비기면 상대 팀 홈구장, 그래도 비기면 제3의 구장으로 옮겨서 승부가 날 때까지 경기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다른 경기와 겹치지만 않는다면 이 일정은 불변이다.

그리고 오늘 결승전은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벌어진다.

가고 싶었다. 웸블리행을 결정지었을 때 선수들은 환호했고, 관중들은 열광했었다.

“후-!”

막상 버스가 출발하자 정지우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조금씩 떨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할 때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하나둘 침묵에 빠져들었다. 역시나 헤드셋을 이용해 음악을 듣는 선수가 가장 많았다.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다.

정지우는 버스의 창으로 머리를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FA컵을 시작으로 삶이 바뀐 거다.

어머니, 릴리, 박용근과 전은주.

‘저 행복해하는 거 보고 계세요? 이젠 웃는 것에 좀 익숙해졌어요. 아직도 맛있는 음식 보면 어머니 생각나요. 옛날에 불고기 처음 먹었을 때처럼요. 가져다드릴 수 있었으면 싶어요.’

하얗거나 회색인 구름 저 너머에서도 정지우가 보일까?

‘엄마, 나 행복해. 그러니까 절대 힘들어하지 마. 엄마가 내 앞길 막은 거 절대, 하나도 없어. 알았지, 엄마?’

버스가 확실히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

식어 가는 축구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방송은 수시로 월드컵 예선 쿠웨이트전을 홍보했다.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이란 응원가의 그 유명한 ‘오오- 오오- 오오오!’, ‘오오- 오오- 오오오!’ 하는 구절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그 위에 자막이 떠올랐으며, 안내 멘트가 이어졌다.

『더 이상은 물러날 수 없다는 태극전사들의 불타는 투지! 오늘 밤 11시 50분! 월드컵 예선 쿠웨이트전에서 뜨거운 감동을 함께하십시오!』

이어서 협찬사 이름이 쭉 나왔는데, 이런 홍보가 대략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영국 FA컵 결승 중계는 종편에서 맡았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예선전과 하필이면 시간도 비슷했고, 메이저 방송국과의 경합은 말도 안 되는 것이어서 홍보는 그다지 되지 않았다.

조동익은 모처럼 만족한 얼굴로 한승관에게 차를 권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홍보를 내보내지? 한 위원이 이번에 애썼어. 신문 기사도 그렇고.”

한승관이 조신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 좀 해 봐! 얼마나 좋아!”

“더 노력하겠습니다.”

“유니온인가 하는 팀은 거, 리버풀하고 붙는다면서? 그것도 사흘 전에 경기를 뛰고. 허허! 허허허!”

조동익이 이렇게 웃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 와중에 또 보호한답시고 이전 경기에는 내보내지도 않았다면서? 이런 걸 저속한 말로 뭐라 하던데? 어! 아주 쇼를 하는군! 쇼를! 허허허! 허허허허!”

기분 좋은 웃음이 사그라진 다음이었다.

“문 감독과는 연락해 봤나?”

“쿠웨이트의 주전 공격수 두 명이 확실히 부상으로 명단에서 제외되었답니다. 문 감독도 전에 없이 자신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허허허! 그럼!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하니까 하늘이 다 돌봐 주는 거지. 암! 자, 그럼 우리는 점심이나 하러 갈까? 괜찮지? 한 위원?”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조동익과 한승관이 밝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

웸블리 스타디움으로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항구도시와 철강 도시의 대결이었다.

굳이 오래전 헤이즐 참사를 들지 않더라도 워낙 열광적인 응원으로 유명한 리버풀과,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응원 문화를 지닌 유니온 시티의 대결이기도 했다.

경찰들이 도로 전체를 감싸다시피 했고, 완전무장한 기마경찰까지 등장해서 분위기 자체는 살벌했다.

피르스트 웨이, 페리미터 웨이, 린덴 애비뉴, 호텔 아이비스 런던과 연결된 모스틴 애비뉴 일부의 차량 출입을 막았을 정도로 웸블리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길마다 걸어오는 관중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렇게 걸어간 관중들이 1층 3만4천여 명, 2층 1만6천5백여 명, 3층 3만9천여 명의 좌석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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