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98화 (98/262)

제2장. 지금은 동료인 게 더 중요해. (3)

기예르모가 코너킥을 멋지게 잡아낸 거였다.

물론 환상적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등급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렇더라도 관중들이 환호했고, 수비수들이 달려와 흥분한 기예르모의 뒤통수와 등을 두드리며 응원했다.

정지우의 부탁이 없었다면?

그래도 수비수들이 그에게 줄줄이 달려와 머리통과 등을 두드리고, 손을 잡아 가며 응원했을까?

박용근이 그런 것처럼 마틴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예르모의 변화와 평소보다 과하게 골키퍼를 칭찬하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행동을 확실하게 알아보았다.

마틴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벤치 앞의 테크니컬 에어리어로 걸었다. 터치라인 바깥과 벤치 사이에 네모난 선을 그어 놓았는데, 이 안에서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할 수 있었다.

잔인한 공간이기도 했다.

불과 1미터 옆에서 밀턴 FC의 감독이 강등을 피하기 위해 선수들을 향해 악을 바락바락 써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키퍼가 중심을 잡았다. 그래서 마틴은 ‘데이빗! 데이빗!’ 하고 커다랗게 부른 후, 손을 세워 밀턴 FC 진영을 향해 밀었다.

이제 승부를 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마틴이 이렇게 테크니컬 에어리어로 걸어 나온 것은 지금의 지시를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돌아서서 벤치로 걸어오며 시선을 위로 들었다.

‘보셨습니까? 우리 팀은 동료를 저렇게 생각합니다.’

박용근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 마틴은 빠르게 정지우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가 다시 들었다.

‘우리 팀의 보물이죠. Ji가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낼 겁니다. 한 팀으로 싸울 테니까요.’

박용근의 작은 눈과 입이 웃음을 그려 낸 것을 확인한 마틴은 코칭스태프와 서브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웃기는 좀 그렇다. 그래서 공연히 눈을 부라리며 게임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얼굴을 만들었다.

지금 본 웃음에서 박용근이 리저브 팀을 맡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해서, 정지우 덕분에 팀이 더욱 단단해져 가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도 감독이 히죽거리며 웃는 건 좀 그런 거다.

벤치에 앉은 마틴은 다리에 두 팔을 걸치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겨운 팀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동료들이 뒤처지는 동료의 어깨를 받쳐 주는 팀.

마틴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기 위해 눈을 좀 더 고약하게 떴다.

기다려진다. 기대된다.

다음 경기인 FA컵 결승부터 프리미어리그에서 맞이할 다음 시즌이.

기예르모라는 약점을 잡혔던 유니온 시티의 족쇄가 전반 초반에 바로 해결됐다. 그 덕분에 봉인을 풀어낸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무섭게 밀턴 FC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데이빗과 카알, 꼼빠니로 이어지는 든든한 뒷받침에 레믹이 설치기 시작하자, 경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펼쳐졌다.

투욱!

그리고 밀어붙이던 밀턴의 수비수 사이로 꼼빠니가 기가 막힌 패스를 찔러 넣었다.

휘이익!

거듭 말하지만, 유니온에는 이런 거 받아먹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가 있는 거다.

귀신처럼 튀어나온 레믹이 방향만 바꿔 골대를 향해 공을 밀어 넣었다.

“우-!”

정말이지 깻잎 한 장 차이로 공은 왼편 골포스트를 스쳐 빠져나갔다.

머리통을 감싸고 아쉬움을 표하는 레믹처럼 관중들 역시 뒤통수에 손을 얹고 탄성을 쏟아 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그러나 홈 관중들은 슈팅의 아쉬움을 털어 내고 슈팅까지의 과정을 손뼉으로 응원했다.

‘한 골만 넣자!’

선수들은 그런 격려에 동기를 부여받고, 좀 더 눈빛을 빛낸다.

레드 블레이트는 그렇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장진모는 그라운드의 분위기와 느낌, 그리고 인상적인 장면들을 그만이 알아보는 단어들로 빠르게 적어 나갔다.

한 편의 커다란 서사시를 보는 느낌이었다.

끊이지 않는 홈 관중들의 응원, 그 사이사이에 잔류를 희망하며 펼쳐지는 밀턴 FC 원정 응원단의 간절한 함성.

투박하고 거칠게 펼쳐지는 선수들의 몸싸움, 거친 호흡 소리, 서로를 부르는 커다란 고함까지.

공이 움직이는 곳은 당연하고, 공이 움직이지 않는 지역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리고 다투는 모습도 모두 보았다.

중계방송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모습들이었다.

이게 차분한 느낌이라면 도대체 열광할 때는 어떤 모습일까?

장진모가 수첩과 펜을 내리고 다시 그라운드를 바라볼 때였다.

“장 기자님.”

어디론가 갔었던 에이미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주변을 살핀 후에 시선을 그라운드로 둔 채로 빠르게 말을 꺼냈다.

“Ji와의 인터뷰를 못한 것을 대신하고, 장 기자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선물이에요. 유니온 시티에서 박용근 감독에게 리저브 팀 코치 자리를 제안했어요.”

뭐? 박용근에게 뭘 제안했다고?

장진모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라운드를 보세요.”

에이미는 손가락으로 공이 움직이는 밀턴 FC 진영을 가리켰다.

“FA컵 결승전이 끝나면 하루나 이틀 안으로 결과가 나올 거예요.”

에이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Ji를 담당한 우리 구단 직원의 말로는 박용근 감독이 코치직을 수락하겠다고 했다네요. 정상적으로 처리되면 FA컵이 끝나고 이틀 안으로 계약이 체결될 거고, 바로 오피셜이 뜰 거예요.”

장진모는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축구 종가인 영국에서 두 명의 재능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인재들이 이렇게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엄청난 정보를 준 것에 감사하는 것이 먼저였다.

“에이미, 이런 도움을 준 점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를 주신 분이 장 기자님이세요. 이번 취재에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도움 이상입니다. 박용근 감독과 정지우 선수, 그리고 유니온 시티에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진모는 정지우의 위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이 남자들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이 0 대 0으로 끝났다.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이 모두 라커룸으로 들어갔고, 서브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와 몸을 풀었다.

장진모는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겠느냐는 에이미의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하프타임 동안 관중석의 분위기를 살폈다.

“우- 오오오오!”

커다란 함성을 쏟아 낸 관중들은 계속해서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라는 구호를 외쳐 댔다.

홈 관중들의 응원이 끝나면 기다렸다는 것처럼 다시 밀턴 FC 원정 응원단이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The world has ever seen!’이라는 단순한 응원 구호를 반복해서 질러 댔다.

약속한 것처럼 상대 응원단이 구호를 외치거나 응원할 때 방해하는 법은 없었다.

그런 열기 속에서 서브 선수들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몸을 푼다. 저 서브 선수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엄청난 함성에 차츰 적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진모는 문득 궁금한 것이 있어서 시선을 돌렸다.

“미스……?”

“그냥 에이미라고 부르세요.”

“고맙습니다, 에이미. 이곳에서 정지우의 인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느낌인가요? 유니온 시티 구단이나 홈 관중들에게요?”

눈과 입을 샐쭉하게 움직인 에이미가 퍼뜩 생각난 것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우리 홈 관중들은 그를 Mr. AmaJing이라고 부르죠. 중간에 Z가 아니라 J를 넣어서 불러요. 그리고 그는 언제나 우리를 열광하게 만들어요. 그가 뛰는 모든 게임에서요.”

장진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결승전에서 보세요. 그가 어떻게 우리의 홈 관중들을 뜨겁게 달구는지요. 미디어 담당관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Ji만큼 경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선수는 처음이에요. 그는 정말 놀랍고, 위대하고, 환상적이지요.”

장진모는 입가에 미소를 담고 또다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녀의 눈에 담긴 정지우에 대한 진심 정도는 알아챌 수준을 지닌 장진모였다. 그는 진심으로 정지우가 선발로 나서는 FA컵 결승전이 기대됐다.

라커룸은 시끌시끌했다.

“Ji! 아까 봤지요? 그거 아무나 막는 게 아닌 거잖아요!”

그중에서도 기예르모의 목소리가 가장 컸는데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투욱!

그저 듣고 있던 데이빗이 얄밉다는 건지, 기특하다는 건지 모를 눈길로 뒤통수를 세게 때렸고, 스웰던이 다가와 ‘후반에도 그렇게 하라고. 안 그러면 재미없어!’ 하며 맞장구를 쳐줄 뿐이었다.

정지우는 입가에 웃음을 달고 기예르모를 바라보았다.

“너 이적에는 문제없는 거냐?”

“예?”

“임대 후 이적 형태라면서? 여기서 갑자기 활약하면 전 소속팀에서 널 붙잡고 싶을 수도 있을 거 아냐?”

“그 이야기는 이미 확실하게 끝낸 겁니다.”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얀센이 돌아올 때까지 둘이 버텨야 한다.

프리미어리그 소속팀이라면 골키퍼를 4명까지 보유하곤 하는데, 유니온 시티는 당장 그렇게 하기에는 무리인 팀이었다.

이 자식이 감정 기복이 덜하면 좀 더 좋을 텐데.

“Ji! 저놈 아무래도 널 보는 눈빛이 수상해! 샤워할 때 조심하라고! 할 말이 있다고 밖에서 만나자고 하면 내게 꼭 연락하고!”

“우-!”

“우히히히!”

스웰던의 투박한 농담에 탄성과 독특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기 중간치고 라커룸의 분위기는 최고였다.

설마 이놈이 정말 그런 건 아니겠지?

정지우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Ji, 나 당신을 찾아오길 정말 잘했어요.”

기예르모가 말을 건네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후반에도 양 팀은 전반과 다를 바 없는 경기를 펼쳤다.

지나치게 움직임이 많은 기예르모가 걱정스럽긴 했는데, 솔직히 밀턴 FC의 공격 루트가 워낙 단조로워서 그다지 위협적인 장면은 없었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원정 응원단의 응원 구호가 애처롭게 느껴진다는 것이 좀 다를까.

후반 25분이었다.

밀턴 FC의 강등행 좌석 안전벨트를 다른 선수도 아닌 스웰던이 철컥 채워 버렸다.

골키퍼 에어리어 왼편까지 밀고 올라간 스웰던이 수비를 위해, 단지 시간을 벌어 볼 생각으로 날렸던 슈팅이었다.

그런데 그 공이 바닥을 두 번 튀며 몸을 날린 밀턴의 골키퍼 손 위를 지나가 버린 거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마틴의 바로 옆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밀턴 FC의 감독은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결국 마틴이 애꿎은 상의를 만지작거리며 점잖게 돌아섰을 정도로 잔인한 골이기도 했다.

스웰던이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는데, 어쩐지 적의 목을 가르고 돌아오는 중세 시대 병사처럼 보였다.

승부란 원래 잔인함을 포함한 거다.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 이! 굿- 바이!”

이런 순간에 불러 대기는 엄청나게 잔인한 응원가를 유니온 시티 응원단이 목청껏 불러 대는 동안, 시간은 일정하고 공평하게 흘러갔다.

만약 상황이 바뀌어서 유니온 시티의 강등을 확정 짓는 경기였다면 어땠을까? 이건 두말할 나위 없이 답이 나온다. 밀턴 FC 원정 응원단도 분명 저런 식의 응원가를 불렀을 거다. 그것도 레드 블레이트에서 말이다.

이것이 영국 리그이고, 또한 이런 모습이 영국 리그가 매 경기 승부에 열광할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걸 거다.

비겨도 탈락이 확정되는 팀, 밀턴 FC.

그들이 힘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틈을 파고 레믹이 완벽하게 숨통을 끊어 버렸다.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일제히 밀고 올라온 밀턴의 뒤편으로 꼼빠니가 공을 길게 날려 주었고, 레믹이 수비수들의 뒷공간을 파고들어 통렬한 슈팅을 꽂아 넣었다.

“이예에에에에에-!”

흥분한 홈 관중들의 함성, 허공에 높다랗게 뛰어오른 레믹, 그 앞에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떨군 밀턴 FC의 선수들과 얼굴을 감싼 모습으로 울고 있는 어린 원정 팬이 레드 블레이트의 승리와 패배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삑! 삐이익! 삐이이익!

“이예에에에에-!”

어린 원정 팬의 눈물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처럼 주심이 기다랗게 휘슬을 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