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지금은 동료인 게 더 중요해. (2)
삐이이익!
양쪽으로 늘어선 선수들을 둘러본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어 경기 시작을 알렸다.
“우와- 아!”
사흘 뒤에 있을 FA컵 결승을 기대한다고 해서, 너그럽게 다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고는 하지만, 관중들이 맥 빠진 채 버린 듯한 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축구공은 둥글다.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는 그 둥근 공의 방향을 누가 더 많이, 더 정확하게 통제할 수 있는가가 승부를 결정짓는다.
밀턴 FC는 이 경기를 잡아도 다른 강등권의 팀 성적에 따라 잔류와 강등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막말로 강등권행 기차에 발을 얹은 상태였는데, 오늘 경기에서 지거나 비기면 바로 자리가 지정되고 안전벨트를 찬 꼴이 되는 거였다.
당연하게 밀턴 FC 선수들은 초반부터 거세게 뛰어다녔고, 데이빗과 라파엘은 라인을 내린 상태에서 반격을 노린 것처럼 뛰었다.
양 팀 모두 전형적인 4-4-2 포메이션을 선택했다. 다만, 객관적인 실력이 우세한 유니온 시티가 좀 더 자유롭게 4-2-3-1의 포메이션으로 변화를 주는 것의 차이는 있었다.
박용근과 전은주, 유정호는 당연하게 벤치 위의 자리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FA컵 준결승전을 직접 관람하며, 그때 열광하는 관중들을 보아서인지, 오늘의 경기는 그라운드를 뛰는 선수들과 홈 관중들 모두 차분한 모습으로 느껴졌다.
밀턴 FC는 초반부터 유니온 시티의 골대를 향해 뻥뻥 공을 내지르고, 일제히 달려드는 전술로 나서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공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전은주와 유정호 사이에서 박용근은 고개를 갸웃하며 유니온 수비수들을 살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달려드는 상대 팀 공격수와 공에게서 골대를 지키는 것이 수비수의 역할이다. 그런데 어쩐지 유니온 시티의 수비수들과 미드필더들은 피구에서 살아남은 한 명을 지키는 것처럼 골키퍼와 골키퍼 에어리어의 정면을 막아 대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도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수비수들의 움직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정말 위험한 행동이었다.
박용근은 다시 한 번 레믹에서부터 미드필더, 그리고 라파엘까지를 살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은 눈을 더욱 찌푸리며 골키퍼를 살폈을 때였다. 박용근은 기예르모가 정지우를 힐끔거리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벤치 바로 위쪽 자리에 앉은 박용근이다.
바로 앞에 붉은색 벽돌로 테두리를 둘러놓았고, 그 안쪽에 정지우가 앉아 있어서 시선만 내리면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였다.
정지우는 손을 얼굴 높이로 들고 안 그런 척하며 사인을 주고 있었다.
박용근은 시선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정지우의 사인과 기예르모의 동작을 확인했다.
“우와- 아!”
꼼빠니가 공을 잡아 앞으로 넘기자, 서브 선수인 그렉이 천천히 밀턴 FC 방향으로 공을 몰고 움직였다.
정지우는 움직임이 없고, 기예르모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투우욱!
공이 뒤로 돌았고, 데이빗이 잡는 순간이었다.
기예르모가 얼른 시선을 주었고, 정지우가 양손을 아래로 누르며 안심하라는 사인을 던졌다.
비밀은 알았다. 남은 것은 도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경기는 단순하게 흘러갔다.
시종일관 뻥뻥 공을 차 대는 밀턴과 역습을 노리는 유니온 시티의 대항이어서, 아직 전반까지 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소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기예르모는 경기에서 이렇게 긴장할 정도로 허술한 골키퍼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선방도 펼쳤고, 동료들의 신뢰도 얻었었다.
그런데 한 경기에서 세 번이나 가랑이 사이로 골을 먹은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장 먼저 경기에서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 골을 먹은 직후에 그라운드를 짓누르던 침묵이 그대로 기예르모의 온몸에 달라붙어 계속해서 찍어 누르는 느낌이었다.
퍼어어엉!
저렇게 길게 공이 날아오기만 해도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누가 차든 간에 가랑이를 통과해 골대로 굴러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이 가장 먼저 코를 막고, 다음으로 다리를 붙든다.
억울했다. 솔직히 할 말도 많았다.
동료들이 막아 주었어야 할 곳이 뻥뻥 뚫려서, 세 번 중 두 번은 상대 공격수와 일대일의 상황이었었다.
그러나 골을 먹은 건 어디까지나 기예르모였다.
그것도 비참하게 세 골 모두 가랑이 사이로.
일종의 도박이었다.
첫 골을 가랑이 사이로 먹었으니 다음 골은 위로 오겠지?
좋아! 두 번째 골도 이렇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그리고 그라운드 전체가 깊은 침묵에 빠져들고 말았다.
출렁이는 그물, 골대 안을 구르는 공.
관중들의 서늘한 침묵과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경멸하듯 바라보던 동료들의 눈초리.
“우-!”
밀턴의 11번 선수가 유니온 시티의 왼편 진영을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도와줘!’
기예르모는 빠르게 정지우를 보았다.
안심하라고? 공이 저렇게까지 왔다니까!
엉금엉금 움직인 기예르모가 왼편으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무둔바!”
라파엘이 무둔바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덩치가 커다란 흑인 선수 무둔바가 겅중겅중 뛰어서 달려왔고, 땀 냄새를 훅 끼치며 기예르모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막는다! 난 막을 거다!”
무둔바가 최면에 걸린 성의 문지기처럼 고함을 질러 댔다.
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미친 인간아! 골키퍼 앞을 이렇게 막으면 어떡하라고!
기예르모가 고개를 살짝 틀었을 때였다.
퍼어어엉!
왼쪽 코너에서 골대 앞을 노리고 높다랗게 공이 날아왔다.
기예르모는 숨이 턱 막혀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막아! 헤이!”
데이빗이 악을 쓰는 소리,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 그라운드를 밟는 스터드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분명 보고 있다. 눈앞에서 펼쳐진 장면인 거 안다.
그런데 마치 다른 세상에서, 물속 저 너머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숨이 안 쉬어지고, 몸이 안 움직였다.
“우와- 아아아!”
함성이다. 저 선수가 슛을 하는 거다.
막아야 하는데?
터어엉!
또 골을 먹는 건가?
끔찍한 침묵과 골대 안을 구르는 공을 확인해야 하나?
기예르모가 눈을 부릅떴을 때였다.
화아악!
라파엘이 공을 향해 몸을 던졌고,
티잉!
공이 오른쪽 중앙선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밀턴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악착같이 뛰었다.
그래서 그들은 2선에서 잡은 공을 몰고, 빠르게 흔들리는 유니온 시티 진영을 파고들었다.
어쩌지?
기예르모의 코를 누군가 틀어막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그의 앞을 또 막아섰다.
무둔바였다.
뭐 하는 거야? 좀 떨어져 있어야 남들이 모를 거 아냐? 이러면 다들 눈치챈다고!
기예르모가 오른쪽으로 몸을 빼는 순간,
퍼어엉!
슛이 날아왔다.
기예르모가 반응하기도 전이다.
휘이이익! 터어엉!
무둔바가 높다랗게 몸을 띄우며 머리로 공을 걷어 냈다.
“헤이!”
데이빗이 달려와 무둔바와 손을 마주쳤고, 라파엘이 뛰어와 그의 등을 툭 치고 달려갔다.
코너킥이다.
“옆에서 오는 건 막는다면서? 한번 보여 줘.”
자랑하지도 않는다. 골키퍼 대신 슈팅을 막아 놓고.
땀에 흥건히 젖은 시커먼 얼굴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무둔바의 눈이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Ji를 기억해! 그가 그랬어! 위치만 지키라고! 난 그대로만 하는 거다!”
코너 플래그에서 밀턴의 선수가 공을 세우고 있었으며, 골대 앞에서는 데이빗과 라파엘, 맥슨과 스웰던이 상대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오는 거잖아! 정면은 내가 맡는다니까!”
무둔바가 고함을 지를 때, 그의 턱을 타고 떨어져 내린 땀이 분명하게 보였다.
“기예르모!”
그가 악을 쓰며 부른 이름을 들으며 기예르모는 몸을 돌렸다.
이건 정면이 아니다.
절대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갈 수도 없다.
“후우-! 후우우!”
기예르모는 커다랗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퍼어어엉!
그때였다.
공이 높다랗게 날아서 반대편 골키퍼 에어리어 끝을 향해 떨어졌다.
무둔바가 빠르게 몸을 틀었고, 유니온 수비들이 악착같이 달려드는 게 보였다.
기예르모가 억지로 공을 향해 움직였을 때, 공은 무둔바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후우우! 후우우!”
가쁜 숨을 내쉴 때였다.
퍼어엉! 티잉!
누군가 슈팅을 했고, 또 다른 누군가의 발에 맞아 공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휘이이익!
무둔바가 높게 솟구친 다음이었다.
기예르모의 시선에 무둔바의 머리를 넘어서 날아오는 공이 보였다. 이전까지의 장면을 전혀 보지 못했고, 시선을 들어 ‘공!’ 하는 순간에 공은 바로 눈앞까지 날아와 있었다.
기예르모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었다.
휘이익! 터억!
“이예에에에에-!”
생전 처음 듣는 것 같은 함성이었다.
“흐흐흐! 멋진 플레이다!”
무둔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예르모의 뒤통수를 툭 때렸고, 데이빗과 라파엘, 스웰던이 달려와 아플 정도로 세게 머리통을 때리고 달려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관중들이 지르는 유니온 시티 특유의 응원가도 나왔다.
‘놓쳐도 되는 경기? 밖에서 응원해 주는 관중들의 함성이 너에겐 그렇게 느껴지는 거냐? 힘겨운 노동을 대가로 표를 구입해 준 저 관중들 앞에서 그따위 생각을 가지고 골대를 지키겠다고?’
양손을 기예르모를 향해 뻗은 관중들이 연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철강 노동자의 도시 유니온 시티다.
늘 같은 진 바지, 체크무늬 셔츠, 그리고 점퍼.
그들이 그 힘겨웠을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며 바라는 경기.
퍼어어엉!
기예르모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다시 코너킥이 날아왔다.
어디지? 어디야?
무둔바가 앞을 가로막다시피 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홰액!
기예르모는 얼른 몸을 왼쪽으로 빼냈다.
퍼어엉!
그리고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슈팅이 바닥을 타고 날아왔다.
불쑥!
봤다. 분명하게 알았다.
무둔바가 발을 뻗는 것을!
그가 악착같이 기예르모를 지켜 주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던지는 것을!
공은 걸릴 수도 있고, 스칠 수도 있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날아왔다.
휘이이익!
기예르모는 세 번의 골을 먹은 이후, 처음으로 몸을 제대로 던졌다.
‘Ji! 나 몸을 던졌어요! 몸을 던졌다구요!’
터어억! 털썩!
“이예에에에에-!”
“막았어! 내가 막았다고! 내가 막았다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기예르모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벤치를 향해 악을 써 댔다.
정지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Ji! 내가 막았다고요!”
숨이! 숨이!
깨끗한 숲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폐로 숨이 모두 들어왔고, 모든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네가 막은 거 다 알아!”
투욱!
고개가 앞으로 숙여질 정도로 데이빗이 세차게 뒤통수를 갈기고 밀턴의 선수에게로 달려갔다.
“이 미친 골키퍼 놈!”
스웰던이 인상을 쓴 것 같은 얼굴 아래에 웃음을 달고 다가와 가슴을 세게 부딪치고 뛰어가기도 했다.
“무둔바! 앞을 비워 줘!”
“흐흐흐! 물론이지!”
기예르모의 눈빛과 움직임을 본 무둔바가 어딘지 잔인하게 들리는 음성으로 답을 하고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움직였다.
장진모는 기자다.
함성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볼 여유를 찾았다.
연속된 유니온 시티의 위기였다.
그런데 장진모의 시선에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 특히 골키퍼가 자꾸만 벤치를 힐끔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고 멋진 선방도 펼쳐졌다.
당연하게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함성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장진모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골키퍼 기예르모와 정지우를 노려보았다.
몸을 날려 골을 막아 낸 기예르모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악을 써 가며 노려본 곳, 그 끝에서 정지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해라.’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몇 번인지 모를 코너킥이다.
‘이거 봐라?’
골키퍼가 처음으로 수비수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모습도 나왔다. 그 앞을 막아 주던 흑인 선수가 지금은 옮겨 가 상대 공격수를 밀쳐 내는 모습도 보였다.
장진모는 다시 정지우를 보았다.
동양인 선수, 골키퍼, 고국인 한국에서 더럽게 대접 못 받는 외톨이.
그런 선수가 축구의 종주국에서, 그것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팀의 동료들에게 저렇게나 인정받고 있는 거다.
‘넌 내가 절대 안 놓칠 거다. 너의 재능을 위해서! 너 같은 천재를 버린 썩어 빠진 인간들이 있다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장진모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의 팬으로서, 한 사람의 기자로서, 난 네가 가진 재능을 세상에 알릴 거고, 너를 밀어낸 자들의 더러운 모습을 반드시 밝혀내고 말 거다.”
“이예에에에-!”
그의 각오를 뒷받침하듯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