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96화 (96/262)

제2장. 지금은 동료인 게 더 중요해. (1)

뱃머리에 매달린 바이킹이 거친 파도에 높다랗게 올랐다가 떨어질 때 지를 것 같은 ‘위- 호-!’ 하는 괴성이 레드 블레이트 앞을 떠다녔다.

그야말로 경기를 즐기기 위해 모였다고 할 정도로 편안한 얼굴을 한 홈 관중들은 서로를 확인하면 꼭 바이킹처럼 괴성을 질러 댔다.

승격은 이미 확정되었다.

그리고 사흘 뒤에는 꿈에서나 그리던 FA컵 결승이 있는 날이다.

“Enjoy the Game(게임을 즐겨)!”

공연히 강등권 팀과 사투를 벌이다가, 사흘 뒤에 있을 결승을 망치지 말라는 의미에서 홈 관중들이 외치는 구호였다.

그래서 유니온 시티에게 오늘 밀턴 FC와의 경기는 일종의 전야제와 같았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그래도 경기는 경기인 거다.

홈 관중들이 일정한 리듬을 타고 외치는 단순한 고함이 레드 블레이트를 점점 달구고 있었다.

장진모는 임시 출입증을 가슴에 달고 그라운드의 안쪽에 서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귀를 파고드는 함성이 그라운드에 메아리를 만들 정도인 줄은 TV를 보며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한다.

북소리에 맞춰 제자리에서 뛰는 관중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또 어떤가.

‘정지우는 이런 속에서 경기를 했었던 건가?’

물론 슈퍼 세이브를 펼치거나 골이 들어갔을 때 관중들이 열광하는 장면쯤 화면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경기 시작을 한참이나 앞둔 시점인 거다.

“FA컵 결승을 앞두고 있어서 오늘은 관중들이 꽤 조용하네요. 괜히 선수들이 흥분할까 봐 자제하는 모양이에요.”

조용해? 자제하는 모양이라고?

미디어 담당관 에이미가 소리 지르듯 전해 준 말을 들으며, 장진모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솔직히 에이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존경한다고 하더니, 그것과 과장하는 건 별개인 모양이었다.

“저쪽에 선수들이 보이세요? Ji가 나올 때를 잘 지켜보세요.”

그때 에이미가 선수용 터널을 가리켰다.

경기 전에 몸을 푸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끼나 면 티를 걸친 선수들이 편안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로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지우를 잘 지켜보라고 했었다.

춤을 추고 나오거나 가마를 타고 나올 리도 없는데, 뭘 보라는 거였을까?

“Ji가 나올 거예요.”

에이미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통로에서 정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이예에에에-!”

장진모의 혼을 쑥 끄집어내는 것처럼 커다란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를 날려 버릴 것처럼 터져 나왔다.

“역시 오늘은 관중들이 많이 자제하네요.”

뭐가 어쩌고 어째?

장진모는 표정을 수습하고 에이미를 보았다.

그동안의 기자 생활을 걸고 에이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데 오징어 한 마리 건다. 그러니까 바로 직전에 정지우를 향해 관중들이 지른 함성은 분명 평소보다 조금 자제한 것이 맞는다는 거였다.

경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오늘은 교체 명단에 올라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엄청난 함성을 들어서인지 정지우를 바라보는 순간, 장진모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이런 함성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그런 경기를 했었다는 거냐? 동양인이란 핸디캡을 안고? 혼자서 그렇게 외로웠다면서?’

그의 시선 속에서 정지우는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골대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의 함성을 꼭 기억했다가 FA컵 결승전에서 Ji가 등장할 때 나오는 함성과 비교해 보세요. 왜 관중들이 자제한다고 했는지 아실 거예요.”

장진모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섰다. 그리고 기예르모와 둘이서 골대로 움직였다.

“후우!”

기예르모의 유니온 시티 데뷔전이었다.

당연하게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는데, 그렇더라도 놈은 정도가 심해 보였다.

“편안하게 해.”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어서, 정지우는 농담처럼 말을 건네고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대개 모든 선수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저렇게 긴장하고, 그 긴장은 거짓말처럼 경기 시작과 함께 풀린다.

잠시 근육을 풀어 준 정지우는 공을 집어 들었다.

“공 던져 줘?”

“그러죠.”

답을 하고 난 뒤에도 기예르모는 자꾸만 마른침을 삼켜 댔다.

정지우는 놈을 유심히 살피며 천천히 공을 던져 주었다. 그럭저럭 서너 번 공을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기예르모.”

“예.”

정지우는 공을 잡아 허리 옆에 들고 놈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는 분명히 정지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프로 생활을 하는 놈이 긴장 때문에 몸이 그렇게까지 굳어질 리는 없고.”

기예르모는 대답 대신 흔들리는 눈빛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홈 관중들과 상대 선수들이 모두 보는 앞이다.

정지우는 멀리 공을 던진 후, 장난처럼 다가가서 기예르모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걷자.”

기예르모가 쭈뼛대며 정지우의 걸음에 보조를 맞췄다.

“입을 벌려서 이를 보여 줘. 멀리서 보면 웃는 것처럼 보이게.”

놈이 이를 꽉 깨문 채로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이런 모습이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정말 커다랗게 웃는 것처럼 보인다.

툭!

손가락으로 기예르모의 눈을 가리킨 정지우가 웃으며 놈의 볼을 툭 쳤다. 선발을 빼앗긴 정지우가 ‘너 요놈! 감히 그런 깜찍한 짓을 해?’ 하며 장난치는 모습이었다.

정지우의 웃음을 보아서였을까? 아니면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는 게 웃겨서 그런 걸까?

“경기에 나서려니까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기예르모가 커다랗게 토해 내는 숨에 담아 내듯이 말을 꺼냈다.

“Ji!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너희 둘 의심스럽다!”

옆을 달려가며 레믹이 짓궂게 던진 농담이었다.

“경기에 나서면 괜찮을 거예요.”

말과는 달리 입술이 파랗게 질린 놈의 표정은 절대 괜찮지 않을 거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이 정신 빠진 듯한 스페인 놈을 믿어도 되는 건가?

경기를 반 시간가량 앞둔 시점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골키퍼를 모른 척해야 한다고?

“Ji, 부탁입니다. 코치나 스태프, 선수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요.”

정지우는 놈의 어깨에 올렸던 팔을 내리며 라커룸으로 방향을 틀었다. 역시나 웃는 표정을 하고 말이다.

“당신 때문에 이 팀에 왔어요. 나도 당신처럼 골을 막아 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니 오늘 이 경기에 나가게 해 줘요.”

통로에 가까이 가자 ‘Ji! 잘 가르쳐 주라고!’ 하는 엄청난 고함이 들렸다.

언제고 저 목소리의 주인공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아직 필드 플레이어들이 들어오기는 이른 시간이었다.

통로로 들어선 정지우와 기예르모는 서둘러 라커룸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라커룸은 텅 비어 있었다.

“후우.”

정지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없다. 확실히 하자. 내가 볼 때 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 너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관중들이 알게 된다면 코치는 물론이고 동료들, 구단 전체가 곤란해질 수도 있어.”

다 큰 남자가, 그것도 골키퍼를 할 정도로 신장이 커다랗고 조각상같이 섬세하게 생긴 스페인 남자가 바로 맞은편에서 바싹 얼어붙은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기 놓쳐도 되는 거잖습니까? 그러니 내게 기회를 줘요.”

“놓쳐도 되는 경기? 밖에서 응원해 주는 관중들의 함성이 너에겐 그렇게 느껴지는 거냐? 힘겨운 노동을 대가로 표를 구입해 준 저 관중들 앞에서 그따위 생각을 가지고 골대를 지키겠다고?”

“그렇다면 나 같은 신인은 언제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까? 기회가 주어져야 실력을 쌓을 거 아닙니까?”

“그러게,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솔직하게 말하고 준비를 제대로 했어야지! 그래서 오늘처럼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았어야지! 경기 시작한 이후에 아까처럼 몸이 굳어 버리면? 그때는 돌이킬 방법도 없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당신이 말하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넘어갈지도 몰라! 난 골키퍼가 내 삶의 전부였어요! 그러니 한 번만 넘어가 줘요.”

정지우는 착잡한 심정으로 기예르모를 보았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할 경우 휘슬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코치와 스태프들이 눈치를 챌 거고, 공 서너 번 움직이고 나면 관중들도 이상하다고 여길 거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미안합니다, Ji.”

기예르모가 시선을 떨군 채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FA컵 결승과 부상 때문에라도 오늘 당신이 나서는 건 무리잖아요. 그러니 내게도 저 관중들의 함성을 지킬 기회를 주세요. 오늘 실패한다면 다시는 손 내밀지 않을게요.”

답답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느 정도냐?”

고개를 떨구고 있던 기예르모가 화들짝 시선을 들었다.

“어느 정도냐고? 아예 못 움직여?”

“아뇨.”

놈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숨이 좀 막히는 느낌인 거야? 몸이 굳는 건?”

“전에 한 경기에서 세 번 가랑이 사이로 골을 먹은 뒤로 계속 그래요. 공을 정면에서 받으려고 하면 몸이 굳는 느낌이요. 그 뒤로 경기 전에도 긴장하기는 했는데, 오늘은 좀 심한 느낌이에요.”

미친놈!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말해 줬다면 좀 더 수월하게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면으로 오는 공만 아니면 그럭저럭 막아 낸다는 거냐?”

“예.”

워낙 뻔뻔하게 답을 해서 정지우는 그만 웃음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전에 있던 팀에서 이런 걸 몰랐어?”

“말 안 했어요.”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연속으로 나왔다.

희망을 안고 정지우를 바라보는 기예르모의 표정을 보자 더 그랬다.

“연습 경기에서는 이런 느낌이 없고?”

“예.”

정지우가 잠시 고민할 때였다.

달칵.

라커룸의 문이 열리며 동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너희 무슨 일이야? 갑자기 애정이 느껴지고 그래?”

주장 데이빗이 짓궂은 표정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무둔바가 들어오며 라커룸의 문이 닫혔다.

이제 30분쯤 뒤면 경기가 시작되는 거다.

“잠깐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라커룸을 떠돌던 소란이 한순간에 구석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이 친구가 컨디션이 별로인가 봐. 그래서 정면을 좀 더 집중적으로 막아 주었으면 한대. 어때, 데이빗?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데이빗과 동료들이 고개를 빼다시피 하고 정지우를 보았다.

경기를 코앞에 두고 ‘너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냐?’ 하는 표정이었다.

“데뷔전이잖아. 정면만 좀 도와줘 봐.”

그래도 챔피언십에서 승격을 움켜쥘 정도의 실력과 경력이 있는 선수들이었다. 묵직한 침묵 속에서 동료들이 정지우와 기예르모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번갈아 보았다.

그때였다.

“이봐! 나보다 몸이 더 굼뜨지는 않을 것 아냐?”

오늘 선발로 나서는 무둔바가 하얗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굵직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Ji가 방향과 위치를 알려 주지 않았다면 나도 지난 시합에 그대로 묻혔을 거다. 몸이 굼뜨거든. 내가 앞을 막고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한다.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말고 기운을 내라고.”

데이빗이 마지막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정말 돕겠다는 거야?’

‘동료잖아.’

‘골키퍼다. 네 라이벌인데?’

‘지금은 유니온 시티 동료인 게 더 중요해. 결승전을 위해서라도.’

데이빗의 눈가에서 피어난 웃음이 곧바로 입술로 번져 갔다.

“자! 그럼 우리의 동료를 위해 Ji가 생각하는 전술을 들어 볼까? 프리미어리그로 갔을 때 정면을 막는 전술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겠는데?”

주장은 주장인 거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의심의 눈초리들이 흥미를 느낀 것들로 바뀌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경기를 위해 양 팀 선수들이 통로를 빠져나오자 응원 구호가 좀 더 커졌다.

정지우를 비롯한 서브 선수들은 벤치로 움직였다.

자리에 앉기 전부터 정지우는 줄곧 기예르모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먼저 골포스트를 확인해.’

기예르모는 라커룸에서 정지우가 시켰던 대로 포스트에서 포스트를 걸었다. 그러고는 긴장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크로스바! 천천히!’

정지우가 검지로 위쪽을 가리키자 놈이 그제야 생각난 것처럼 서둘러 크로스바를 향해 몸을 띄웠다.

“우와아-!”

정지우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 기예르모의 행동에 관중들이 함성으로 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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