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느닷없는 무슨 협조? (3)
라커룸을 나섰을 때였다.
정장 차림의 미디어 담당관이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서 있었다.
“Ji, 한국에서 온 기자가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Ji가 동의한다면 진행할 예정이야.”
“생각 없는데.”
정지우는 병원에 갈 생각으로 주차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일방적인 방문인 건 알아. 그렇지만 한 번쯤 다시 생각해 줄 수 없을까?”
정지우의 옆을 함께 걸으면서 미디어 담당관은 무척이나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좀 더 단호하게 뜻을 전할 필요가 있어서 정지우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저기…….”
“에이미. 내 이름이야. 에이미 앤더슨. 편하게 에이미라고 불러.”
“에이미, 내일 정규 리그, 사흘 뒤가 FA컵 결승이야. 게다가 지금 가는 병원 결과에 따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런 나를 붙잡고 인터뷰를 하라는 거야?”
에이미가 입술을 안쪽으로 물며 시선을 떨궜다.
“개인적으로 지난번에 팬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점은 고마워.”
“그 대가로 요구했던 건 아냐. 미안해, Ji. 팀의 미디어 담당자로서 선수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했어. 그 점은 정식으로 사과할게.”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들었다.
그런데 미디어 담당관이라는 에이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매달리는 거지?
박용근을 껌처럼 씹어 댈 거고, 정지우를 흔들어 댈 인터뷰가 될 거다. 미디어 담당관이라는 사람이 평소에 정지우가 기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모르다니, 그것도 중요한 경기를 앞둔 시점에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Ji.”
“인터뷰를 진행하지 못한 점은 미안해. 이만 가 볼게.”
통로의 끝에서 이쪽을 향해 바튼이 들어섰다. 기다리다가 시간이 오래 걸려서 움직인 모양이었다.
정지우는 에이미를 남겨 두고 병원으로 움직였다.
***
에이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미디어 룸으로 들어섰다.
벽으로 컴퓨터가 올려진 책상,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한쪽으로 마실 것 종류가 준비된 탁자가 있었다.
장진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미를 보았다.
“미안합니다. 정지우 선수가 오늘 불가피한 일정이 있고, 내일과 사흘 뒤에 연속해서 중요한 경기가 있는 탓에 인터뷰는 어렵습니다.”
에이미의 난처해하는 표정을 장진모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받았다.
“일방적인 방문이었습니다. 경기를 앞둔 정지우 선수의 심정을 취재하고 싶었는데, 사실 엄청난 욕심이었어요. 나 때문에 곤란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장진모는 능숙한 영어로 에이미를 상대했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본사에서 협조 공문이 도착할 겁니다. 일정이 잡히면 연락 주시고, 번거로운 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에이미가 시선으로 내용을 물었다.
“내일 있을 리그 경기와 사흘 뒤에 있는 FA컵 결승전 취재를 하고 싶은데, 혹시 출입증을 협조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장 기자님. 지금 여권이 있으신가요?”
에이미는 장진모가 건네주는 여권을 확인한 후에 미디어 룸의 구내전화를 들었다.
“구단 경기 취재 출입증을 만들어야 하는데, 여권은 내가 가지고 있어. 지금. 기다릴게.”
간단하게 통화를 마친 에이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직원이 오면 바로 준비해 드릴 거예요.”
장진모가 웃음으로 답을 하고 멋쩍게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전에 장 기자님이 인터넷에 기재했던 소속 신문사 사주 아들에 관한 기사를 봤어요. 사실 그때 제가 다니던 신문사에서 그 기사를 가지고 토론한 일도 있었어요. 그래서 장 기자님을 꼭 한 번 뵙고 싶었었어요.”
“그랬습니까? 꽤 오래전 기사인데요? 사실 그 기사를 무단으로 올리는 바람에 지금 신문사에 있는 거긴 하지요.”
장진모가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답을 한 뒤였다.
“정권의 실세와 주고받은 대화 녹취, 앞뒤에 일어난 일들과의 연관 관계. 정권과 언론의 밀약을 완벽하게 밝힌 기사라,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기사를 교본처럼 권하고 있어요.”
“그랬나요? 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에이미가 이야기를 이어서 장진모는 맞장구를 하듯 답을 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직원이 들어와 여권을 받아 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당연한 일입니다.”
장진모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점잖은 모습이었다.
***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병원에 도착해서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바튼의 전화 덕분에 담당 의사가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Ji, 결승전 출전에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경기 중에 왼쪽 햄스트링에 이상이 느껴질 수도 있어. 다리는 원래 다친 반대편 위쪽 관절이나 근육에 하중이 집중되거든.”
정지우의 다리를 살핀 의사가 차트에 무언가를 적고 나서 말을 건넸다.
“그럴 때 무리하면 곤란해. 왼쪽 햄스트링을 다치면 반대로 이번엔 오른쪽 정강이와 허리에 하중이 가중되거든. 많은 선수들이 그렇게 몸이 망가지는 경우가 있어. 그러니 결승이라고 절대 무리하지 말고, 이상할 땐 반드시 교체 사인을 해.”
“오케이. 알았어요.”
“경기장에 갈 수는 없지만, 응원할게. 우리 병원 비번들은 모두 가는 모양이던데?”
진료를 마친 의사가 손을 세워 정지우에게 내밀었다.
꽈악!
웃으며 건네는 응원을 기분 좋게 받았다.
진료실을 나온 정지우는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릴리의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솔직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연락이 있었을 테니, 릴리는 분명 병실에 있을 거다.
어느 정도의 상태일까?
때앵!
정지우가 긴장된 얼굴을 해서인지 바튼도 비슷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병실로 향했을 때 릴리의 병실 앞에 메기가 보이지 않았다.
안에 있나? 아니면 또 무균실로 향했을까?
그 짧은 복도를 걷는 것이 슈팅이 날아오기 직전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정지우는 굳은 얼굴로 릴리의 병실로 몸을 돌렸다.
창으로 병실 안쪽이 보였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서 메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릴리의 모습이 바로 들어왔다.
똑똑!
보여 주고 싶다. 저렇게 양팔을 높게 들고 정지우를 반기는 릴리의 모습을.
메기의 손짓을 본 정지우가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 예쁜 숙녀님!”
“Ji! Ji!”
늘 애어른같이 굴던 릴리가 어쩐 일인지 전보다 훨씬 과장된 동작으로 정지우를 반겨 주었다.
정지우는 아직 날지 못하는 작은 새를 보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릴리를 안았다.
“컨디션은 어때?”
“최고야.”
이런 엉뚱한 대답이 또 있을까?
확실히 여윈 얼굴이었고, 천으로 된 모자 아래로 내려온 머리칼이 거의 없었다.
“Ji, 결승전에 가고 싶어.”
“뭐?”
“나, FA컵 결승전을 직접 보고 싶다고.”
대답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정지우는 고개를 돌려 메기를 보았다.
릴리의 눈치를 살피며 메기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무래도 어렵겠는데? TV 보면서 응원하면 어떨까? 대신 내가 릴리를 위한 제스처를 보일게. 그건 어때?”
“나를 위한 제스처?”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가 메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멋진 제안이네. 그날 병원에서 다 함께 TV 보기로 했잖아. 그때 Ji가 릴리에게 약속한 동작을 펼쳐 보이면? 아! 정말 환상적일 것 같은데?”
“어떤 동작을 할 거야?”
정지우를 찾는 릴리의 초롱초롱한 눈에 분명 힘이 부족했다. 어머니의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어떤 제스처를 취하는 게 멋질까 생각하느라고 그랬어.”
가슴 한쪽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야 할 때였다.
“엄마, 생각나는 거 없어요?”
메기는 답이 없었다.
기력이 모자란 저 어린 딸의 질문에 ‘글쎄?’라는 말을 하기에도 감정이 복받치는 느낌이었다.
“릴리, 원래 내가 하늘을 보면서 검지를 치켜들잖아.”
릴리가 커다란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양손에 입을 맞추고 검지를 하늘로 들게. 그게 내가 릴리에게 하는 키스인 거야.”
“Ji가 내게 하는 키스?”
정지우가 씨익 웃자 릴리는 설레는 얼굴로 메기를 보았다.
“멋져……. 공주님에게는 키스가 어울리잖니?”
“알았어, Ji. 그럼 나 닥터 데이지와 클레이, 그리고 병원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잊으면 안 돼.”
“약속합니다!”
정지우는 오른손을 심장에 얹은 다음, 분명하게 답을 했다.
***
유정호가 2층에 있어서 식탁에는 박용근과 전은주만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해도 정지우까지는 알아볼 정도인 거다. 그러니 전은주가 박용근의 고민을 모를 리는 없었다.
“아직 결정이 안 서?”
박용근의 앞에 녹차를 놓아 준 전은주가 탁자를 돌아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 혹시 나 때문에 망설이는 거야?”
박용근은 점잖게 웃을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대로 결정했으면 좋겠어. 내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그러냐?”
“왜? 내가 영국 생활 못할 것 같아서?”
녹차를 한 모금 마신 박용근이 전은주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멀리 볼 것 없이 당장 한 걸음만 나가도 말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다. 당신 꽃집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그 뒤로 얼마나 보람 느꼈는지 잊었어?”
“일단 해 보다가 정 안 되면 나는 한국으로 가면 되지.”
박용근이 씁쓸하게 웃었다.
“여보세요? 박용근 씨. 당신은 축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멋지고 빛난다는 거 아세요?”
“난 원래 피부색이 검어서 빛난 적이 없어.”
두 사람이 비슷한 얼굴로 웃었다.
“당신, 감독 맡고 싶은 거지?”
박용근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 한다고 해. 그래서 나한테 보여 주라. 내 남편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나 그런 남편 보고 싶어.”
“정말 자신 있냐?”
“감독은 당신이 하는 거야. 난 감독 아내고.”
“그 아내 역할이 끔찍할 것 같으니까 그렇지.”
전은주가 탁자에 엎드리는 것처럼 팔을 뻗어서 건너편에 올려진 박용근의 손을 감쌌다.
“당신 축구 선수 박용근이었잖아. 난 그런 당신에게 푹 빠졌던 거고. 당신 감독할 때, 경기 때마다 내가 얼마나 설렜는지 모르지? 나 또 그런 행복을 느끼고 싶어.”
“정말이지?”
전은주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위층에 있던 유정호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전은주가 재빨리 몸을 세웠고, 박용근은 녹차를 마셨다.
정지우가 돌아와서 다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바튼까지.
이어진 순서는 정지우의 보약, 그리고 소파에 주르륵 앉아서 홍삼 봉지를 입에 무는 것이었다.
봉지를 치우고 좀 더 편안한 시간이 되었다.
전은주를 부른 박용근이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우야.”
“예, 감독님.”
“유니온 시티 리저브 팀 감독 말이다.”
이미 결심을 세운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본 채 박용근이 말을 이었다.
“너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숨이 턱 막힌 표정으로 유정호가 돌아보았을 때, 정지우는 박용근만큼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독님, 제가 말씀드리는 게 언짢으실까 봐 마음만 졸이고 있었는데, 전 정말 감독님이 함께 계셨으면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내가 너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유정호가 ‘멋진 결심이십니다.’ 하는 말을 건네는 동안, 정지우가 바튼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바튼이 유정호의 반 정도 기쁜 표정을 지으며 주방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런 음식을 계속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박용근은 느긋하게 전은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맙다. 힘들겠지만 지켜봐 주라.”
“난 정말 괜찮아. 당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잖아.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꼭 보여 줘.”
전은주는 박용근의 결정에도 울음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말을 마치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음 날은 밀턴 FC와의 45라운드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을 먹은 정지우는 바튼과 먼저 일어섰다.
“감독님, 먼저 출발할게요.”
“그래. 이따 보자.”
어차피 서브로 나서는 경기이고, 박용근과 전은주가 관람을 올 거여서 따로 나눌 말도 없었다.
정지우는 편안하게 인사를 마치고 바튼과 함께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