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느닷없는 무슨 협조? (2)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답해 드리지요.”
“선수를 추천하라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혹시나 지우를 확실히 붙잡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의도가 있지는 않은가 해서입니다.”
유정호에게서 말을 전해 들으면서도 마틴은 중간중간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보기 좋은 웃음을 달았다.
“마스터가 염려하는 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더는 시간을 끌 것 없이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유정호가 눈빛을 빛내며 지켜보는 앞에서 마틴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구단주와는 충분히 의논을 마쳤고, 이미 승인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마스터에게 우리 리저브 팀 감독직을 제안합니다.”
통역을 해야 할 유정호가 고개를 불쑥 내밀어서 방 안에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코치, 미안합니다. 내용이 좀 놀라워서……. 그러니까 코치 말씀은…….”
“나는 마스터가 우리 리저브 팀을 지도해 주기를 정중하게 청하는 걸세.”
박용근이 궁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서 유정호는 바로 내용을 설명했다.
“이 말도 마저 전해 주게. 프리미어리그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싶어 한다고. 그래서 우리의 축구에 마스터의 새로운 시야를 덧붙이고 싶은 거라고.”
유정호가 빠르게 말을 전하는 사이, 마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마스터의 지도를 받은 선수가 합류하기를 희망하네. 그들이 강함을 추구하는 우리 유니온 시티의 축구에 마스터의 가르침을 전하는 전도사가 되어 주길 바라는 걸세.”
마틴의 말을 전하는 도중에 유정호의 눈과 볼이 벌겋게 올라와 있었다.
워낙 뜻밖의 제안이기도 했고,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한국 축구계가 벌컥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기 때문이었다.
김문호 축구 교실의 감독에서도 밀려난 박용근이 축구의 본가 영국에서, 그것도 세계 3대 리그 중 하나라는 프리미어리그 소속팀의 2군 감독이 된다?
유정호는 자꾸만 가슴이 쿵쾅거렸다.
“취업비자는 구단에서 해결하겠고, 연봉은 협상을 통해 결정짓겠지만, 기본 40만 파운드(한화 7억 원) 수준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말은 전했지만,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닌 거다.
그래서 유정호는 안 하려고 하면서도 자꾸만 눈짓을 하게 됐다.
답을 기다리는 마틴,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박용근, 중간에서 애가 타는 유정호.
그래서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사무실 분위기는 한마디로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네 명 정도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스쿼드를 두텁게 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부정적인 답이 나올까를 염려한 것처럼 마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도전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영국 축구에 마스터의 창의성을 담는 일입니다. 그리고 Ji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정지우의 이름이 나와서였을까? 그제야 박용근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두 가지가 걸립니다. 하나는 이미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인데, 지우가 다른 곳으로 이적해야 할 때 내가 족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마틴이 아직 말하지 않은 또 한 가지 이유를 달라는 듯 눈가를 좁혔다.
“안사람이 영국 생활을 선택할지에 대한 점도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이해합니다. 두 가지 모두. 마스터의 염려들에 대해 깊이 공감합니다.”
마틴은 곧바로 박용근의 의견에 공감한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한 가지는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유니온 시티의 리저브 팀 코치이지만, 마스터가 원한다면 나의 스태프로 계약하면 됩니다.”
그렇지, 하는 얼굴로 유정호가 말을 전했다.
“그렇게 된다면 Ji가 이곳에 남더라도 내가 옮기게 될 경우, 마스터는 나와 함께 움직일 겁니다.”
마틴이 웃으며 말을 끝냈고, 말을 전하는 동안 유정호가 흥분한 얼굴에 미소를 달았으며, 마지막에 알아들은 박용근이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안사람과 의논하고 답을 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가족은 내게도 그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에 있으니까요. 다만, 나는 나의 진실한 바람이 부인께도 그대로 전달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간 뒤에 마틴과 박용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천해 줄 선수와 감독직 제안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인사를 전하던 마틴이 몸을 돌려 책상 위에 있던 서양식 봉투를 집었다.
“현금을 드리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구단을 찾아 주고, FA컵 준결승과 결승에 도움을 준 점에 대해 구단 회장인 쥬피터가 전하는 선물입니다.”
박용근이 손을 내밀지 않자 마틴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이 증서를 제시하면 5천 파운드(한화 850만 원 상당)에 해당하는 축구 용품을 지원받게 됩니다. 물론 비용은 유니온 시티가 지불하고, 기증으로 처리할 겁니다.”
그제야 박용근이 편안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그는 봉투를 받지 않고 마틴의 손을 먼저 잡았다.
“이 선물은 진심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회장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해 주십시오.”
유정호가 눈치를 살피는 앞에서 박용근과 마틴이 비슷하게 웃고 있었다.
운동을 마친 정지우는 박용근, 유정호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물론 바튼이 운전하는 밴을 이용했다.
나불나불.
흥분한 유정호가 아까 있었던 대화를 과장된 표정으로 쏟아 냈다. 듣고 있는 박용근은 여전히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 같은 표정이었고, 정지우는 그저 미소만 달고 있었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보였어? 사실 정말 기뻐, 형.”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정지우가 조심스럽게 박용근을 보았다.
“감독님께서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으시니까 함부로 떠들기 뭐해서 그런 거야.”
그런가?
“감독님께서 지금 기뻐하시는 건데 형은 모르겠지.”
유정호는 자연스럽게 박용근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검게 탄 얼굴, 쭉 찢어진 눈, 고집스럽게 생긴 코와 입술. 도대체 저렇게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딱딱한 얼굴 어딜 봐야 기뻐하는 기색이란 걸 짐작이라도 하는 거지?
정지우를 힐끔 본 박용근이 ‘네가 내 표정을 안다는 거냐?’ 하며 농담을 던졌다.
“뉴캐슬하고 경기 마치고 울컥하셨었잖아요? 제가 감독님 보면서 박수 쳤을 때요.”
박용근이 답을 피하는 얼굴로 미소 지었다.
뭐야, 진짜 그런 거야?
유정호의 표정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전에 전국대회 끝나고 감독님께 달려갔을 때 확실히 알게 됐었어. 감독님이 굳은 표정이셨거든. 그런데 눈가가 젖어 계셨었어.”
“그때는 이 녀석아, 네가 달려드는 바람에 먼지가 눈에 들어가서 그런 거고.”
박용근이 당시를 회상하는 것처럼 웃으며 대꾸했다.
꽉 들어맞아서 유정호가 파고들 틈이 없을 만큼 정지우와 박용근의 간격은 완벽해 보였다.
‘하긴, 이러니 6년 만에 봐 놓고도 바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거겠지?’
언제고 이 두 사람과 함께 비슷한 신뢰를……. 유정호는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감독님, 준석이 말입니다, 신준석이. 그 녀석 추천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박용근이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상황을 좀 더 보고 결정하지. 요즘 준석이 컨디션으로는 추천해도 어려울 것 같고.”
“예에?”
“최근 두 경기 연속 교체 출전했는데 시간도 그렇고, 아무래도 경기에 집중 못하는 거 같던데.”
‘그걸 네가 몰랐단 말이냐?’ 하는 박용근의 눈빛이 ‘어떻게 알았지?’ 하는 유정호의 얼굴을 추궁하듯 파고들었다.
“그거야… 아무래도 한국에 다녀가는 바람에…….”
“아까 들었던 대로 내가 추천하면 분명 준석이를 살펴볼 텐데, 지금 상태로 유니온 시티의 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얻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래.”
“그건 그렇지요.”
유정호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시선을 돌린 곳에서 정지우는 또 아까처럼 미소만 달고 있었다.
또 뭐냐?
그러나 유정호는 이번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공연히 차 안에서 입을 여느니,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신준석을 추천하자고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윤희 씨.’
유정호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창밖을 보았을 때였다.
“어? 다 왔네.”
정지우의 새로운 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바튼이 구단으로 돌아간 뒤에 박용근은 마틴이 했던 제안을 전은주에게 들려주었다. 시간을 끌었다가 유정호가 나불대게 하느니, 차라리 먼저 말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였다.
전은주는 덤덤하게 전해 주는 박용근의 말을 들었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이 화환을 옮겨 싣는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축구의 종주국인 영국, 그것도 가장 뛰어난 리그로 승격한 팀의 제안을 받고 돌아왔다.
박용근의 찌푸린 눈 속에 감춰진 기쁨을 보아서,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얼굴 아래에 숨겨진 흥분을 본 것 같아서 전은주는 길게 편 양손으로 자꾸만 눈가를 닦아 냈다.
기뻤다. 그리고 고마웠다.
남편을 알아준 사람들에게 납작 엎드려 절이라도 할 만큼.
축구 교실에서 쫓겨나던 날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려 애쓰던 남편, 꽃집에서 화환을 나를 때마다 배달 기사와 되지도 않는 농담을 주고받던 남편이었다.
김문호가 찾아온 날이면 늦은 시간까지 뒤척이던 사람이고, 전은주 몰래 달리고 와서 축축하게 젖은 옷으로 저녁까지 버티던 사람이었다.
이상하게 박용근의 그런 모습들이 줄줄이 떠올라 전은주는 감정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어쩌지? 유정호와 정지우가 보는 앞인데?
박용근을 부끄럽게 만드는 모습이면 안 되는데?
전은주가 길게 편 손안에 얼굴을 담고 마음을 추스르려 애쓸 때였다. 정지우가 전은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전은주는 두 번쯤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여보, 난 당신이… 원하는 걸 선택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박용근을 향해 말을 마치고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힘없이 밀려난 남편이 이제야 축구를 찾은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다.
솔직히 통쾌하기도 했다.
이런 남편을 그 모자란 인간들이 모욕했던 거다.
묵묵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바보나 멍청이여서, 자격이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던 거였다.
‘이제 알겠어? 이 나쁜 인간들아!’
전은주는 사이다를 제대로 들이마신 느낌이었다.
***
리그 경기와 FA컵 경기가 사흘 간격으로 있었다.
유니온 시티의 마지막 두 경기는 모두 강등권 팀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행인 일처럼 유니온 시티는 모든 힘을 FA컵 결승에 집중하고 있었다.
박용근은 하루쯤 더 고민하고 답을 하기로 했다.
그거야 재촉할 일이 아니어서, 정지우는 다음 날 바튼과 함께 구단으로 움직였다.
오전 훈련은 평소와 다름없었는데 그라운드를 감도는 옅은 긴장감만큼은 감추기 어려웠다.
FA컵에 우승하면 다음 시즌 유로파 리그 진출권을 획득한다. 물론 유니온 시티가 유로파 리그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소가 부지런히 뒷걸음질을 연습해서 쥐를 잡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거기에 유로파 리그는 챔피언스 리그에 비해 중계권료나 기타 수익이 비할 바 없이 적다.
그렇더라도 지금 유니온 시티에게 그만한 영예도 없었다. 잘하면 광고 수익에서 대박이 날 수도 있는 거다.
정지우는 다음 날 있을 챔피언십 경기에 선발 예고된 기예르모와 함께 훈련했다.
상황이 조금 우습긴 했다.
버리는 아스널과의 FA컵 32강전에 나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틀 뒤로 다가온 리버풀과의 결승전을 위해 리그 경기에 기예르모가 선발로 나선다는 것이 말이다.
투욱! 투욱! 투욱! 투욱!
정지우는 골키퍼 코치와 함께 기예르모에게 공을 던져 주었다. 훈련을 마치고 오후에 병원에 들러 마지막 점검을 받을 때까지 점프를 삼가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기예르모는 체격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점프와 순발력이 부족해 보였는데, 그 점은 정지우가 아니라 골키퍼 코치가 방법을 찾아 지시할 일이어서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오전 훈련이 끝났다.
점심을 먹은 정지우는 다시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 2층의 트레이닝 룸으로 움직였다.
순발력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힘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1시간가량 근력 운동을 마친 정지우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병원에 들러 오른쪽 정강이를 검사하고 릴리를 만날 생각이었다.
정지우가 사물함의 문을 닫았을 때였다.
스크립터가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가 정지우를 향해 곧장 다가왔다.
“Ji, 미디어 담당관이 찾아. 한국에서 기자가 취재 협조를 요청했다던데?”
별! 느닷없는 무슨 협조?
정지우는 피식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