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느닷없는 무슨 협조? (1)
링거줄을 잡고 주삿바늘을 꽂는 데이지를 보며 정지우는 이를 악물었다. 자그마한 몸집의 릴리가 그 줄의 끝에서 삶을 움켜쥔 채 버티고 있었다.
한 번이면 되는 거 아닌가?
어머니를 그렇게 데려갔다면, 저 작은 아이만이라도 좀 더 지켜볼 수 있게 최소한의 은총쯤 내려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주사기를 뽑으며 창으로 시선을 들었던 데이지가 메기의 옆에 서 있는 정지우를 보았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보다 살얼음처럼 깔린 눈물이 더 강렬하게 정지우의 시선에 들어왔다.
최선을 다해도 이겨 낼 수 없는 한계, 데이지의 눈에 담긴 눈물이 그런 의미로 느껴졌다.
‘무서워요, Ji. 내가 배운 것으론 이 이상 할 것이 없어요.’
‘릴리는 잘 이겨 낼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당신이 병으로부터 저 아이를 지켜 줘요. 내가 골대를 지키는 것처럼요.’
엉뚱한 짓이다. 바보같이 보일 행동이었다.
그러나 정지우는 양팔을 커다랗게 펼쳐 보였다.
“Ji?”
메기는 이제야 정지우가 반걸음쯤 뒤에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하늘을 날아서, 이렇게 막아 내겠다고 약속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포기하지 말아요. 릴리는 일어날 거예요. 당신이 지켜 주길 바라며, 애타게 버티고 있을 거예요.”
메기에게 한 말인지, 데이지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릴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지 모를 말을 던지며, 정지우는 양팔을 커다랗게 펼친 채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부탁할게요. 내가 골대를 지키는 것처럼 당신이 릴리를 지켜 줘요.’
‘당신?’
데이지가 눈에 의지를 담을 때, 병실 안에 있던 간호사들 역시 정지우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은 눈치였다.
“Ji, 나 정말 무서워.”
“괜찮을 거예요. 릴리는 반드시 일어날 거예요.”
또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메기를 안아 준 정지우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메기가 두려워하면 릴리는 힘을 잃어요. 지금껏 잘해 왔었잖아요.”
“흐으… 흐으으…….”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릴리는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가씨예요.”
어머니의 곁을 지킬 때 누군가 이렇게 다독여 주길 바랐었다. 그 외롭고 무서웠던 병실을 돌아서 나올 때 기댈 누군가가 있었으면 싶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다음이었다.
침대에서 물러나 기계들을 살핀 데이지가 병실을 나왔다. 수술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처음 보았다.
“위기는 넘긴 것 같아요. 상태를 봐서 오후에 병실을 옮길 수도 있어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닥터 데이지.”
메기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데이지가 정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87의 정지우 얼굴 아래에 땀이 맺힌 이마가 걸렸으니, 키가 170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다리는 어때요?”
“일주일 정도 더 지켜보자고 하던데요.”
“그랬군요. 골키퍼란…….”
병실 안을 돌아본 데이지가 다시 시선을 돌려 정지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누군가를 지켜 주는 포지션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난 그저 골대를 지키는 임무라고만 알았었거든요.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의지를 간직할 수 있었어요.”
말을 마친 데이지가 지친 얼굴로 메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서 좀 쉬세요. 오늘은 아무래도 릴리를 만나기 어려울 거예요.”
그러고는 데스크 쪽을 향해 움직였다.
***
쥬피터는 흥분된 가운데 그나마 여유를 찾은 얼굴로 마틴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홍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는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미스터 박을 리저브 팀의 코치로 임명하는데 협회 규정에는 문제없었네. 남은 건 그의 의지와 요구 사항이 되겠지.”
“특별하게 욕심을 부리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확실히 승인하는 거라면 내일 안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숙소야 Ji와 함께 지내면 될 테니 여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하게 자네의 이번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박용근과 함께 일하게 된다면 정지우의 본계약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개까지 끄덕이며 의사를 밝히는 쥬피터의 얼굴에 정지우를 움켜쥐었다는 기쁨이 밀크티를 덮은 거품처럼 짙게 깔려 있었다.
“이렇게 되었다면 이제는 한국에 제안했던 축구 교실을 어떻게 할지가 남았네.”
“협회라는 곳이 요구한 서류들을 보면 그들은 협조할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만약 미스터 박이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면 이대로 덮어도 될 것 같습니다.”
쥬피터는 마틴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도 의아함을 덜어 내지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들고 운영하겠다는데, 그걸 마다하면서 엉뚱한 서류를 요구하다니. 그런 곳에서 어떻게 미스터 박이나 Ji와 같이 특출난 인재들이 생겨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
마틴은 딱히 대꾸를 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그러나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태도였다.
“여름 이적 시장에서 선수 보강은 어떻게 할 텐가? 우리 팀의 스카우터들이 몇몇 선수를 눈여겨보고 있지.”
“그보다는 FA컵 우승이 더 궁금하실 것 같은데요?”
“오, 이런! 마틴! 자네는 내 속을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구단의 회장이 되려면 이렇게 뻔뻔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저렇게 뻔뻔해서 구단의 회장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이는 쥬피터의 태도는 그의 가장 큰 장점쯤 되는 거였다.
“남은 일주일을 지켜보아서 문제가 없다면 Ji를 선발로 내세워도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더할 수 없이 반갑고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군. Ji를 찾아내고, 이렇게까지 키워 낸 자네야말로 내 생애에 가장 빛나는 축복인 게 틀림없네.”
진지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쥬피터의 능력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틴은 입가를 움직여 웃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Ji의 무실점 기록이 이어질 때마다 탐내는 구단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챔피언십 리그 우승에 욕심내지 말라는 뜻인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쥬피터가 창으로 시선을 돌리며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승을 바라는 우리 홈 관중들을 실망시키는 일이라네. 그러니 그 점을 잊지 말고, 자네는 자네의 말대로 최선을 다해 주게.”
마틴은 언젠가 이 욕심 많은 너구리의 볼을 잡아서 늘어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털어 내며 ‘알겠습니다.’ 하고 답을 했다.
***
<협회의 요구를 검토하여 답을 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진지하고 심각하게 요구 사항을 검토하겠습니다.>
조동익은 유니온 시티에서 온 답을 만족한 얼굴로 들여다보았다.
“이 정도면 유니온 시티도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겠지?”
“박 감독에게 선수들이 고개를 숙였던 이유도 그쪽 구단이 말을 바꾼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승관의 의견을 미심쩍은 눈으로 받아들였으나 조동익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인식의 변화가 필요해. 언제부터인가 유럽에서 조금만 인기가 있으면 마치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처럼 떠들어 대는 저놈의 언론도 좀 정신을 차려야 하고.”
“기자들에게 협조를 구하겠습니다.”
“공연히 기자들 차별하지 말고, 고루고루 좀 다독여. 그리고 쿠웨이트전 준비는 잘돼 가고 있는 거 맞지?”
“문 감독이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책임을 슬쩍 떠미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기의 책임이 온전히 문광국의 몫이 된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이번에 지면 남은 경기를 모두 승리하고도 골 득실을 따져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러니 한 골 차든, 두 골 차든, 반드시 이기고 올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 줘.”
“염려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현지 교민들에게 음식을 당부했고, 그 점에 대해 홍보할 수 있도록 기자들에게 미리 부탁해 놓았습니다.”
조동익은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참았다.
도대체 나가는 선수 지원금을 어디에 써먹기에 매번 그 빌어먹을 놈의 김치와 찌개를 교포들에게 부탁했다고 저러는 건지. 요즘 축구 팬들이 바보도 아니고, 구걸하듯 먹고서 힘을 얻었다는 기사는 10년 전에나 먹히던 것인데도 한승관은 마치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듯 뻔뻔한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한 위원.”
“예, 부회장님.”
“거, 오늘 자 기사 좀 봐. 문 감독 이번 예선에 축구 인생 걸었다, 라니? 이게 언제 써먹던 제목이야? 당신이 국가대표 할 때도 아니고. 좀 더 참신한 제목 좀 쓰게 만들 수 없어?”
조동익은 이를 악물고서 터져 나오는 분통을 참아 냈다. 공돈 처먹을 일에는 눈을 그렇게 빛내는 인간이, 어떻게 일 하나를 마음에 들게 해내는 게 없었다.
“그게, 기자들이 그런 제목에 클릭 수가 더 나온다고 버티는 바람에 그렇습니다. 제가 좀 더 나서 보겠습니다.”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조동익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FA컵 결승 중계는?”
“공중파는 어차피 쿠웨이트와의 예선을 방송할 예정이고, 종편들이 중계권을 협상 중인 것 같습니다.”
“바보 같은 놈들!”
“그렇습니다.”
바보 같은 얼굴로 맞장구를 치는 한승관을 보며 조동익은 이상하게 화가 치밀었다.
“그만 나가 봐.”
“아? 예.”
그래서 점심시간을 10분 남겨 두었음에도 한승관을 내보내기로 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승관이 고개를 숙여 가며 인사하고 나선 다음이었다.
“바보 같은 놈.”
조동익은 또다시 욕을 뱉어 냈다.
***
리버풀전 전술 구상, 리저브 팀 훈련 참관, 그 외에 마틴과의 장시간에 걸친 의논까지.
정지우가 병원에 다녀온 날 이후로 사흘간 박용근이 정지우보다 더 바빴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통역을 맡게 된 유정호는 덤으로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나흘째다.
가볍게 몸을 푼 정지우가 정강이에 무리가 가지 않을 근력 운동을 하는 동안, 박용근은 마틴의 사무실에 있었다.
헤드 코치 마틴, 어시스턴트 코치, 리저브 팀 코치, 스크립터, 전술 개발 매니저, 교육 매니저, 거기에 박용근과 유정호까지다.
8명이나 앉아 있어서 마틴의 사무실이 꽉 찬 느낌이었는데, 분위기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FA컵이 문제가 아니야. 준결승전의 뉴캐슬 유나이티드도 그랬고, 리버풀 역시 다음 시즌에 우리가 상대해야 할 팀들이다. 또 한 번 말하지만, 나 역시 타성에 젖어 있었어.”
마틴은 책상의 옆에 엉덩이를 걸친 자세로 마주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Ji를 봐. 그리고 무둔바도 그렇고. 새로운 누군가를 영입하고 싶어 하기 전에 리저브 팀을 살펴봐야 하고, 그 선수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일이다.”
마틴이 시선을 돌린 벽에 커다랗게 전술판이 붙어 있었다.
“지난 사흘간 한국에서 오신 손님 덕분에 우리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상대 팀을 분석할 때 좀 더 창의적인 발상을 할 수 있도록 지난 사흘을 잊지 말자.”
마틴이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앉아 있던 이들이 박용근을 향해 몸을 돌리고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책상에 걸터앉았던 마틴이 몸을 세우며 함께 그들을 따랐다.
통역을 전해 듣느라 잠시 틈이 있었다.
박용근은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를 향해 보기 좋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회의가 끝났다.
한 사람 한 사람 박용근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고는 방을 나섰는데, 다들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한마디씩을 잊지 않았다.
의자를 정리한 스크립터가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박용근의 앞에 앉은 마틴이 통역을 해야 하는 유정호를 힐끔 본 후에 입을 열었다.
“다음 시즌을 준비하려면 아무래도 수비수 두 명과 미드필더 두 명은 보강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추천해 주실 선수가 있습니까?”
유정호가 느닷없이 수정처럼 빛나는 눈빛을 하고는 박용근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고도 그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박용근을 향해 모종의 신호를 보내려 애썼다.
마틴이 그 정도를 모를 인물이 아니고, 유정호의 몸짓이 유난스럽기도 했다.
“마스터, 당신이 추천하는 선수라고 해도 우리 팀의 규정대로 컨설턴트와 두 명의 매니저가 분석해야 하고, 구단의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유정호가 말을 전하기를 기다린 후에 마틴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혹시 짐작 가는 선수가 있다면 편안하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유정호의 말을 모두 전해 들었음에도 박용근은 어쩐지 사무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