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92화 (92/262)

제8장. 멋진 플레이였어! (3)

아침 TV 뉴스의 첫 보도가 정지우에 관한 소식이었다.

『정지우 선수의 소속팀 유니온 시티가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영국 FA컵 준결승에서 승리했습니다.』

앵커의 말이 끝나는 순간, 화면은 유니온 시티와 뉴캐슬 선수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터널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

『현지 시간으로 어제 오후 3시에 유니온 시티의 홈구장 레드 블레이트에서 열린 FA컵 준결승에서 유니온 시티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자료 화면이 이어지면서 스포츠부 기자의 음성이 화면을 설명했다.

『0 대 0으로 지루하게 끝난 전반과 달리 유니온 시티는 후반 시작과 동시에 강하게 뉴캐슬을 압박했고, 마침내 후반 10분에 레믹 선수가 선제골을 넣었습니다.』

골을 넣은 레믹이 높다랗게 뛰어올라 허공을 향해 구부린 오른팔을 치켜드는 장면이 나왔다.

『레믹 선수는 벤치로 달려가서 그의 독특한 골 세레머니인 뽀빠이 동작을 펼쳐 보이고, 이어서 우리나라의 박용근 전 김문호 축구 교실 감독에게 인사를 전했습니다.』

고개 숙이는 레믹에게 박용근이 짧게 고개를 숙여 답례하고, 전은주는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후반 15분경, 정지우 선수가 몸을 풀기 시작하자 유니온 시티의 홈 관중들이 정지우 선수의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정지우의 뒤에서 열광하는 관중들의 모습도 나왔다.

『그러나 교체 사인을 내기도 전에 유니온 시티의 얀센 골키퍼가 안면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이에 정지우 선수가 곧바로 교체 투입되었습니다.』

실려 나오는 얀센과 걸어 들어가는 정지우의 뒷모습이 나온 뒤에 이어진 화면에서, 벤치와 홈 관중을 향해 양손 검지를 치켜든 정지우의 모습이 보였다.

『정지우 선수는 이 경기에서 두 번에 걸친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결정적인 슈팅을 막아 내는 등, 환상적인 선방을 펼쳐 팀의 무실점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정지우가 선방을 펼치는 장면과 그 뒤에 관중들이 열광하는 모습이 연달아 화면을 가득 메웠다.

『FA컵 32강 아스널전 이후 리그 두 경기를 포함해, 정지우 선수는 지금까지 여섯 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 내며 유니온 시티 팀 FA컵 결승 진출과 프리미어리그 승격의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지우가 양손 검지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과 동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홈 관중들 앞에서 뛰는 모습이 이어졌다.

『이로써 유니온 시티는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며, 리버풀과 웸블리에서 운명적인 대결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만약 리버풀과의 결승에서 정지우 선수가 선발로 나선다면 영국 FA컵 최초의 결승전 동양인 골키퍼로 기록되게 됩니다.』

통로로 들어서는 정지우에게 홈 관중들이 열광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유니온 시티는 이미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확정한 상태입니다. 얀센 골키퍼가 심각한 부상인 점을 감안한다면, 정지우 선수의 프리미어리그 선발 역시 확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들것에 누운 얀센이 정지우의 손을 잡았다가 가슴을 툭 치는 장면이 보였다.

『정지우 선수가 FA컵 결승전과 프리미어리그 첫 동양인 선발 기록을 세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앵커의 모습이 나왔다.

『오늘 우리나라 대표팀이 월드컵 예선 쿠웨이트전을 대비해 출국합니다.』

화면이 바뀌고 이번엔 다른 기자의 음성이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국가대표팀이 쿠웨이트와의 월드컵 예선을 위해 오늘 출국합니다.』

화면은 달려가서 슈팅을 날리는 선수들을 비춰 주고 있었다.

『우리 대표팀은 쿠웨이트전 승리를 통해 그동안의 우려를 모두 털어 내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화면이 확 바뀌면서 심각한 얼굴의 문광국이 나왔다.

『충분히 준비했고, 선수들 역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어서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간단하게 보도가 끝났다.

앵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고, 뉴스는 다른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정지우의 소식이 국가대표팀 관련 보도보다 크게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포털의 스포츠란이 아니라 메인이 정지우의 활약으로 도배되었다. 그 뒤로 이어진 기사들은 FA컵의 시작부터 웸블리에서 결승전이 열리는 전통까지를 자세하게 소개했는데, 댓글들이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헨젤과 공찼대] 응원가 나오는데 짜릿했다. 결승에서는 반드시 선발로 나서자.

[공차는 이박사] 미친 선방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골키퍼가 있는데 국가대표 골문은 다른 선수가 지킨다.

[주인공들은 전부 고자] 정지우 클라스 지리구요. 제가 오늘 댓글은 오지구요. 형님들~ 좋아요. 꾸욱 감사합니다, 형님들~

[맨날치킨] 결승전은 꼭 제대로 중계해라.

[후니] 외국 방송을 통해 중계 본 분들은 다들 광팬인 듯. 결승전은 제대로 응원하자구요. 이런 경기는 다 함께 봐야지요.

[니닉] 정지우 우리나라 선수 맞죠?

[비전메이커] 에구! 정지우 웰케 이쁜지~ 이뻐! 이뻐!

그리고 추천을 받아서 베스트에 올라온 글들은 한결같이 정지우를 응원하는 내용이었다.

***

박용근, 전은주는 결국 전화기를 꺼 버렸다.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좀처럼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아서였다.

한국은 새벽 4시를 향해 가는 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김문호야 그럴 사이라고 치자.

인터뷰와 취재에 실패한 기자들이 연달아 박용근을 찾았고, 전은주는 느닷없는 고등학교 동창까지 전화를 걸어와서 방송의 위력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TV가 무섭긴 무섭다.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중계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박용근이 지친 얼굴로 투덜거리며 정지우의 다리를 살폈다.

보라색을 띤 멍이 무릎 근처까지 퍼졌는데, 정강이에는 부기가 조금 올라온 것 말고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마틴 감독이 날 볼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감독으로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널 내보냈을 거라고.”

“제가 나가겠다고 했었어요.”

박용근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씁쓸하게 웃었다.

“여보! 냉장고에서 얼음 좀 꺼내 줘.”

“뜨거운 찜질이 낫지 않을까?”

“아니! 이런 상처는 얼음이 나아.”

유정호가 움직여 전은주와 함께 얼음을 준비했다.

“감독님, 제가 할게요.”

“가만있어 봐. 언제 또 이런 거 해 주겠냐?”

유정호가 랩으로 꽁꽁 싸매 온 얼음을 건네주었다.

박용근은 정지우의 정강이에 얼음을 댄 다음에 뒤쪽 장딴지 근육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작은 부상이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발목을 다친 일반 사람들도 그 상태로 오래 두면 오히려 반대쪽 무릎이 나가게 돼. 오른쪽 정강이를 다쳤으니 오늘 분명 왼쪽 허벅지에 무리가 갔을 거다.”

소파에 정지우를 눕힌 박용근이 다리 쪽에 앉아서 정지우의 장딴지 근육들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내가 널 서브로 내세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렇더라도 이기고 싶었다. 그건 이해하지?”

“예, 감독님.”

박용근이 지시했던 건 그저 터치라인에 나서 몸을 풀라는 것이지, 경기에 나서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정지우의 출전이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여보! 지우 저녁 먹을 수 있겠어?”

“먹어야지! 유 대표, 랩 좀 더 가져다 줘.”

유정호가 빠르게 움직여서 랩을 가져왔고, 박용근은 그걸 이용해 정지우의 정강이에 얼음을 꽁꽁 싸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은주가 바나나를 챙겨 주었고, 박용근이 상처를 돌봐 주는 사이 다시 저녁을 준비해 주었다.

혼자서 즉석밥을 물에 말아 먹거나, 잘 먹는다고 해도 스테이크용 고기를 한 장 구워 먹고 끝났을 저녁을 말이다.

경기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하는 식사였다.

맞은편에 박용근과 전은주, 옆으로 유정호와 바튼이 함께 있는 저녁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보약을 먹었고, 바보들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홍삼 봉지를 입에 물었다.

행복한 거다. 행복이란 이런 걸 거다.

자고 일어났을 때 부기가 훨씬 가라앉아 있어서 눈으로 살피기에 그다지 염려할 상황은 아니었다.

“영어 못하는 우리가 병원에 따라가 봐야 짐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집에서 기다리마.”

박용근과 전은주가 집에 남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지우는 따라나서겠다는 유정호에게도 집에 남아 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집에 누군가 찾아왔을 때 두 분이 당황하는 게 싫어서 그래. 형이 좀 옆에 있어 줘.”

“괜찮겠냐?”

“혹시라도 다른 이상이 있다면 바로 전화할게. 그렇게 되면 어차피 구단에도 알려야 하는데, 뭐.”

몇 번이나 다짐을 받은 유정호는 검사가 끝나면 반드시 연락부터 하라고 바튼을 단속한 다음에야 집에 남아 있기로 했다.

아침을 먹은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정지우가 탄 밴은 레드 블레이트를 지나, 전에 살던 아파트와 빌의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앞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이후로 소독약 냄새, 흰색, 그리고 병원 표식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부진의 늪에 점점 빠져들었다.

부상이 두려웠다.

다치면 그 끔찍한 기억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도,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어를 익히고, 상대 팀 선수들의 움직임과 습관을 외웠으며, TV로 축구 중계를 보는 것이 전부인 삶을 살았다.

‘바보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감독님과 사모님을 찾아봬. 그리고 너답게 축구를 즐겨. 엄마가 앞길 막아서 미안해.’

어쩐지 하늘에서 보고 있던 어머니가 릴리를 만나게 해 준 건 아닌가 싶었다. 병원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경기에 나설 용기를 주고 싶어서.

병원에 도착한 정지우는 먼저 담당 의사를 찾았다.

“닥터 스미스에게서 연락은 받았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정지우를 맞았고, 곧바로 오른쪽 정강이를 살폈다.

“경기 중에 통증을 느꼈던 적은 있나요?”

“중간에 한 번 뜨끔한 느낌이 들었던 게 전부예요.”

검사라고 해야 누르는 곳의 통증을 묻는 것과 그 외 부분의 근육을 살핀 게 전부였다.

“특별하게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앞으로 일주일 정도 뒤에 다시 점검해 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검사만큼이나 평범한 소견이 나왔다.

진료를 마친 정지우는 먼저 클레이의 병실을 찾았다.

“검사 결과는 뭐래?”

살이 퉁퉁하게 오른 클레이가 정지우를 보는 순간 던진 질문이었다.

“난 괜찮아. 일주일 뒤에 상황을 보기로 했어. 얼굴이 보기 좋은데?”

“그렇지 않아도 체중이 불어서 걱정이야. 다음 주부터 근력 강화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한다니까 좀 나아지겠지.”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쪽 복도로 두 방 건너에 얀센이 있어. 분위기가 안 좋아서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만나 보려고.”

10분쯤 클레이와 노닥거린 정지우는 그의 병실을 나와 얀센의 병실로 향했다. 창을 통해 들여다본 침대에서 그는 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하이.”

정지우가 들어가자 콧소리가 섞인 인사를 건넨 얀센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해하지 마. 코가 울려서 그런 거니까.”

그는 변명처럼 말을 하고는 의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멋진 경기였다.”

그러고는 정지우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건넸다.

“이번 시즌을 시작할 때였지.”

얀센은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의 형태가 그대로 담긴 깁스가 진지함을 깎아 먹는 느낌이었다.

“선수 생활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러고 돌아보니 난 인생 경기가 없더라고. 바람이 있었다. FA컵 결승? 아니면 프리미어리그? 어디에서라도 좋으니 내 아내와 두 딸이 영원히 기억할 만한 인생 경기를 해 보고 싶다고.”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정지우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아스널전의 너를 보면서 소름이 돋았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들었었지. 그런데 결승을 코앞에 두고 코가 이렇게 된 거야.”

“프리미어리그에서 보여 주면 되는 거 아냐?”

얀센은 고개를 저었다.

“코치가 우리 모두를 데려가겠다는 말은 기억해. 그러나 나에게 남은 계약은 1년이야. 재계약이 없다면 서브로 남아서 프리미어 경력을 마감하게 되겠지. 그렇더라도 FA컵 준결승에서 뛰었던 것만은 고맙게 생각한다.”

정지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시즌을 주전으로 활약했던 얀센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선 밖에 있을 땐 그저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한 걸음만 다가가면 이런저런 아쉬움과 사연을 지녔다.

사는 건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정지우의 주변에 유독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건가?

“가 볼게. 몸조리 잘해.”

손을 들어 보이는 얀센의 병실을 나온 정지우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개를 흔들었다.

적어도 릴리를 만날 때만큼은 밝은 얼굴을 하는 게 좋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지우가 릴리의 병실을 향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창가에 붙어서 울고 있는 메기가 보였다.

정지우는 빠르게 릴리의 병실 앞으로 움직였다.

수술복을 입은 채 땀이 흥건한 데이지와 간호사들, 복잡한 기계들이 릴리에게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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