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91화 (91/262)

제8장. 멋진 플레이였어! (2)

중계방송이 뚝 잘리고 난 뒤의 그라운드가 어떤 모습인지 오늘 박용근은 완벽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Go Wembley!”

“Go Wembley!”

웃옷을 벗어 버린 관중들이 제자리를 뛰면서 외치는 구호, 그런 응원을 준 관중들에게 박수로 답을 하는 선수들.

그라운드의 열기는 경기 한중간과 다를 바 없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이어서 그 유명한 유니온 시티의 응원가를 부를 때는 선수들도 동료들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블레이트가 사이좋게 지냈지!”

관중과 선수가 그냥 한 덩어리인 상황.

여기에서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할까.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가 시합에 나가면 블레이트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동료들의 한가운데에서 정지우가 뛰고 있었다.

지금 같은 순간에 오른쪽 정강이를 조심하란 이유로 정지우를 말릴 수는 없는 거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응원가를 마친 관중들이 일제히 선수들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우와- 아!”

선수들은 동료들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풀고 다시 박수로 홈 관중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했다.

응원에 답을 마친 선수들이 통로를 향해 움직였다.

“Go Wembley!”

통로 위에서 주먹을 쥔 관중이 우렁차게 고함을 질러 댔고, 이어서 ‘Ji! 오늘 자넨 환상적이었어!’라는 응원, ‘레믹! 결승에서도 골을 넣어 버려!’ 하는 외침이 연달아 들려왔다.

“Ji! Ji!”

통로 위에서 양팔로 아이의 겨드랑이를 잡은 남자가 정지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지우는 웃는 얼굴로 손을 뻗어 아이의 손바닥을 툭 쳐 주었다. 그리고 지나가면서 관중들이 내민 손 역시 빼놓지 않고 마주쳤다.

“우와- 아!”

지켜보던 응원단들이 또다시 미친 사람들처럼 함성을 질렀다. 선수가 관중들의 요구를, 응원을 보내 주는 관중의 아이를 존중해 주는 모습에 열광한 거였다.

믹스트존을 안쪽에 따로 마련했다.

관중들의 열기가 과열 조짐을 보이자, 미디어 담당관이 급하게 라커룸 옆의 통로로 장소를 옮긴 모양이었다.

이런 순간에 기자들은 대개 정말 궁금한 한두 가지 질문 외에 더는 시간을 끌지 않는다.

경기가 끝난 선수들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이 컨디션 조절에 무리가 된다는 것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만약 어떤 기자가 자꾸만 물고 늘어지면 그 기자는 다음번부터 아예 질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그것이 이곳의 불문율이기도 했다.

오늘 기자회견의 주인공은 정지우, 레믹, 그리고 스웰던, 무둔바였다.

“2주 아웃이라고 발표했는데 오늘 출전으로 무리한 건 아닌가요?”

“괜찮습니다. 코치와 팀 닥터의 염려가 컸는데 다행히 경기에 나설 정도는 되었습니다.”

한국 기자 3명이 중간에 서서 녹음기를 들이밀고 있었다.

“Ji, 웸블리에 가게 되었습니다. 결승에서도 좋은 경기를 기대합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끝났다.

이 정도면 적당한 거 맞다. 경기를 막 끝내고 나온 선수들을 붙잡고 무슨 말을 오래 하겠나. 박용근과 전은주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정지우가 몸을 돌리자 머뭇거리던 한국 기자들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박용근을 취재할 욕심인 것이 분명했다.

박용근과 전은주는 바튼의 안내를 받아 곧장 레드 블레이트를 빠져나왔다.

관중석 출구 앞에 있는 스태프 전용 통로를 이용해 주차장으로 나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일도 없었다.

밴에 올라탄 박용근과 전은주, 유정호는 뒤편에 가득 쌓인 상자들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구단에서 두 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기념품을 종류별로 다 담았고, Ji의 유니폼과 벤치 코트까지 두 벌씩 따로 준비했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바튼이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유정호가 상체를 돌려 가장 위에 있는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사모님, 이건 컵 같은데요?”

어차피 정지우를 기다려야 할 시간이었다.

상자의 위를 열어 머그잔을 꺼낸 전은주가 바보처럼 울컥한 얼굴로 잔을 엄지로 매만졌다.

“왜 그래?”

고개를 넘겨 머그잔을 본 박용근이 잔잔하게 웃었다.

검지를 높이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정지우의 모습이 아이보리색 머그잔에 멋지게 새겨져 있었다.

주차장에서 박용근과 전은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들었다. 내일 오전에 있을 회복 훈련은 컨디션을 봐서 참석하기로 했고, 그와 상관없이 무조건 병원에 들러 정강이 상태를 점검하기로도 했다.

“출구에 잠시 들렀다가 가고 싶은데.”

반트가 따로 움직이고 있어서 정지우는 미디어 담당관에게 원하는 바를 전했다.

웨이브가 굵은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파란 눈의 30대 중반 미디어 담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Ji, 오늘은 너무 과열됐어.”

여성용 검은 정장에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무척이나 사무적인 인상이었다.

“그건 알겠는데, 우리 홈 관중들이잖아. 최소한 기다리는 아이들만은 실망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 줘.”

미디어 담당관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정지우를 보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Ji. 대신 5분만 기다려 줘. 아이들만 사인받는 거로 알리고, 시간제한을 둘 테니까. 그리고 안전 요원 두 명과 함께하는 거야. 됐어?”

“좋아.”

미디어 담당관이 움직인 후에 선수들이 통로로 나왔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데이빗과 카알이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뺀질이 레믹과 늘 분이 덜 풀린 얼굴의 스웰던, 예상보다 잔인한 미소를 지닌 무둔바까지 줄줄이 정지우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고…….”

정지우가 뭐라고 할까 고민할 때, 미디어 담당관이 다가왔다.

“Ji, 시간은 30분이야. 13세 미만 아이들로 사인과 사진 요청까지. 알았지?”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혹시 밖에 기다리는 관중들을 상대할 생각인 거야?”

“응.”

“오우.”

데이빗이 놀랐다는 것처럼 정지우를 본 뒤에 시선을 돌렸다.

“내가 함께해도 되나?”

그리고 미디어 담당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데이빗, 왜들 이래? 이러면 정말 커져. 안전 요원을 더 불러야 한다고.”

“이왕 시작한 건데 확실하게 한번 하지.”

미디어 담당관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정지우를 보고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그래! 홈 관중이란 말이 이렇게 실감 나는 건 처음이네! 하지만 오늘만이야. 만약 웸블리에서 이런 일을 벌이면 그때는 통제가 불가능할 수 있어. 이것만은 약속해.”

“알았어.”

얀센이 그러더니 이번엔 미디어 담당관이 약속을 원하고 있었다.

레믹과 스웰던이 먼저 돌아갔고, 정지우와 데이빗, 카알, 무둔바가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야아- 아!”

아이들의 함성이 먼저 울렸고, 이어서 ‘우와- 아!’ 하는 어른들의 굵직한 함성이 뒤를 따랐다.

바리케이드에 매달려 있을 줄 알았던 빌이 보이지 않아서 정지우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티켓을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거다.

미디어 담당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사인지와 펜을 들고 줄줄이 다가왔다.

‘이름이 뭐니?’ 하고 질문을 던진 정지우는 다시 ‘응원해 줘서 고마워.’나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하는 말과 함께 사인지를 돌려주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늘 마찬가지였다.

사인을 받은 아이보다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더 감동한 표정을 그려 내는 건.

출구에서 기다렸던 아이가 실망할 것을 염려하는 저 부모들의 마음을 알면서 어떻게 모른 체 집에 가겠나.

그래서 정지우는 그 부모들과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고마워, Ji. 정말 고마워. 영원히 응원할게.”

“옷이 좀 작은 것 같은데요?”

타이즈를 입은 것처럼 아이 아빠는 가슴과 배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오늘 응원 덕분이지!”

아이 아빠가 뽀빠이 흉내인지, 레믹 흉내인지 모를 동작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 그에게는 주워 입은 작은 티셔츠가 훈장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약속한 30분이 지나서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미디어 담당관이 워낙 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데이빗과 카알, 무둔바가 각각 아이들을 상대해 주어서 그럭저럭 외면받은 아이들은 없었다.

정지우가 손을 흔들며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에서 높다랗게 들렸던 여자아이가 바로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 틈에 파묻혔다.

여자아이였다. 엄마가 들었기 때문에 남자들처럼 오래 들고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지우는 미디어 담당관을 바라보았다.

“저쪽에 여자아이가 있어. 엄마가 들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나 봐. 그 아이까지만 사인해 주고 들어갈게.”

미디어 담당관이 잠시 묵묵하게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Ji, 당신은 홈 팬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거구나.”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정지우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

“뒤편에 여자아이가 있어요! 엄마가 들어 올렸던 아이! 유니온 시티의 어린 관중이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미디어 담당관이 가리킨 방향으로 길이 열리는 것처럼 홈 관중들이 조금씩 비켜섰다.

두꺼운 안경을 낀 여자아이가 그보다 조금 더 두꺼운 안경을 낀 엄마의 다리 앞에 서 있었다.

정지우는 바로 그리로 걸어갔다.

미디어 담당관을 힐끔 본 데이빗과 카알, 무둔바가 뒤를 따랐다.

아이 엄마는 실망했던 딸에게 이런 기회가 생긴 것에 감격했는지 울먹이는 얼굴이었다.

정지우는 자세를 낮추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하이? 이름이 뭐야?”

“미셸이요.”

미셸은 엄마의 다리에 몸을 기대면서도 정지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응원 와 줘서 고마워.”

“나는 Ji가 골키퍼 하는 거, 정말 좋아해요.”

수줍음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을 하면서도 미셸은 데이빗과 카알, 무둔바를 힐끔거렸다.

“고마워. 여기 우리 동료 선수들 알지?”

“데이빗, 카알…….”

정지우는 아이 엄마를 향해 괜찮겠냐는 투의 시선을 던졌다. 아이 엄마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와 봐.”

정지우가 미셸을 안아서 들어 올렸다.

“인사하자. 무둔바. 무둔바, 이 숙녀분은 미셸.”

“하이, 미셸?”

“하이, 무둔바.”

굵직한 무둔바의 음성과 가느다란 미셸의 음성이 화음처럼 들렸다.

“사진 찍을까?”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가 미셸을 안고 선 좌측으로 데이빗과 카알, 우측으로 무둔바가 섰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준비했던 사인지에 다 함께 사인을 해 주었다.

아이 엄마가 감격한 얼굴로 정지우를 안았다.

“고마워, Ji. 정말 고마워. 잊지 않을게.”

약속한 인사가 끝났다.

그리고 이제는 미디어 담당관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짝짝짝짝짝짝짝.

아직 메워지지 않은 관중들 사이의 길을 걷는 동안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박수를 쳐 주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밴에 올라탄 정지우는 박용근과 전은주 맞은편에 앉았다.

“죄송해요. 너무 늦었어요.”

“선수가 팬을 존중하는 게 뭐가 죄송할 일이야. 그나저나 발은 괜찮냐?”

“예. 아직은 괜찮은 거 같아요. 내일 병원에 들러 검사받기로 했구요.”

“그래.”

대화를 나눌 때 ‘출발해도 될까?’ 하고 질문을 던졌던 반트가 정지우의 고갯짓에 바로 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20분 거리다.

빌의 집과 멀어진 것이 아쉬웠는데 지금은 박용근, 전은주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행복만 생각하기로 했다.

빌의 가족은 가능하다면 다음 주쯤 초대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Ji, 저녁은 집에서 먹는 거지?”

“그럴 거야. 같이 먹어도 되지?”

“물론이야.”

집으로 가는 길도 행복했다.

밴의 뒤쪽에 앉은 유정호가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모습도. 서울은 새벽 3시가 다 되었을 텐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