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89화 (89/262)

제7장. 내가 나갈게요. (2)

마틴은 벤치를 돌아보았다.

기예르모가 어정쩡한 얼굴로 마틴과 정지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정지우를 내보내야 이길 확률이 있다.

아니, 승리할 수 있다.

그런데 2주 아웃 판정을 받은 선수를 이렇게 내보내는 것이 그의 선수 생활에 장애를 줄 수도 있는 거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마틴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벤치 바로 위에 앉아 있는 박용근을 보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수첩을 유정호와 바튼을 통해 받은 순간, 마틴은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져 경기를 운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영국 리그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틀에 묶여 있었다.

단순하고 세부적인 움직임을 모두 선수들에게 맡겨 두고, 손에 쥔 성과에 취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부끄러움이라니.

박용근을 만나지 못했다면 프리미어리그 상위 팀을 만날 때마다 선수들에게 좀 더 뛰라고 고함만 지르는 감독이 되었을 거다.

저런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다.

그래서 그를 리저브 팀 헤드 코치로 쥬피터에게 추천까지 해 두었다. 그와 작전을 논의할 때 느꼈던 기쁨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얀센을 옮기기 위한 들것이 골대를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골키퍼를 결정했어야 할 시간은 이미 지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마틴은 박용근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Ji가 나가겠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박용근의 작은 눈이 마틴에게는 분명하게 보였다.

‘맡겨 줄 만한 녀석입니다. 잘할 겁니다.’

한국! 한국인! 정지우를 인식하기 전까지 전혀 관심 밖에 있던 나라의 남자가 감독 마틴을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고개를 짧게 끄덕인 마틴은 스크립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Ji를 내보내.”

스크립터가 빠르게 대기심에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반드시 교체 사인을 보내.”

“알았습니다.”

답을 들으면서도 마틴은 어쩐지 정지우가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들것에 실린 얀센이 벤치로 움직이는 동안, 홈 관중들과 원정 관중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그를 위로했다.

대기심이 얀센의 등 번호 1번과 정지우의 13번이 동시에 쓰인 패널을 높게 들자, 주심은 바로 들어와도 된다는 사인을 주었다.

정지우는 우선 얀센에게 다가갔다.

코 부위가 제대로 부러졌는지 진한 피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Ji, 승리능 가져당 줭! 낭 웽블링에 가깅능 원행.”

뭉개진 코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 때문에 발음이 엉망이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꽈악!

두 사람 모두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얀센이 정지우의 팔을 잡았다.

“약송해?”

정지우는 얀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6개월 정도 서브로 프리미어리그 팀에 있었던 것이 전부인 얀센, 그 이후로 챔피언십 팀만을 돌았던 나이 든 골키퍼가 그의 바람을 꽉 움켜쥔 손을 통해 전하고 있었다.

“웸블리에 갈 준비하고 있어.”

얀센이 피 묻은 입술 한쪽을 들며 웃더니, 기가 막히게도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정지우의 가슴을 툭 쳤다.

관중들이 모두 보았고, 카메라까지 그 장면을 잡았다.

“우와- 아!”

얀센의 어깨를 툭 쳐 준 정지우가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레드 블레이트에 두 번째로 소름 끼치는 정지우의 응원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장진모는 TV를 보다가 팔짱을 낀 것처럼 손을 들어 양쪽 팔뚝을 문질렀다.

“어후! 저놈 정말 멋지네! 소름 돋는 것 좀 봐.”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정지우의 응원가가 TV를 타고 울려 나와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을 때, 화면은 뉴캐슬 선수들을 지나 골대로 향하는 정지우의 뒷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너, 내일 준비해서 무조건 영국으로 가라.”

장진모가 고개를 돌린 앞에서 부장이 오랜만에 빛나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 옷 잡았던 거, 정식으로 사과해. 저 친구는 물건이다. 축구가 아니었어도 영웅이 되었을 친구야. 인정할 건 인정하자. 네가 느끼는 소름이 그 증거다.”

장진모를 진지하게 보았던 부장이 다시 뚫어질 것처럼 TV를 노려보았다.

“나도 소름이 돋았다. 이거 얼마 만인지도 몰라. 저 친구는 분명 최고가 될 거다. 세계 최고. 나도 오늘부터 저 친구 팬이다.”

장진모의 입 끝이 올라가는 것을 본 부장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주심이 경기를 시작하기 위해 공에서 물러나는 동안, 정지우는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골대에 도착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왼쪽 포스트에서 오른쪽 포스트를 가로지른 정지우가 풀쩍 뛰어서 크로스바를 툭 쳤다.

“우와- 아!”

경기 시작 전이다.

‘이 경기는 우리가 승리한다!’

정지우는 홈 관중들과 벤치를 향해 양손 검지를 높게 들어 보였다.

관중들은 아예 광기에 먹혀 버린 사람들 같았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시작됐다. 덩치가 커다란 중년 남자, 청년, 심지어 아직 어린아이들까지, 남자들이란 남자들은 죄다 웃통을 벗은 채 어깨동무를 하고 관중석을 뛰는 것이.

“난 이런 거 정말 좋아해! 오케이, Ji! 해 보자고!”

데이빗이 정지우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움직였다.

정지우는 공 앞에 서서 양손을 앞으로 밀어 댔다. 그리고 레믹을 보았다.

‘한 골쯤 더 넣어 줘야지?’

레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콕콕.

뒤로 물러나 바닥을 발로 찍은 정지우가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승리하자. 웸블리에 가자. 뒤는 내가 맡는다. 그러니 뉴캐슬을 밟아 주자.’

뜨거운 무언가가 유니온 선수들의 눈에 가득했다.

퍼어어엉!

정지우가 있는 힘껏 공을 차는 것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얀센이 피투성이 얼굴을 하고 나가는 것을 모두 보았다. 거기에 2주 아웃 판정을 받은 정지우가 일주일 만에 경기에 나선 상황이었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피가 끓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거였다.

휘이익! 휘익!

공을 향해 브라운과 꼼빠니가 달려들었고, 그중 브라운이 뉴캐슬의 장신 윌리암슨과 더밋 사이에서 악착같이 공을 따냈다.

투욱! 툭!

꼼빠니가 공을 잡고 앞으로 움직이는 순간에 심데종이 달려들었다.

투욱! 툭! 툭!

유니온 시티는 공을 빠르게 돌렸다. 그래서 세 번 만에 포그이와 데이빗을 거쳐 바로 맥슨에게 전달되었다.

툭툭!

맥슨이 서서히 뉴캐슬 진영을 향해 움직였고, 또다시 레믹이 그의 왼편을 미친놈처럼 달렸다.

“우와아- 아!”

수비수 둘이 레믹의 앞을 막아서는 순간이었다.

투우욱!

맥슨은 반대편에서 골대로 뛰어드는 브라운을 향해 공을 찔러 주었다.

움찔! 주춤!

브라운이 슈팅을 날릴 동작을 보이자 수비수 둘이 몸을 비틀며 앞을 막았다.

투욱!

그 순간, 브라운은 오른발 안쪽으로 골대를 향해 골을 굴렸다. 이런 거 주워 먹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가 유니온 시티에 있다.

퍼엉!

레믹이 불쑥 튀어나와 왼편 골대 끝을 향해 공을 차 넣었다.

출렁!

“이예에에에에에에!”

“우와아아아- 아!”

웃옷을 벗어 던진 관중들이 옆 사람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끌어안고 환호할 때, 레믹은 또다시 허공으로 높이 뛰어올라 구부린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마틴이 허공에 주먹을 뻗어 내는 옆에서 서브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감독님! 우리 웸블리 갈 거예요!’

정지우는 두 주먹을 불끈 앞으로 내민 채 벤치를 바라보았다.

기복이 더럽게 심한 놈, 레믹은 계속해서 약속을 지켰다.

그는 또다시 벤치 앞으로 가서 관중들 전체가 ‘미스터! 어메이징!’을 외치게 했고, 이어서 박용근을 향해 두 번째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 이! 굿- 바이!”

우렁찬 응원가가 원정 관중들의 자존심을 완벽하게 짓밟는 레드 블레이트였다.

경기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중앙선의 양쪽으로 선수들이 나뉘어 섰을 때는 이미 후반 30분이 조금 더 지나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 이! 굿- 바이!”

관중석에서 부르는 응원가는 조금 더 빨라져 있었다. 웃옷을 벗어 던진 관중들이 제자리를 뛰고 있어서 관중석에 물결이 이는 것처럼 보였다.

삐이익.

휘슬이 울리자마자 시세가 급하게 공을 뒤로 돌렸다.

얀센의 부상으로 생긴 시간을 감안하면 두 골 차에 경기를 포기하기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뒤로 돌아간 공을 콜백이 아니타에게 밀어 주었다.

툭툭! 툭! 퍼어엉!

아니타가 앞으로 치고 오다가 반대편으로 길게 넘겼다.

고프란이 공을 잡고는 바로 유니온 시티의 오른편을 치고 달렸다.

“헤이! 무둔바! 자리! 움직이지 마!”

정지우는 정면에 있는 무둔바를 향해 고함을 지른 후, 곧바로 고프란의 방향에 맞춰 각도를 잡았다.

추가 시간까지를 생각하면 2 대 0은 안심하기 어려운 스코어였다. 여기에서 한 골만 허용해도 경기가 어떻게 뒤집힐지 모른다.

특히나 득점한 직후에 바로 실점하는 게 가장 나쁘다. 이상하게 그럴 경우, 선수들의 사기가 뚝 부러지기 때문이었다.

카알이 고프란을 막아서자 콜백과 시세가 주변으로 달려왔고, 데이빗과 포그이, 꼼빠니가 그들을 상대했다.

지금이다!

“헤이! 무둔바!”

정지우는 손으로 194의 장신 윌리암슨을 가리키며 자세를 낮췄다.

쏠 거냐? 센터링이냐?

중앙에 콜로시니, 더밋, 윌리암슨의 장신이 쭉 버티고 있었는데, 믿을 건 라파엘과 무둔바였다.

퍼어엉!

고프란은 골대 앞으로 센터링을 날렸다.

‘높아!’

저 높이라면 윌리암슨도 헤더를 하지 못한다.

휘이익! 휘익! 휘이익!

골대 앞에서 선수들이 상의를 움켜쥐고, 팔을 낀 채로 몸을 솟구쳤을 때였다.

정지우는 공의 방향을 따라 빠르게 골대 왼편으로 움직였다.

뜨끔!

몸을 움직이는 순간에 오른발 정강이에 통증이 있었는데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공은 실제로 높게 떠오른 선수들 머리 위를 지나쳤다.

그리고 그렇게 넘어간 공을 향해 166의 아니타가 달려들었다. 신장이 작은 선수라 수비수들이 방심한 틈을 파고든 공격이었다.

정지우는 왼편 포스트에서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허리를 낮췄다. 바로 이 1.5미터까지가 슈팅하는 선수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한계 넓이다.

부우웅!

아니타가 달려오는 속도를 이용해 몸을 띄웠다.

왼편? 오른쪽? 바닥?

모든 것이 사라지고 공을 향해 머리를 내미는 아니타만 보였다.

터엉!

숨이 턱 막혔다.

코 아래가 피투성이가 돼 가면서 얀센이 지켰던 골대다.

내보내 달라고 했던 경기, 박용근과 전은주가 지켜보는 경기, 그리고 박용근이 전술에 도움을 준 경기.

공은 오른쪽 골대를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건 정말이지 보는 게 아니라 느낀다는 표현이 맞다.

그렇지 않고 눈으로 확인한 뒤에 반응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헤더인 거다.

화아아아악!

정지우는 오른쪽으로 몸을 던지며 손을 뻗쳤다.

각도만 잡으면 된다.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날릴 수 있는 공의 각도.

그런데 공은 두려울 정도로 절묘하게 공간을 파고들었다.

정지우는 허공에서 상체를 있는 힘껏 뒤로 젖혔다. 그리고 어깨뼈가 빠질 정도로 팔을 뻗었다.

제발! 매번 부탁하는 건 알지만, 매번 이렇게 절박하거든!

그러니 제발!

제발 우리가 웸블리에 갈 수 있게 해 줘!

터어억! 털썩!

“예에에에에에에에!”

정지우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Come on!”

바닥에서 일어난 정지우가 가슴의 엠블럼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예에!”

두 팔을 아래로 힘껏 뻗은 라파엘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고, 흥분을 참지 못한 데이빗은 정지우의 머리를 움켜쥐고 벌겋게 충혈된 눈을 들이밀고 있었다.

“무둔바!”

미친 것처럼 독이 오른 눈으로 정지우는 무둔바를 불렀다.

하얗게 보이는 눈을 한 무둔바가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지우에게 고개를 디민 다음이었다.

“막아! 지금처럼만 지켜! 그럼 우리 웸블리로 간다!”

정지우의 으르렁대는 고함을 근처의 수비수 모두가 들었다.

그 가운데서 무둔바는 잔인해 보일 정도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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