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88화 (88/262)

제7장. 내가 나갈게요. (1)

기대했던 경기가 지루하게 흐르거나 엉뚱하게 무너지면 관중들은 가장 먼저 팔짱을 낀다. 그런데 실제로 후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때, 레드 블레이트의 관중 3분지 1이 팔짱을 낀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질 때 지더라도 치고받는 경기에 열광하는 것이 철강 일을 하는 유니온 시티 홈 관중의 성향이다.

그런데 시즌 내내 그렇게 뛰던 팀이 갑자기 쓰리백에 버스를 세운 것처럼 수비 위주로 버티고 있으니, 홈 관중들에게는 아무래도 영 마뜩찮을 경기였다.

삐이익!

유니온 시티의 선공이었다.

툭! 투욱!

데이빗이 공을 카알에게 넘긴 직후에 카알은 바로 앞에 있는 꼼빠니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꼼빠니를 노리고 있던 심데종이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포그이가 악착같이 그와 어깨를 부딪치며 달렸다.

툭!

꼼빠니가 공을 재빨리 데이빗에게 주었다.

이번엔 기회를 노리던 씨소코가 달려들었다. 당연하게 데이빗은 재빨리 공을 스웰던에게 넘겼다.

툭툭.

스웰던이 약을 올리는 것처럼 씨소코의 앞에서 공을 몰고 움직였다. 전반의 경기 운영을 보았을 때, 이 정도면 분명 뒤로 공을 돌릴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스웰던은 치고 달리는 것도 아니고, 패스를 주지도 않은 채 발바닥으로 공을 굴리며 씨소코를 약 올렸다.

화악! 툭!

참지 못하고 씨소코가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스웰던은 다가온 맥슨의 앞으로 공을 차 주었다.

투욱!

치고 달리는 것이 유니온에서 가장 뛰어난 맥슨, 그가 곧바로 공을 몰고 뉴캐슬 진영으로 달렸다.

“우와- 아!”

홈 관중들마저 공을 다시 뒤로 돌릴 거라고 예상하는 시점에 느닷없이 나온 드리블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이빗, 꼼빠니, 레믹이 일제히 뉴캐슬 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후반 시작 5분 정도 된 시간이었다.

“우와- 아!”

레드 블레이트에 쌓여만 있던 장작에 맥슨이 제대로 불을 붙인 꼴이었다.

게다가 전반과 전혀 다르게 스웰던이 씨소코를 대놓고 따라붙었고, 카알이 심데종을 노골적으로 막아섰다.

뉴캐슬 선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보다 데이빗과 꼼빠니가 뉴캐슬 골대 앞에 있는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둘을 막아야 할 뉴캐슬 선수 둘이 오히려 엉뚱한 유니온 선수에게 잡혀 있을 거라고 어떻게 예상했겠나?

투욱!

맥슨이 차 준 공을 데이빗은 바로 옆에 있던 스웰던에게 넘겨주었다.

툭툭!

또 스웰던이다.

씨소코가 데이빗에게 움직인 공간을 이용해 스웰던은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움직였다.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에 선 상대 선수를 보면 우선 중거리 슛을 막아야 한다.

“슛을 막아! 슛!”

뉴캐슬의 골키퍼 팀 크롤이 스웰던을 가리키며 악을 써 댔고, 곧바로 수비수 둘이 슈팅 각도를 줄이며 다가섰다.

툭!

스웰던은 공을 바로 왼편 터치라인에 서 있던 맥슨에게 넘겼다.

그 순간이었다.

오프사이드를 피해 빠져나와 있던 레믹이 맥슨의 왼편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투욱!

“우와- 아!”

맥슨은 달려 나가는 레믹의 앞을 향해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패스를 찔러 주었다.

툭툭.

공을 두 번 치며 골라인 근처로 달린 레믹이 막아서는 수비수를 돌파할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주춤, 주춤.

수비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을 때였다.

투욱.

레믹은 바깥에서 달려온 데이빗을 향해 공을 넘겼다.

툭!

데이빗은 오른발 안쪽으로 공의 방향만 바꿨다.

“우와- 아!”

레믹이 공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들고, 수비수 둘이 악착같이 그 앞을 막아섰다.

퍼엉! 티익!

레믹의 슈팅은 몸을 비튼 수비수의 엉덩이를 맞고 튀어나왔다.

퍼엉!

스웰던이다. 그가 달려들며 튀어나온 공을 그대로 날렸다.

빨랫줄처럼 쭉 뻗어 간 공을 뉴캐슬의 골키퍼 팀이 바닥에서 걷어 내는 것처럼 겨우 앞으로 쳐 냈다.

“우-!”

홈 관중들의 탄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툭!

레믹은 저런 역할을 정말 잘한다.

귀신처럼 툭 튀어나오는 것.

그가 거짓말처럼 수비수 틈을 파고들어 그 공을 발 안쪽으로 툭 차 넣었다.

휘이익!

몸을 던진 골키퍼 팀의 손끝을 스친 공은,

철렁!

그대로 뉴캐슬의 골대 그물을 흔들었다.

“이예에에에에에에!”

골을 확인한 레믹이 골대 앞을 가로질러서 허공에 높다랗게 뛰어올랐다.

번쩍!

그러고는 허공을 향해 구부린 오른팔을 높게 쳐들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전반 내내 지루했던 경기를 펼치던 유니온 시티가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밀어붙였고, 10분도 되지 않아 골을 넣었다.

흥분한 관중들이 펄쩍펄쩍 뛰며 괴성을 질러 댔고, 터치라인을 따라 달리는 레믹이 그들을 향해 두 손을 연신 치켜들었다.

‘하여간 쇼맨십은 죽여.’

정지우가 레믹을 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동료들과 함께 터치라인을 따라 달려온 레믹이 벤치 앞에서 양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화악!

이제는 아예 레믹 특유의 세레머니가 되어 버린 뽀빠이 동작이었다.

“미스터! 어메이징!”

레믹의 팔 동작에 맞춰 고함을 질러 준 관중들이 그만큼 더 흥분할 때였다.

레믹이 두 손을 공손하게 들어 박용근을 가리킨 후,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오버하기는!

정지우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박용근은 레믹의 인사에 맞춰 짧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형! 저게 뭐야?”

장진모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부장을 바라보았다.

골을 넣은 영국 선수가 죽어라 달려가더니, 동료들과 함께 박용근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TV를 타고 나왔다.

카메라가 이런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박용근 내외를 계속 잡고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이들이 박용근을 향해 연신 엄지를 치켜세우는 모습이 연속해서 나왔다.

“저 양반이 뭔 도움을 준 거야? 정지우 때문에 그런가?”

“형! 나 영국 가야 돼요. 저거 팝시다! 특종 같지 않아? 나 이상하게 이 장면에서 소름이 쫙 끼쳐. 이건 파야 돼, 형!”

부장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스웰던과 맥슨이 장작에 불을 댕겼다면, 레믹은 완전히 기름을 부었다.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나뉘어 섰을 때였다.

“우와- 아아!”

아직 경기 시작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관중석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홈 관중들이 엄청난 목소리로 응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지우다!

주심마저 왜 그런가 하고 휙 돌아보았을 때, 정지우가 사이드라인 바깥에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그리고 그에 답하는 것처럼 정지우의 응원가가 레드 블레이트에 메아리를 울릴 만큼 커다랗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Ji가 시합에 나가면 레드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승리를 확신한 것처럼 제자리에서 뛰어 가며 부르는 정지우의 응원가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

그리고 응원가가 끝나기 무섭게,

“우와아- 아!”

관중들이 정지우를 향해 두 팔을 뻗으며 우렁찬 함성을 질러 댔다.

이 정도였구나!

박용근은 울컥 올라온 감정을 누르려고 공연히 작은 눈을 부릅떴다. 제자인 정지우가 유니온 시티에서 이렇게나 인정받는 선수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 울컥 올라온 감동은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엄청난 응원가! 그리고 이 함성이 오직 정지우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에 전은주는 눈시울을 붉혔고, 박용근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굳어 버린 듯한 얼굴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삐이익!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불었을 때였다.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 이! 굿- 바이!”

관중들이 ‘크리스티니아 드바지’의 ‘굿바이’란 노래를 군가처럼 절도 있게 부르며 뉴캐슬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뜻은 분명했다.

정지우가 나섰으니 너희는 이제 끝이란 의미였다.

신의 가호를 바란다는 투로 양팔을 머리 높이로 든 홈 관중들이 리듬을 타며 던지는 조롱을 뉴캐슬 원정 팬들은 팔짱을 낀 채로 받아들였다.

골을 넣은 팀만이 응원가를 부를 자격이 있고, 그 응원가를 방해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 여긴다.

그래서 모욕을 견디는 원정 응원단의 모습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우리가 너희 때문에 이런 조롱을 받고 있다. 그러니 얼른 우리도 응원가를 부르게 해 다오.’ 하는 무언의 압력같이 전해진다.

경기가 시작되고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유니온 시티의 스웰던이 또다시 거칠게 달려들어 씨소코의 공을 빼앗았고, 그대로 오른쪽으로 길게 넘겨주었다.

“우와- 아!”

공을 잡은 브라운은 달려드는 레믹에게 패스할 것처럼 모션을 취하다, 느닷없이 뉴캐슬의 오른쪽 골키퍼 에어리어를 파고들었다.

“우와아아아!”

레믹과 꼼빠니, 맥슨이 달려들었는데 지금은 이미 수비수들과 뒤엉킨 상태였다.

퍼엉!

브라운은 그대로 슈팅을 날렸다.

출렁!

“우-!”

골은 옆 그물을 맞고 아웃됐다.

브라운이 미안하다는 투로 레믹과 꼼빠니를 향해 손을 들었는데, 수비수들이 완전히 자리 잡고 있어서 이런 건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뉴캐슬의 골키퍼 팀이 골킥을 준비하는 동안, 선수들이 중앙선 부근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때,

삐익! 삑!

주심이 날카롭게 휘슬을 불며 뛰었다.

스웰던과 씨소코가 서로 가슴을 밀치며 다투고 있었다.

데이빗을 지켜 줘야 하는 스웰던과 그를 노리는 역할을 맡은 씨소코가 제대로 부딪친 거였다.

‘잘한다!’

정지우는 스웰던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경기 중에 상대 선수 자극하는 임무를 저렇게 좋아하고, 잘하는 선수는 스웰던이 처음이었다.

씨소코는 확실히 독이 오른 얼굴이었다.

한 골을 먹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따라붙는 스웰던 때문에 데이빗에 대한 마크도, 경기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흥분하지만 마라.’

유니온 시티 선수들 모두가 스웰던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었다.

퍼엉!

골킥으로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전반과 전혀 다르게 거칠고, 투박하고, 숨 막히는 경기가 진행되었다. 역시나 데이빗, 씨소코, 스웰던이 뒤엉킬 때마다 몸싸움이 거칠게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삐이익!

주심이 스웰던과 씨소코, 두 선수를 불러 앞에 세웠다. 그러고는 단호한 손짓을 해 가며 구두 경고를 주었다.

“그만해! 계속 이러면 두 사람 모두 분명히 퇴장시킬 거야!”

각자의 얼굴에 대고 분명하게 뜻을 전한 주심이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휘슬을 불었다.

정지우 효과는 확실히 보였다.

마음이 급해진 뉴캐슬은 공을 잡으면 거의 무조건이다 싶을 정도로 유니온 시티 골대를 향해 공을 띄웠고, 장신 선수를 이용한 헤더를 노렸다.

반대로 유니온 시티는 전반처럼 다시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레믹이 뛰어드는 순간에 한 번씩 그 앞으로 공을 뿌려 주었다.

후반 20분쯤이었다.

퍼엉!

뉴캐슬의 골키퍼 팀 크롤이 길게 차 준 공이 중앙선을 훨씬 넘어 유니온 시티 진영 중간쯤 떨어졌다.

휘이이익!

데이빗과 카알, 아니타와 콜백이 뒤엉켜 뛰어올랐는데, 공은 콜백의 머리에 맞고 유니온 시티의 오른쪽에 떨어졌다.

퍼엉!

흐르는 공을 뉴캐슬의 시세가 유니온 시티의 골대를 향해 높다랗게 날렸다. 장신 선수들과 무둔바가 뒤엉켜 밀고 밀릴 때 얀센이 공을 향해 달려 나왔다.

저렇게 어중간하게 날아오는 공이라면 골키퍼로서 절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휘이익! 휘익! 휘이익!

무둔바와 수비수들, 그리고 콜백과 시세, 고프란이 공을 향해 뛰어올랐다.

퍼어억! 삐이익!

그런데 고프란의 팔꿈치에 눈을 얻어맞은 얀센이 거꾸로 떨어지는 것처럼 그라운드에 처박히고 말았다.

달려간 주심이 얀센을 살핀 후에 벤치를 향해 빠르게 손짓을 했다.

“우-!”

허리에 손을 얹은 데이빗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고, 터치라인으로 달려 나온 마틴이 상황을 살필 때였다.

팀 닥터 스미스가 마틴을 향해 검지를 돌려 보였다.

교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서브 선수에 기예르모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나갈게요.”

그러나 정지우는 마틴을 향해 분명하게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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