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Go Wembley! (3)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
윌리암슨이 헤더한 공이 얀센의 정면으로 날아갔고, 가슴에 맞고 튕긴 공을 얀센이 엎어지며 움켜쥐었다.
윌리암슨이 커다란 머리를 감싸 쥐며 아쉬움을 토해 낼 때,
짝짝짝짝짝짝짝짝짝!
홈 관중들은 위기를 넘긴 수비수들과 얀센을 박수로 응원했다.
“멋진 세이브였어!”
데이빗이 다가가 얀센의 뒤통수를 툭 쳐 주었고, 카알은 얀센과 교대라도 하는 선수처럼 손을 마주쳤다.
박용근은 냉정한 표정으로 허벅지에 올린 메모장에 느낀 점을 적어 나갔다.
유정호가 힐끔 보았을 때 레믹과 무둔바, 동료 선수들의 동선과 위치가 X 자를 이용해 표시되었고, 그에 따른 뉴캐슬 선수들의 움직임과 위치 변화가 세모꼴로 따로 적혀 있었다.
‘이거였구나.’
유정호는 정지우의 아파트에서 보았던 노트를 떠올렸다.
그 역시 선수 출신이다.
당연하게 경기가 끝나면 중요한 순간을 떠올릴 수는 있었지만, 지금의 박용근이나 정지우처럼 주변 선수들의 움직임을 이렇게까지 바라본 적은 없었다.
이런 지도자에게서 배웠었다면!
박용근처럼 경기 전반을 두루 살피는 능력을 지닌 지도자가 경기가 끝난 후, 저런 메모를 바탕으로 왜, 무엇 때문에, 어디로 뛰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더라면!
‘죽을힘을 다해서 뛰면 져도 다른 말 않겠다! 그런데 그것 하나 명심해! 죽을힘을 다해 뛴 경기는 절대로 지는 법이 없어!’
군대스리가에서나 나옴 직한 고함을 지르던 코치 밑에서 오로지 이기기 위한 경기를 뛰었었던 유정호는 나직한 한숨에 아쉬움을 담아냈다.
그런데?
메모를 보던 유정호는 끝내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감독님! 여기 이 작대기 표시가 이 선수가 주로 뛰는 방향인가요?”
“어? 그걸 알아봤어?”
박용근의 질문에 유정호는 전에 아파트에서 보았던 정지우의 노트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중앙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루한 경기인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그 녀석!”
박용근은 상체를 세워 앞쪽에 앉은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집중력이 대단했었다.
그리고 질문이 많았었다.
‘감독님, 이때 얘가 왜 이리 뛰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제 나름으로 적어 놓은 동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움직임이 생길 때마다 박용근에게 묻곤 했었다.
패스라는 게 정해진 길이 어디 있겠나?
상황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길을 찾아 공을 찔러 주는 것이 멋진 패스인 거다. 그러려면 타고난 재능에 그라운드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삑! 삐이이익!
지루했던 전반 경기가 그렇게 끝났다.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용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씨익.
뭐가 저렇게 좋을까?
힘 빠진 감독 부부가 이렇게 뒤에 앉아 있는 것이 저렇게나 좋은 일일까?
손을 흔드는 전은주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정지우가 동료들과 함께 벤치를 벗어났다.
“뭐야! 저 양반 박 감독 아니에요?”
장진모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부장을 보았다.
“맞네! 그러네.”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앞에서 화면에 대놓고 박용근과 전은주, 그리고 유정호가 나오고 있었다.
정지우를 잡았던 카메라가 한국인 응원단이라고 생각해서 잡은 것처럼 보였다.
“형! 오늘 유니온 시티가 이기면 나 영국 좀 보내 줘요.”
“야, 인마! 다음 주에 쿠웨이트랑 월드컵 예선 있어. 정신 좀 차려!”
“형니- 임.”
표정과 말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징그러운 애교였다.
‘앙까라 메시! 앙까라 메시!’ 하는 광고가 요란스럽게 울려 나오는 TV 앞에서, 부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어 댔다.
“아, 거, 보내 줍시다.”
“야, 이 미친놈아! 가뜩이나 너 때문에 광고 떨어진다고 난린데 너를 영국에 보내자고 해 봐라. 후유! 진모야, 조카가 공부를 못하니까 어디 기술 학원이라도 보내야 할 거 아니냐?”
“형님, 나 영국 보내 주면 내가 특종 하나 꽉 쥐고 올게요.”
부장이 눈만 움직여 장진모를 보았다.
“성호 형 만났었거든요.”
“성호? 주성호?”
“예. 그 형이 또 지우랑은 통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가서 이번에 멋진 특종 하나 잡아 올게요. 일일 클릭 수 1위! 내가 그거 한번 끊어 볼게요.”
“어떤 내용으로?”
부장이 고개를 돌리며 관심을 보였다.
“FA컵 결승전 주전 골키퍼 정지우, 단독 인터뷰!”
고개를 갸웃하는 부장을 보며 장진모가 바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모르는 정지우의 모든 것!”
“야! 무슨 연예인 뒷조사 하냐?”
장진모의 두 번째 제목을 들은 부장이 제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고개를 젓는 순간이었다.
“내가 구단주부터 감독, 그리고 동료 선수들까지 싹 그물로 긁듯이 인터뷰해서 올게요.”
홱!
부장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형, 내 별명이 뭐요? 거머리 아니요? 착 달라붙으면 나 떼어 낼 사람 없어요.”
“소금 뿌리면 되지.”
장진모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는데, 부장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너, 정지우는 당연한 거고, 최소한 감독과 주장 인터뷰는 따와야 한다. 거머리 정신으로 무장하고, 소금 뿌려도 끝까지 착 달라붙어. 그것만 돼도 충분히 클릭 수 나온다.”
“넵!”
“에이, 이거 아무래도 내가 내 관 뚜껑에 못질하는 느낌인데? 오늘 유니온 시티가 승리하면 가는 거야.”
“그거야 당연하죠.”
부장이 무언가 계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브 선수들은 하프 타임을 이용해 그라운드에 남아서 몸을 푼다. 그러나 정지우는 라커룸으로 움직였다. 데이빗이 눈짓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봐! 기운들을 내라고!”
일주일 내내 목청을 가다듬었을 것 같은 남자의 고함이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그락! 자그락!
통로를 걸어가는 동안 뉴캐슬 선수들이 정지우를 힐끔거렸다. 부상의 정도를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고, 왜 그라운드에 남지 않고 라커룸으로 향하는지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라커룸으로 들어선 선수들이 자리에 앉아 물을 마셨다.
힐끔. 힐끔.
켕기는 것이 있는 레믹과 무둔바가 데이빗과 정지우를 살폈다.
5분 정도다. 물 마시고, 젖은 유니폼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선수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다.
무승부를 노린 경기여서 결과는 나쁘지 않지만, 전반 내내 팀 전체가 삐거덕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면 누구나 동료를 원망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 상태로 나가면 후반은 엉망이 되는 거다.
“Ji, 우리 전반을 보고 느낀 점을 좀 알려 줘. 내가 볼 때 이렇게 견디면 무승부는 될 것 같은데, 전술 변화를 가져갈 타이밍을 모르겠어.”
주장 데이빗이 조용하게 꺼내 든 요구였다.
주장이라는 책임을 진 선수가 같은 동료에게 하기에는 정말 어려운 말이었을 텐데, 그는 각오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코치가 우리 모두 프리미어리그로 간다고 했었다.”
데이빗이 다리에 양팔을 걸친 자세에서 고개만 들고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우린 프로다.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리그에 속할 프로 선수들. 그런데 전반은 나부터 실망스러웠어. 고작 쓰리백 전술을 제대로 운영 못해서 변화를 주지 못했으니까.”
레믹이 힐끔 정지우의 눈치를 살핀 다음이었다.
“레믹, 아까는 멋졌다. 다만, 전에 Ji가 했던 말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공을 빼앗겼을 때, 적어도 수비에 치중하는 모습은 보여 줘.”
레믹이 답을 하지 않고 데이빗을 보았다.
동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한다고 여기는 얼굴이었다. 데이빗 역시 시선을 피하고 있지 않아서 분위기가 좀 더 좋지 않은 느낌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달칵.
그때 마틴이 들어섰다.
그는 데이빗과 레믹, 그리고 선수들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전반은 목표를 이뤘다. 이제 후반이 남았는데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고.”
마틴이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어?’
정지우가 보기에 분명 박용근이 메모하던 수첩이었다.
“후반에는 스웰던, 자네가 씨소코를 밀착 마크한다. 놈을 꽁꽁 묶어. 제압해. 대신 절대 퇴장은 안 돼. 자신 있나?”
“맡겨 두십시오.”
답을 들은 마틴이 이번엔 카알에게 시선을 돌렸다.
“카알, 심데종을 완전히 막아. 포그이 자네는 스웰던과 카알을 지켜보다 빈자리를 메워 주거나, 협력 수비를 펼치고.”
카알과 포그이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레믹.”
레믹이 불만과 걱정을 뒤섞은 얼굴로 마틴을 바라보았다.
“꼼빠니가 공을 잡으면 그의 바깥쪽으로 달려. 그때 브라운 자네가 레믹의 자리를 지켜 주고.”
“바깥쪽이요?”
“그래. 꼼빠니가 우측에 있으면 오른쪽 터치라인, 왼편으로 이동해서 공을 잡으면 왼편 터치라인을 따라 달려라. 공을 받으면 다시 꼼빠니나 브라운과 2 대 1 패스를 통해 슈팅 기회를 노린다.”
레믹이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수비수들이 장신이니까 아래를 노린다. 오프사이드를 무너트릴 킬 패스에 맞춰 뛰어들어. 꼼빠니나 브라운, 두 사람은 패스를 하든, 슈팅을 하든 레믹의 움직임에 맞춰 주도록.”
정지우는 마틴이 들여다보는 수첩이 확실히 박용근이 들고 있던 것임을 알아봤다.
언제, 어떻게 넘겨주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데이빗.”
마틴은 지금껏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주장을 찾았다.
“전반을 잘 견뎌 줬다. 스웰던과 카알을 믿고 후반에는 밀어붙여. 전반에 당했던 것을 돌려주자고. 시작과 동시에 쾅!”
마틴이 오른 주먹으로 수첩을 든 왼손을 때렸다.
“뉴캐슬을 무너트려.”
데이빗이 씨익 웃으며 정지우를 힐끔 보았다.
“그럼 멋진 후반을 기대하지.”
마틴이 할 말을 마쳤다는 투로 라커룸을 나섰다.
멋진 작전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가라앉아 버린 팀 분위기에서는 어떤 작전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
다들 알고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레믹.”
이미 그와 불편한 데이빗을 대신해 정지우가 그를 불렀다. 하프 타임이 5분쯤 남은 때였다.
종잡기 어려운 놈이다.
그는 ‘또 뭔데?’ 하는 불편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그놈의 되지도 않는 자존심이 놈의 이성을 움켜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성질대로 하면 그냥 확!’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골을 넣으면 부탁이 하나 있다.”
데이빗을 힐끔 본 놈이 다시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벤치 뒤편에 한국에서 온 스승이 계시거든. 그분 앞으로 달려와서 미스터 어메이징, 그거 한 번만 보여 주라.”
‘그거쯤이야?’ 하는 더럽게 어색한 얼굴로 레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둔바!”
“얍!”
이놈은 조금 더 직선적인 반응이었다.
“뉴캐슬이 밀고 올 때 다른 곳은 신경도 쓰지 마. 일단 얀센을 봐. 그의 지시대로 움직여. 네가 위치를 잡으면 누구도 너를 뚫지 못해. 그것만 명심해. 그리고 네 옆에서 헤더를 노리는 놈이 없도록만 막아.”
무둔바가 하얗게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에 얀센과 시선을 맞추었다.
“골을 넣으면 내가 터치라인으로 나가서 몸을 푸는 척할 거다. 그때가 기회다. 골을 더 넣어 버려. 그리고 흔들리는 뉴캐슬을 완전히 무너트려.”
정지우가 선수들을 돌아볼 때, 경기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한국에서 온 내 스승을 위해서 후반은 멋진 모습을 보여 줘. 진심으로 부탁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는 곧장 레믹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꽈악!
레믹이 정지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다음이었다.
“미스터 어메이징, 그거 꼭 부탁한다.”
쿵!
정지우는 그의 손을 당겨서 오른쪽 가슴을 부딪쳤다.
이번엔 무둔바를 일으킨 정지우가 그와 오른쪽 가슴을 부딪쳤다. 덩치가 워낙 크고 단단해서 벽에 가슴을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정지우가 순서대로 선수를 일으킬 때마다 후끈한 무언가가 라커룸을 감쌌다.
“Captain(주장).”
정지우는 마지막에 데이빗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쿵!
“부탁해.”
멋쩍은 웃음을 그려 낸 데이빗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골을 넣는 건 레믹일 텐데, 밥은 내가 사야겠군.”
풀고 싶은 거다. 다들 이런 순간을 기다렸을 거다.
그래서 데이빗의 말에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 냈다.
됐다. 이 정도면 된다.
이렇게 나가서 뜨거운 숨을 토해 내고, 땀을 흘리며, 상대 팀 선수들과 몸싸움을 하다 보면 다시 하나가 된다.
선발 선수들이 먼저 나가고, 가장 마지막에 정지우가 나섰다.
자그락, 자그락.
선수들이 걸을 때마다 스파이크가 바닥을 찍는 소리가 터널에 울렸다.
“우와- 아!”
그리고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정지우는 가장 뒤편에 서 있다가 조용하게 벤치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