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Go Wembley! (2)
정지우는 바튼이 운전하는 밴을 타고 박용근, 전은주, 유정호와 함께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했다.
승격이 확정된 상황에서 맞이한 FA컵 준결승전이다.
금요일 오후 1시경이고, 경기 시작까지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레드 블레이트의 앞은 관중들로 가득했고, 안쪽에서 불러 대는 우렁찬 응원가 탓에 대화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바깥쪽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매표소 앞의 관중들이 엠블럼이 새겨진 목도리를 머리 위로 들고 응원가를 불러 대거나,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마주 보며 고함을 질러 댔다.
박용근과 전은주는 놀란 데다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늘 이 정도냐?”
박용근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하긴 한데요, 그렇다고 특별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정도예요.”
TV로만 경기를 보던 이들이 그라운드를 오게 되면 꼭 놀라는 것이 바로 이 광적인 함성이다. 웃기는 건 사람을 흥분시키는 이런 분위기를 접하고 난 이들이 대개 그라운드를 다시 찾는다는 거다.
“감독님, 저는 여기서 가 봐야 합니다. 경기 끝나고 뵐게요.”
“그래라.”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인사를 마친 정지우가 선수 전용 통로를 이용해 레드 블레이트로 들어갔다.
경기에 뛸 상황이 아니었는데, 마틴은 박용근의 전술 제안을 받아들여서 정지우를 교체 명단에 올려놓았다.
박용근과 전은주, 유정호는 바튼의 안내를 받으며 관중석으로 입장했다.
라커룸에 들어서자 데이빗과 꼼빠니, 레믹이 먼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헤이! 오늘 컨디션은 어때?”
“벤치에서 열광적으로 응원할 정도는 돼.”
날아든 농담에 답을 한 정지우는 운동복에 유니온 시티 선수단의 면 티를 겹쳐 입었다.
골키퍼 장갑을 옆에 두고, 축구화의 끈을 묶는 순간에는 묘하게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슬슬 시작해 보자고.”
데이빗의 말대로 몸을 풀 시간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터널을 지나 그라운드로 나서자 동시에 ‘와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FA컵 결승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치른다.
관중석 위쪽에 커다랗게 걸린 ‘Go Wembley!’이라는 걸개가 홈 관중들의 바람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몸을 풀기 시작한 홈 팀 선수들을 관중들이 엄청난 함성으로 격려했다.
휙. 휙. 휙. 휙.
정지우는 얀센이 받기 수월한 코스로 공을 던져 주었다.
불편할 수 있는 사이다. 서브이던 정지우가 선발로 바뀌었고,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어서 샘이 나거나 좌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얀센은 오래 묵은 선수답게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5분쯤 몸을 푼 얀센이 정지우에게 공을 던져 주었다.
무리할 필요 없다.
그래서 정지우는 상체만 좌우로 틀며 얀센이 던져 주는 공을 잡았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지?’
얀센과 시선을 마주친 정지우가 천천히 그라운드 중앙에 설치된 선수용 통로를 향해 걸었다.
“이봐! Ji! 우리는 웸블리에 가고 싶다고!”
사람 목청이 저렇게 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고함이 정지우를 향해 달려왔다.
저런 고함을 일일이 대꾸하기는 어렵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묵묵하게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서브 선수들은 먼저 벤치로 나가거나, 혹은 주전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선 이후에 조용하게 움직이기도 한다.
홈경기냐, 원정 경기냐에 따라 다르고, 경기의 비중에 따라 또 다르다.
그리고 그것의 절대 기준은 감독의 지시에 있다.
정제된 듯한 응원가가 들려오는 라커룸에서 선수들은 곧 있을 준결승을 대비했다.
골키퍼 장갑을 만지작거리는 정지우, 이어셋을 귀에 건 브라운, 무언가를 생각하며 이마를 매만지는 레믹, 그리고 힐끔거리며 정지우를 살피는 무둔바까지.
이때의 팽팽한 긴장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경기에서 이기면 웸블리로 향하는 FA컵 결승이다.
챔피언십 소속 팀이 가지기 어려운 명예였고, 선수들에게는 커다란 경력이 되는 일이며, 유로파 리그에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때 마틴이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그 역시 결승에 진출하고 싶은 욕망을 눈빛에 담고 있었다.
“이 경기를 앞두고 너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마틴이 선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웸블리로 가는 티켓을 손에 쥔다면, 그건 오늘 경기에서 너희가 최선을 다해 뛰었기 때문일 거다. 그러나 혹시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경기를 시작도 하기 전에 뭔 사기 꺾는 말을 저렇게 해 대는 거지?
정지우뿐만 아니라 선수들 대부분이 그런 눈빛으로 마틴을 보는 앞이었다. 마틴이 약간은 야비해 보이는 미소를 달고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아주아주 천천히.
“불행하게 난 웸블리에서 경기를 해 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비록 내 책임이더라도 티켓을 손에 쥐지 못한다면 앞으로 평생 너희를 원망할 거다.”
저 양반이 결승에 가고 싶어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정지우가 입술을 올리며 웃고 말았는데, 다른 선수들 역시 비슷한 표정의 웃음을 달고 있었다.
“뉴캐슬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할 정도로 엄청난 팀이라면? 나도 인정. 그런데 우리도 프리미어리그 승격 팀이다. 저들과 우리가 다른 게 뭐가 있나?”
마틴이 본격적으로 선수들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프리미어리그로 간다. 어제 쥬피터 회장과 회의를 마쳤다.”
“우-!”
선수들 틈에서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온 직후였다.
“오늘 경기는 우리가 프리미어리그 소속 팀에게 던지는 경고가 될 거다. 뉴캐슬의 숨통을 거머쥐어! 그래서 티켓을 가져와. 우리 팀에 너희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티켓!”
그라운드에서 불러 대는 응원가가 자그맣게 들리는 라커룸에서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술 훈련대로만 한다면, 상대가 분명 당황할 거라고 약속한다. 그러니 경기가 끝났을 때 티켓을 내 손에 올려 줘! 나는 너희가 그렇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단호한 표정을 남기고 마틴이 라커룸을 나섰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코치가 제정신이 아니군.”
데이빗이 던진 농담에 라커룸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겠나? 코치가 저 모양이니 우리 모두 미친 것처럼 뛰어 봐야지.”
시간이 얼추 되었다.
정지우는 서브 선수들과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에 나설 선수들과 손을 부딪쳐 가며 라커룸을 나섰다.
벽돌로 블록을 만들어 놓은 듯한 유니온 시티 벤치 바로 위쪽 자리였다.
박용근은 물론이고 전은주도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TV나 모니터를 통해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함성과 열기 때문이었다.
“우와- 아!”
통로를 빠져나온 정지우가 스태프, 서브 선수들과 함께 벤치로 움직이자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정지우는 이런 경기장에서, 이처럼 엄청난 열기 속에서, 그토록 멋진 활약을 펼쳤던 거였다.
박용근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로 앞쪽에 앉은 정지우를 바라볼 때였다. 응원가가 바뀌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이어셋으로 듣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박용근의 귀를 파고들어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응원이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웠다.
간단한 행사가 끝나고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 양쪽으로 나뉘어 섰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응원가가 울려 퍼지는 속에서 주심이 뉴캐슬의 4번 콜백을 힐끔 보고는 휘슬을 입에 물었다.
삐이이익!
툭!
콜백이 바로 심데종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뉴캐슬은 4-4-2 포메이션을 선택했다.
거기에 안쪽 4의 자리에 184, 183, 194, 179의 장신 선수들을 배치했다. 높이에서 우위를 점하고, 더불어 세트피스에서 득점을 노리겠다는 전략인 게 분명했다.
유니온 시티는 3-5-2의 포메이션으로 맞섰다.
수비 라인 셋은 라파엘, 무둔바, 카알이었다.
그 앞 다섯의 중심에 데이빗을 두었고, 거칠기로 유명한 스웰던과 발 빠른 맥슨이 왼쪽, 오른쪽에는 포그이와 꼼빠니를 세웠다.
툭! 툭! 투욱!
뉴캐슬이 공을 뒤로 돌리며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는 철저하게 데이빗을 중심으로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투욱!
그러다가 공이 중앙선을 넘어오려는 순간이면 거칠게 달려들곤 했다.
박용근은 날카로운 눈으로 경기를 지켜보았다.
거칠다고는 들었지만, 손으로 붙잡는 것과 어깨로 상대 선수를 들이받는 것을 이 정도까지 허용해 주는 줄은 몰랐다.
반칙을 당한 선수들 역시 힘으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틴다. 이런 경기는 과열되기 쉽다. 그 증거로 몸싸움이 자주 일어날수록, 그리고 동작이 거칠어질수록 관중들 역시 좀 더 흥분하고 있었다.
전반 20분쯤까지 뉴캐슬은 특별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물론 유니온 시티도 기습적인 슈팅 한 개가 전부일 정도로 공격을 펼쳐 내지는 못했다.
지루한 경기였다.
중앙선 부근에서 공방이 치열하긴 했지만, 유니온 시티가 철저하게 웅크리고 있어서 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레믹은 자꾸만 데이빗을 힐끔거렸다.
공을 받은 순간에 기습을 펼치면 될 것도 같은데, 어쩐 일인지 데이빗은 포메이션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있었다.
투욱! 툭!
중앙선 부근에서 공을 잡으면 어김없이 꼼빠니와 포그이, 카알에게 공이 돌았고,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놀란 것도 있었다.
마틴이 예상했던 대로 씨소코와 심데종이 데이빗과 꼼빠니를 꽁꽁 묶다시피 그 주변에서 맴돈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레믹을 지키려는 스웰던과 씨소코의 몸싸움이 격렬해졌고, 두 선수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퍼어엉!
꽉 막힌 유니온 시티의 중간을 피하기 위해 뉴캐슬의 4번 콜백이 공을 길게 넘겼다.
콰아악! 삐이익!
그리고 바로 휘슬이 울렸다.
공을 받으려던 뉴캐슬의 8번 아니타와 수비수 무둔바가 부딪치는 바람에 나온 파울이었다.
주심은 유니온 시티의 공을 선언했다.
무둔바를 힘으로 밀어내려고?
땀이 배어 나온 무둔바를 바라보며 레믹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작이 굼뜨지만 거의 기둥 수준인 그를 뚫으려면 속도로 해결해야지, 저렇게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거다.
투욱!
공을 세운 라파엘이 스웰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수비수 셋, 그 앞에 다시 다섯이 서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수비는 정말 단단해졌지만, 그만큼 공격도 어려웠다.
공은 맥슨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바로 스웰던을 향해 뒤로 움직였다. 거기에서 또 라파엘, 포그이, 그리고 이번엔 브라운이 잡고, 또 뒤로 움직였다.
데이빗과 꼼빠니가 꽁꽁 묶여서 패스가 쉽게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탓도 있었다.
레믹은 공을 받기 위해 중앙선 쪽으로 움직여 손을 들었다.
투우욱!
그러자 포그이가 레믹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전술대로라면 공을 돌려주어서 시간을 벌어야 했다.
투욱! 툭!
그러나 레믹은 바로 뉴캐슬 진영을 향해 달렸다.
슈팅으로만 해결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여차하면 중거리라도 날려 볼 생각이었다.
“우- 아아!”
10미터쯤 달리자 수비수 더밋이 달려들었다.
투욱!
레믹은 공을 왼쪽으로 흘리는 척하다가 빠르게 오른쪽으로 틀었다.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달리는 브라운이 보였다.
패스를 주면 또 뒤로 돌릴 게 분명했다.
툭툭!
레믹은 이번엔 왼편으로 몸을 틀었다.
“이예- 에!”
피를 끓게 하는 관중들의 함성이 파고들었다.
왼편에서 맥슨이 빠르게 사이드라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패스? 파고들어?’
레믹이 오른쪽을 확인하기 위해 주춤하는 순간이었다.
터억!
뉴캐슬의 8번 아니타가 뒤에서 어깨를 들이밀며 공을 채 갔다.
퍼어엉!
그리고 그는 곧바로 대각선 너머로 공을 넘겼다.
그 순간, 데이빗과 꼼빠니를 묶었던 씨소코와 심데종이 일직선으로 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우- 와아!”
지루하던 경기에 느닷없이 속도가 붙었다.
공을 잡은 뉴캐슬 고프란이 툭툭 치며 골키퍼 에어리어를 파고들었다.
시세와 씨소코, 콜백이 골대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194의 장신 윌리암슨까지 달려왔다.
“지켜! 자리! 자리!”
느닷없는 기습에 뒤로 밀린 상황이었다.
골키퍼 얀센이 고함을 질렀는데도 무둔바는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치고 들어오는 고프란을 보고 당황한 상태에서 달려오는 데이빗을 보자 그에게 자리를 양보한 거였다.
모든 것이 뒤엉킨 순간에 오프사이드 라인마저 무둔바가 무너트린 꼴이었다. 이러면 공격팀은 당장 무둔바가 서 있는 위치까지 센터링에 여유가 생긴다.
퍼어어엉!
고프란이 찬 공이 날카롭게 골대로 날아왔다.
“우와- 아!”
유니온 시티 수비진은 달려드는 194의 윌리암슨을 완전히 놓쳤다.
터엉!
그래서 그가 높다랗게 떠서 머리로 슈팅을 날리는 동안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