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82화 (82/262)

제5장. 그러니까 내일 출발하자. (1)

시장을 가로질러 지나는 길에서였다.

‘총각! 이거 한번 맛보고 가!’ 하고 앞치마 두른 아주머니가 붙잡은 적이 있었다.

맹세코 모르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아주머니가 입에 넣어 준 족발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운동선수야?”

“예. 왜요?”

“남의 아들 같지 않아서 그래. 잠깐 앉아 봐.”

표정이나 눈빛에 담긴 더 먹고 싶은 바람을 보아서였을까?

운동복 위아래를 살핀 아주머니가 팔을 당겨서 앉히고는 기름진 족발을 썩썩 썰어 주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바튼의 조언이 어쩐지 정지우에게는 그때 먹었던 족발 같은 느낌이었다.

어머니, 감독님과 사모님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까지.

“다른 집을 보러 가지요. 이곳에서 5분 정도 거리이니까 금방 도착합니다.”

“그곳이 이곳보다 크다면서?”

“아래층이 470평방미터라고 했으니까 이곳의 반 조금 더 큰 것 같습니다. 아래층과 위층을 세 번쯤 돌면 다른 운동을 안 해도 될 정도일 겁니다.”

말을 하고 웃겼나 보다. 바튼이 먼저 웃었고, 정지우가 비슷한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이곳을 사용하겠다고 하면 언제 짐을 옮기지?”

“쥬피터 회장에게 보고하는 순간!”

바튼이 엄지와 중지를 튕겨서 ‘딱!’ 소리를 냈다.

“마법처럼 옮겨져 있을 겁니다.”

“넌 원래 그렇게 유쾌해?”

“솔직히 면접을 볼 때 Ji의 전담 매니저가 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뭐! 그게 아니어도 가까이서 볼 기회는 생기겠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만나 본 소감은?”

바튼이 씨익 웃었다.

“Ji, 나는 당신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골키퍼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때에도 당신 옆에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르셀로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어디에 있든지요.”

“그렇다면 실망하겠는데? 나는 이곳에 있을 테니까.”

정지우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으로 정하시죠. 회장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보고하고, 짐은 내일 오전에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좋겠지?”

“Ji가 이 팀에 있을 거라면요.”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까지 나선 바튼을 봐서라도 이 정도에서 만족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현관을 나선 다음이었다.

“그런데 선수 시절에 포지션이 뭐였어?”

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선 바튼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골키퍼였어요.”

그럴 것 같았다. 꼭 그런 느낌이었다.

묻고 싶은 게 좀 더 생겼다. 왜 그만두었는지?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선수 생활을 했었는지.

앞으로 계속 볼 사이라면 급할 건 없는 거다.

정지우는 바튼과 함께 차를 향해 걸어갔다.

***

“마틴!”

양팔을 커다랗게 벌린 쥬피터가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마틴을 맞이했다.

“우리의 위대한 리더!”

쥬피터는 저렇게 웃는 얼굴을 할 때, 뺨을 때리고 싶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속마음이 억지로 지어낸 웃음과 완벽하게 따로 놀아서 그런 걸 거다.

마틴은 적당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그가 권해 주는 자리에 앉았다.

“아주 인상적인 승리였지.”

쥬피터가 묻지도 않고 홍차 두 잔을 준비해 마틴의 앞에 놓아 주고, 건너편에 비스듬하게 앉았다.

“Ji가 2주 아웃이라는 유감스러운 보고는 받았네.”

손으로 차를 가리킨 쥬피터가 자신의 앞에 놓은 찻잔을 들었다.

“인터뷰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습니다.”

“오호! 그래, 말해 보게.”

“회장님의 돌발적인 발표 때문에 한국의 박 감독이 곤경에 빠진 모양입니다.”

찻잔을 입에 가져가던 쥬피터가 굳은 것처럼 눈만 들었다.

“한국의 정서적, 사회적 특성 때문인 것 같은데, Ji가 그 점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우! 저런! 난 전혀 그런 뜻이…….”

“물론 그러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 다독여서 지금은 준비해 둔 주택을 살피러 갔습니다.”

어쩌면 쥬피터에게는 황금 알을 낳는 오리가 불편한 얼굴로 날갯짓을 한다는 말처럼 들렸을지 모른다.

“잘했네, 마틴! 진심으로 나는 박 감독을 곤경에 빠트릴 의사가 없었어. 필요하다면 오늘이라도 내가 Ji를 만나서 정식으로 사과하겠네.”

그래서인지 그는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변명을 늘어놓기 바빴다.

“Ji는 자신의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는, 요즘은 보기 드문 선수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습니다.”

쥬피터가 ‘이 인간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지?’ 하는 눈빛으로 마틴을 보았다.

“새로운 집을 결정하면, Ji의 스승 부부를 초대하는 겁니다. 서프라이즈 파티 정도면 어떨까 싶습니다. 부상 때문에 쉬는 동안 함께 지내도록 배려한다면 컨디션 회복이나 정식 계약에 도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전부인가?”

“비용은 물론 구단이 부담해야 할 겁니다.”

“오우, 마틴! 그런 거라면 당장 오늘 중에라도 사람을 보내겠네. 그래서 그 친구가 두 분을 에스코트해서 이리 모셔 오지! 어떤가?”

“나쁘지 않군요.”

“그걸로 정식 계약이 확보될까?”

쥬피터의 눈에 올라온 초조함을 본 마틴은 웃음을 억지로 삼키고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내게 묻는 거라면 확실하게 ‘예쓰’입니다.”

마틴이 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답을 한 직후였다.

“잠시만 기다리게.”

쥬피터가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가다시피 책상으로 움직여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가계약 상태인 지금 정지우가 날아가면 위약금 9억 원이 구단이 챙길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정지우와 정식 계약이 체결된다면, 그때부터 쥬피터는 바이아웃 조항에 따라 정지우를 빼앗겨도 최소 90억을 챙긴다. 그러니 당장 팔 마음이 없는 그에게서 정지우를 데려가려는 팀이 있다면 최소 90억 이상을 불러야 가능한 일이 되는 거다.

“나야. 한국으로 출발하는 가장 빠른 비행 편을 알아봐. 흠,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해. 그런 다음, 두 분을 모시고 와. 인적 사항은 내가 따로 알려 주겠다.”

쥬피터가 아니라 마틴이라도 구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애가 탈 만한 금액인 거다.

리버풀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적극적으로 영입을 노리는 상황이라면?

90억? 챔피언스 리그를 앞두고 골키퍼가 급한 그들이라면 250억 정도까지는 지급할 의향이 있을 거다.

9억과 250억이다.

쥬피터가 박용근과 전은주 앞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환심을 사려고 애쓸 차이 정도였다.

“당연히 퍼스트 클래스로 모셔야지! 정중하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모셔야 하는 분들이다.”

프리미어 승격으로 최소 중계권료 500억을 확보한 쥬피터가 새롭게 발생할 최소 이익 90억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마틴은 자꾸만 올라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피곤한 사람처럼 얼굴을 쓸었다.

그 순간이었다.

“마틴! 피곤할 텐데 내가 전화로 시간을 끌었네. 미안하네. 그런데 Ji가 새로운 주택을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지?”

쥬피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본 마틴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을 게 분명했다.

***

피곤한 이틀이었다.

사람에게 시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깨달은 이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정지우 덕분에 뿌듯한 것도 사실이었다.

변치 않는 제자를 둔 스승이라니!

어딘지 전에 본 무협지 ‘강호유정’에 나오는 스승과 제자 같지 않은가?

박용근은 전은주와 함께 삼삼이네에 들렀다.

치이익!

고기를 뒤집은 박용근이 소주병을 들었다.

전은주 반 잔, 박용근 본인은 한 잔을 가득.

둘이서 잔을 마주 들었다.

“당신, 요 며칠 멋있는 거 알아? 결혼 전보다 더 멋있어.”

박용근이 주변을 둘러보며 ‘누가 듣겠다!’ 하며 웃었다.

“이건 지우를 위해서 하는 건배야.”

“응! 지우의 빠른 회복을 위해서.”

틱!

소주잔을 부딪친 박용근이 훌렁 털어 넣고 나서 놀란 얼굴로 전은주를 보았다.

“그걸 한 번에 마시면 어떻게 해?”

“왜 이러세요? 좀스럽게. 그러지 말고 한 잔 더 줘.”

“안주부터 좀 먹어.”

박용근이 전은주의 앞 접시에 고기를 옮겨 준 직후였다.

띠루루루루! 띠루루루루! 띠루루루루!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또 누구지?”

고기를 입에 넣는 전은주 앞에서 박용근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누구야?”

“국제전환데? 영국이다.”

박용근이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누른 뒤에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감독님, 저 유정호입니다.]

“어! 자네가 어쩐 일이야?”

[유니온 구단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서요. 쥬피터 회장이 지우 모르게 감독님과 사모님을 초대하고 싶답니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궁금한 눈으로 앉아 있는 전은주를 힐끔 본 박용근이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벌써 안내할 직원이 출발했다고 하네요. 내일 오전 인천공항 출발로 예약도 했다고 하구요.]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사흘 전 인터뷰에서 감독님을 언급한 점에 대해 회장이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하네요. 그리고 부상으로 상심해 있는 지우도 위로해 주십사 하구요.]

“지우가 왜? 상심이라니!”

“여보? 지우한테 무슨 일 생겼대?”

전은주가 놀란 눈으로 질문을 던진 앞이었다.

[일단 지우에게 비밀로 하고 오셔서, 경기에 복귀할 때까지 함께 지내 주시면 어떨까 하던데요. 저도 걱정돼서 바로 지우에게 출발합니다.]

영국에 간다고?

박용근은 함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감독님! 어지간하면 출발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지우, 그놈 절대 감독님께 아프다는 말 할 놈 아닙니다. 그런 놈이 구단 회장이 직접 나설 정도로 슬럼프에 빠졌다면…….]

“갈게. 가! 언제 출발해? 누가 연락하는데?”

[사모님과 함께 오시는 것으로 했다니까, 이 전화로 두 분 주민번호와 영문 이름 좀 먼저 보내 주세요. 그리고 영국에 계시는 동안 수입은 이쪽 구단에서 보상해 드리겠답니다.]

“이 사람아! 지금 그게 문제야? 알았어. 바로 문자 넣을게. 내일 아침 출발이라고 했지? 자넨 도착하는 대로 지우 상태부터 알려 줘. 알았어?”

[예, 그렇게 할게요.]

전화가 끝났다.

타들어 가는 고기를 외면한 채 박용근은 지금의 통화 내용을 전은주에게 알려 주었다.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우리 지우, 이제 겨우 좀 올라서려는데.”

“그러니까 내일 출발하자.”

“그래. 얼른 다녀와.”

“당신도 함께 오래. 그렇게 하자. 아무래도 먹는 것도 허술한 거 같고. 지금 얼른 들어가서 이거저거 준비 좀 해서 함께 다녀오자.”

박용근의 말에 전은주가 잠시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알았어, 여보. 그럼 성희네에 꽃집 좀 부탁하고.”

박용근은 문자를 넣었고, 전은주는 꽃집을 부탁하느라 전화번호를 뒤졌다.

애꿎은 삼겹살이 아래쪽부터 새카맣게 튀겨지고 있었다.

***

반나절 만에 뚝딱, 이사가 끝났다.

홈 메이드에게 몇 가지 당부하고, 가구들의 위치를 조금 옮겼으며, 냉장고를 정리하는 데 하루가 없어졌다.

침대에 누운 정지우는 멍청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살다니.

정지우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침실이라도 좀 좁으면 나을 거 같은데?

침대에 앉은 채로 좌우로 돌려 보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인테리어 잡지에나 나옴 직한 침실인데 전에 살던 좁은 아파트 같은 푸근함이 아쉬웠다.

“내가 인간이 좀 허술한가?”

솔직히 이렇게 고급스러운 곳에 있어 본 적은 없는 거다.

“이게 정말 내 능력을 보고 구단에서 준 거라는 거지?”

어쩐지 잠이 들었다가 깨면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더 허름한 곳에서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에이!”

정지우는 침대에서 벗어나 침실을 나왔다.

달칵.

스위치를 당기자 스탠드 3개가 동시에 켜졌다.

외롭다, 더럽게.

“침실을 옛날 아파트처럼 꾸며 달라고 해 볼까? 안에 거실, 화장실, 침실, 주방, 그대로 만들어 달라고?”

크기로 따지면 지금 침실이 좀 더 클 것처럼 보였다.

정지우는 전화기를 들어서 만지다가 내려놓았다.

죄송하다. 이런 집에서 지낸다는 것이. 그것도 혼자서.

두 분이 지내는 그 작은 빌라를 빤히 알면서.

그래서 그런지 더 보고 싶기도 했다.

“후우.”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소파로 움직여 누웠다.

사람 참, 잠이 스르륵 몰려왔다.

띵동! 띵동!

벨 소리에 잠이 깬 정지우는 고개를 들어 몸을 바라보았다.

소파에 누워서 모포를 덮고 자고 있는 모습이라니.

잠결에 침대에서 이불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띵동! 띵동!

벨이 또 울렸다.

정지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움직였다.

집이 크니까 이런 게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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