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안 된 일이네요. (1)
정지우가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 무렵이었다.
저녁을 함께했으면 하는 토미와 샌디, 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들어선 아파트.
정지우는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한국은 지금 새벽 5시쯤이다.
저녁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전화를 하면 딱 맞을 거라서 정지우는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즉석밥, 전은주와 신준석의 큰누나가 싸 준 마른반찬, 그리고 샐러드와 후식으로 먹을 바나나.
전에는 외로웠던 식사였었다.
지금도 홀로 앉아서 창을 바라보며 먹는 이 식사가 외롭긴 하지만… 멀리 있는 몇몇 사람이 그리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두 시간쯤 뒤에 전화할 수 있다는 설렘이 있는 늦은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친 정지우는 오른쪽 다리를 탁자 옆 의자에 걸치고, 오늘 경기를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레믹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어시스트, 꼼빠니의 힐킥 이후로 나온 완벽한 득점, 새롭게 발견한 무둔바의 능력까지.
경기 중에 중요한 장면이나 인상 깊었던 순간을 기억하는 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만약 반즐리가 후반에도 전반과 같이 뛰었다면 경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오른쪽 다리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혼자 두어 시간씩 이러고 있는 것이 어떨 때는 미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에 가 봐야겠는데?’
멍은 그렇다고 쳐도, 시간이 이 정도 지나면 부기가 가라앉아야 하는데 어쩐지 더 팽팽하게 올라온 느낌이었다.
승격을 확보해서인지 모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경기가 끝난 후, 겨우 잠들었던 박용근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전은주와 함께 아침을 준비했다.
얼른 아침을 먹고, 꽃집에 나가기 전에 인터넷 기사를 검색할 생각에 두 사람은 마음 한편이 들떠 있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여보? 지우인가 봐?”
오전 6시 30분쯤이었다.
벨이 울리자 전은주가 기대에 찬 시선을 던졌고, 박용근이 얼른 달려가 전화기를 들었다.
“왜? 왜 그래?”
“기자 전화인데?”
“기자?”
박용근은 잠시 전화기에 올라온 번호를 바라보았다.
정지우가 소속된 팀이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확정 지었으니, 또 이런저런 이유로 기사 하나쯤 원하는 걸 거다.
망설이는 동안 벨이 멈췄다.
“얼른 와.”
전은주가 국그릇을 놓으며 부르는 소리에 박용근은 식탁에 앉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런데 벨이 바로 또 울렸다.
이게 정지우가 전화할지 몰라서 꺼 놓기도 그렇다. 게다가 확인 안 할 수도 없는 거다.
먼저 전화하면 어떠냐고? 승격을 확정 지은 날, 선수들끼리, 아니면 구단 관계자들과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대고 전화해서 곤란하게 하라고?
번호를 확인한 박용근이 ‘김 감독인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박 감독! 너 어떻게 된 거야?]
새벽에 전화해서 이게 뭐라는 거지?
혹시 지난번에 기자들에게 고개 숙인 걸 이용해 정지우에게 불똥이 튈 만한 기사라도 만들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가?”
박용근의 음성을 들은 전은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지우 소속팀에서 우리나라에 축구 교실 만든다는데, 그 책임자로 너를 선임한다고 발표했어. 거기 회장 인터뷰 동영상까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데, 아예 박용근이라고 말을 하더구만! 알고 있었어?]
“뭐?”
[모르고 있었던 거야? 야! 지우 그놈, 박 감독이 축구 교실 못 나간다는 걸 알더니 그렇게까지 해 버렸네! 박 감독, 난 정말 네가 부럽다. 진짜 부러워.]
박용근은 멍해서 답도 하지 못했다.
[그래! 그런 제자 하나 키워 낸 거로 넌 축구판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걸 얻은 거다. 하아! 얼른 인터넷 검색 좀 해 봐. 새벽부터 기자들이 날 들들 볶는다.]
“그래. 고마워.”
[부럽다아-!]
마지막 말 ‘부럽다!’의 끝에 ‘하아!’ 하는 탄식이 달린 것 같은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닌 거다.
박용근은 벌떡 일어나서 옷 방으로 움직였다.
“여보? 무슨 일이야?”
“그게, 일단 인터넷 기사부터 보자.”
독촉할 만도 하련만, 박용근을 익히 아는 전은주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컴퓨터가 켜지길 기다렸다.
분명 기사와 관련된 일일 거다.
박용근이 이렇게 당황하고, 무거운 얼굴을 한 채로 컴퓨터를 켜는 것은.
낡은 컴퓨터가 최선을 다해 화면을 올렸다.
딸각딸각! 딸각! 딸각!
포털 사이트를 띄운 박용근이 다시 스포츠를 찾았고, 다음으로 축구 관련 기사를 올렸다.
제목이 주르륵…….
“어머?”
박용근의 고개가 모니터를 향해 불쑥 나아갈 때, 전은주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유니온 시티, 한국에 축구 교실 짓는다.>
<유니온 시티, 승격의 기쁨을 한국과 함께!>
<박용근 감독, 유니온 시티의 한국 축구 교실 맡는다.>
머리기사에서 정지우와 유니온 시티의 승격 소식은 뒤로 밀려 있었다. 그리고 얼핏 봐도 서너 개의 기사 제목에 ‘박용근’의 이름이 뚜렷하게 올라와 있었다.
물론 그 아래로,
‘정지우, 유니온 시티를 프리미어리그로 이끌다.’
‘정지우가 만들어 낸 동양인 골키퍼의 새로운 기록들.’
이란 제목의 기사들이 정지우의 사진과 함께 주르륵 달렸는데, 그중 하나가 유독 박용근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승리의 파랑새 정지우, 무실점 활약에 가치를 더했다.>
기사 아래로 정지우가 하늘을 바라보며 양손 검지를 들고 있는 사진이 멋지게 담겨 있었다.
“장진모 기자?”
“당신이 아는 기자야?”
박용근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기사를 하나씩 검색했다.
지금 두 사람에게 식탁에서 기다릴 밥과 국은 안중에 없었다.
딸각.
쥬피터의 기사마다 그의 말을 영문 그대로 올려놓고 번역해 놓았거나, 아니면 아예 동영상에서 그 부분을 잘라 올려놓았다.
“세상에……?”
전은주가 멍한 얼굴로 박용근을 보았다.
“나 이거 안 한다.”
다짐하듯, 욕심 부리지 말라는 듯 대뜸 건너온 박용근의 말이었다.
“그래. 당신 좋은 대로 해.”
“서운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안 서운해요. 그냥 지우가 이렇게까지 마음 써 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푸흐흐!”
박용근은 전은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고 다독였다.
이런 제자를 키워 낸 남편이라면 하루쯤 멋있어 보여도 되는 거다.
밤 10시 30분이었다.
정지우는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제법 울린 다음이었다.
[여보세요?]
“감독님, 저 지우예요.”
[그래! 승격 축하한다. 다친 곳은?]
“부기가 안 빠져서 내일 병원에 가 보려고요.”
[그걸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뭐가 있어? 지금이라도 가야지. 거기 지금 몇 시냐?]
“밤 10시 30분입니다.”
[갈 만한 병원이 없는 거냐? 그런 거면 팀에 연락이라도 해서 도움을 청해 봐야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요. 봐서 상태가 영 안 좋으면 늦더라도 꼭 갈게요.”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제 유니온 시티 구단주가 축구 교실 만들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여긴 지금 난리다. 혹시 관두란 말 안 했던 거냐?]
“예?”
[너도 몰랐구나. 구단주가 승격 후 인터뷰에서 한국에 축구 교실 만들겠다는 것과 나를 책임자로 하겠다는 말을 해 버려서, 그게 승격 기사보다 더 난리다.]
“그게, 어차피 계약서 조항이라 정식 계약 하기 전에 따로 말할 생각이었거든요. 승격도 결정되기 전에 말하기가 곤란해서요. 그걸 어제 발표했어요?”
[난리다, 난리.]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내일 알아봐도 되지만, 당장 박용근이 기자들에게 시달릴 일이 걱정되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많이 곤란해지시면 어떡하죠?”
[푸흐흐! 살면서 이런 날도 좀 있어야지.]
걱정했던 것보다 박용근은 넉넉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만’ 한 다음, 전은주를 바꿔 주었다.
[지우야? 괜찮아? 다친 곳 병원에 가야 하는 거면 서둘러.]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 때문에 감독님 곤란해지신 거면 사모님까지 불편해지실 텐데 죄송해요.]
“아니야. 아! 승격 축하해.”
[감사합니다.]
30분쯤 통화했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경기 결과를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조동익은 뒷목을 부여잡은 자세로 연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러다가 내가 혈압으로 죽지.’
전에도 그랬지만, 최근에 한승관이 내세운 대책이라는 걸 믿었다가 당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색이 기술 분석관이라는 인간이다.
그런데 상대 팀에 대한 분석이라고 올리는 보고서를 볼라 치면, 인터넷에 올린 축구 팬의 블로그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막말로 소설 수준이어서, 대책이라고 내놓은 걸 보면 기가 찰 때가 많았다.
그따위 보고서 쓰는 데 필요한 출장비 목록은 또 기가 막힐 정도로 꼼꼼하고 짜임새 있게 올라온다.
왕복 비행기 표, 호텔에서의 숙박비, 식비, 자료 조사비.
다 좋다. 마일리지 팡팡 쌓아서 항공권 값 좀 챙기는 거? 그거 이해할 만하다.
특급 호텔 어쩌고 한 뒤에 그보다 떨어지는 데 묵고, 잔돈으로 회포 푸는 거?
뭔 놈의 식대가 한 10명쯤이 죽을 만큼 처먹은 비용이 나오는 거?
그래! 외국 나가서 술 한잔하다 보면 기분 내다가 그럴 수 있다고 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이해해 주는 대신에,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는 게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흐이그!”
조동익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답답한 속을 탄식에 담아 쏟아 냈다.
아침부터 기자들의 면담 요청이 물밀듯 쏟아지고 있었다.
일단 막아 버리긴 했는데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한승관을 또 불러 봐야 엉뚱한 소리를 지껄일 거고, 그런 다음 이보다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거였다.
아니! 그보다는 당장 그 인간의 면상을 보는 것 자체가 싫어서 부르지 않았다.
“사람이 필요해! 사람이!”
조동익은 날카롭게 유리창 바깥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좀 똑똑하면서 충성심 강하고, 욕심 부리지 않으면서 협회 일에 최선을 다할 인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그깟 출장비?
얼마든지 지불해 줄 거다.
“후우!”
어쩌다가 좀 똑똑한 놈을 불러들이면 누구나 ‘한승관을 우선 바꿔라.’에서 시작해, 조직의 사람들을 모조리 교체하려고 든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말 듣는 놈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조리 사라지게 되지 않겠나.
흥! 어떻게 지켜 낸 자리인데?
제 놈들 말대로 다 하면 출장비는 누가 넉넉하게 챙겨 줄 건데? 영수증 처리대로 하고, 선수 선발도 너희 마음대로 하게 했다가 뒷방 늙은이가 돼 버리면 누가 날 챙겨 줄 건데?
조동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련하고, 둔하고, 못났지만, 그래도 한승관만 한 놈도 없는 거다. 아랫사람은 머리 쓰는 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놈이 최고인 거지, 공연히 똑똑하고 이름값 있는 놈은 절대 근처에 두면 안 되는 거다.
어쩌겠나?
한승관이 저렇게 덜떨어졌으니 윗사람인 조동익이 좀 더 고생하는 수밖에.
조동익은 인터폰에 손을 올렸다.
달칵.
[네, 부회장님.]
“기자들 말이야. 이따가 열 시 반쯤에 한꺼번에 만날 수 있도록 시간을 잡아.”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흠, 옆 회의실로 하지. 일단 출입 기자들에게 먼저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그리고 회견 끝나면 식사할 수 있게 은성복집 예약 좀 해 놓고.”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조동익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당장은 은성복집의 그 예쁜 매니저가 고맙다며 웃어 줄 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
이충도는 자신의 집 거실에서 불편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모로 앉은 아들 이진용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럼 저 영국 진출하는 건 날아간 건가요?”
“날아가긴 어딜 날아가?”
“유니온 시티에서 저 스카우트하는 거 거절했다면서요? 거기에 어제 발표한 거 보면…….”
이충도의 시선을 느낀 이진용이 입을 다물었다.
“쯧!”
혀를 찬 이충도는 테이블 옆에 놓은 전화기로 시선을 주었다.
‘조금만 나를 닮았어도.’
이진용은 머리가 영악하지 못했다.
없이 사는 정지우란 놈을 좀 봐라.
기회를 잡으니까 악착같이 언론에 이름을 날리려 발악을 해 대고, 그래서 결국 원하는 대로 이름값을 높이고 있지 않은가.
부동산으로 성공한 삶에서 이진용은 이충도의 자랑이었다.
그런 아들의 앞길을 근본도 모르는 정지우란 놈이 꺾고 나섰다. 그 빌어먹을 전국대회 결승에서. 하필이면 포지션도 그렇게 겹치는지.
이충도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이진용을 힐끔 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세상을 살다 보면 반드시 경쟁자나 라이벌이 나타나는 거야. 아버지를 봐. 지금껏 분양 사업에서 그렇게 달려들던 놈들 다 제치고 이 자리에 왔잖아.”
“예.”
“그깟 놈 그냥 밟아 주면 된다. 놈이 우리나라에서 안 된다는 걸 아니까 자꾸 저렇게 밖에서 설치나 본데……!”
“방법이 있으세요?”
“만들어야지! 한국 축구를 버린 놈이, 우리 축구를 위해 애쓰고 희생한 너보다 대우받아서야 되겠냐?”
“그게 제일 억울해요.”
이충도는 ‘그렇게 억울하면 그놈보다 좀 잘하지!’ 하는 말을 꿀꺽 삼키며 다시 전화기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