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13년이다! 13년! (2)
남은 시간은 유니온 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보다 감질나게 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다.
그런 거 있잖은가?
쉽게 주는 게 아니라 ‘조금만 기다려 봐, 조금만 더.’ 하며 시간을 끌면 더 애간장이 타는 거.
심지어 정지우는 제대로 공 한번 못 만져 볼 정도로 일방적인 경기여서, 유니온 시티나 반즐리 모두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며 시간을 견뎠다.
두 번쯤 반즐리의 역습이 있었는데, 라파엘과 무둔바의 조합이 의외로 잘 맞아서 무난하게 막아 냈다.
경기 종료가 가까워지자 관중들이 두 손을 입에 대고 휘슬 소리와 비슷한 휘파람을 불어 댔다.
모두가 기다리는 종료를 향해 시간이 좀 더 흐른 다음이었다. 데이빗과 카알, 라파엘이 공을 천천히 돌리는 순간,
삐이익! 삐익! 삐이이익!
“이예에에에에에에!”
유니온 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확정 짓는 주심의 휘슬이 기다랗게 울렸다.
미친 사람들처럼 열광하는 관중들을 배경으로,
“이호- 오!”
“예에!”
벤치에 있던 스태프와 선수들이 달려 나오고, 그라운드에 있던 선수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정지우는 하늘을 향해 세 번 검지를 치켜들었다.
‘보이셨으면 좋겠어요. 축구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을 내렸을 때 데이빗과 라파엘, 카알, 그리고 레믹이 달려오고 있었다.
박용근에게서 들었다.
세 번 하늘을 가리키는 의미를.
그리고 말을 들었을 때는 쑥스럽고 부끄러울 것 같았다.
존중의 의미일 거다.
고마움의 표시일 거고.
어머니를 떠올릴 저 순간에 함께 생각해 준다는 게 고마워서 전은주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데이지는 복도를 걷던 중에 병원 전체를 가볍게 울리는 함성을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질문을 던지자, 중앙 카운터에 있던 간호원이 ‘유니온 시티가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확정 지었어.’라는 답을 전해 주었다.
‘릴리가 좋아하겠네.’
내일까지 밖에 있다가 다시 병원으로 와야 하는 릴리다.
오늘 이 경기도 보러 가고 싶다고 많이 졸랐지만, 체온이 높아져서 허락할 수가 없었다.
가운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데이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복도를 걸었다.
“예에.”
아는 스태프 한 명이 주먹을 불끈 쥐며 조용하게 건네는 환호에 눈인사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왜 저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축구? 그거 정말 짜릿한 맛이 있는 경기였던 거다.
특히 골키퍼가 멋있는, 그런 종목?
힘차게 정지우를 안은 데이빗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멋졌어! 오늘 정말 훌륭했어!”
정지우가 선방을 펼칠 기회가 없었으니, 이건 아마 선수들 전체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일 거였다.
“헤이!”
레믹과 손을 마주치고 오른쪽 가슴을 부딪쳤고,
“컴온!”
카알, 라파엘과도 비슷한 자세를 취한 후 등을 두드려 주었다.
“무둔바! 마지막 두 번의 수비 정말 멋졌어!”
정지우는 무둔바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잡은 후 등을 두드렸다. 187의 정지우보다 10센티미터나 더 큰 무둔바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정지우는 천천히 걸어서 벤치로 다가갔다.
“헤이! Ji!”
마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멋진 경기였다.”
“전술이 좋았던 덕분이죠!”
처음으로 마틴과 오른손을 붙잡고 등을 두드렸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짧게나마 승격의 기쁨을 나눈 선수들이 머리에 손을 들고 관중들을 향해 손뼉을 쳤다.
세이프 가드들이 관중석을 향해 촘촘히 서 있지 않았다면 오늘은 분명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었을 거다.
믹스트존의 분위기는 이전과 확실하게 달랐다.
감독과 주장이 따로 기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정말 관심 가는 선수에게 한두 개 정도의 질문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오늘은 거의 모든 선수가 제법 많은 질문을 소화해야 했다. 주인공은 물론 레믹이었다.
정지우도 당연하게 믹스트존에 섰다.
“동양인 최초라는 기록을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어때요? 동양인 최초 프리미어리그 선발 골키퍼가 될 자신은 있습니까?”
“지켜봐야죠.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평소라면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만 보았을 한국 기자 3명이 믹스트존 앞에서 질문과 답을 받아 적고 있었다.
“Ji는 이미 유니온 시티와 계약에 합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하는 감회나 각오? 그런 것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영국 리그에서 뛰는 것은 내게 늘 환상적인 일입니다. 좋은 환경, 훌륭한 코치와 동료, 그리고 스태프, 열성적인 응원을 주는 홈 관중까지. 앞으로도 이곳에서 많은 승리를 함께하고 싶습니다.”
교과서 같은 답이었다.
영국 기자들이 ‘고마워요, Ji. FA컵에서도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을 들으며 정지우가 몸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정지우.”
한국인 기자 한 명이 빠르게 정지우를 불렀다.
믹스트존이다. 기자가 이곳에서 질문을 던진다면 선수는 최선을 다해 협조할 의무가 있다.
정지우가 한 걸음 옆으로 걸은 뒤에 시선을 주자 기자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마 무시하고 그냥 걸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늦은 시간에도 이 경기를 지켜본 축구 팬들이 많아. 먼저 간단하게 소감 한마디만.”
“시청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응원해 주신 팬들께 감사드립니다.”
답을 받아 적던 기자가 ‘뭐야? 그게 전부야?’ 하는 것처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승격되고 지금처럼 선발로 나서면 동양인 최초 프리미어리그 선발 골키퍼가 되는데, 그에 대한 느낌이나 각오는?”
이건 분명 앞에서 받았던 질문과 같은 거다.
그러나 이왕 질문을 받은 건데 굳이 피할 것도 없어서 정지우는 이전과 비슷하게 답을 했다.
“그런 거 말고, 대한민국 선수로 느끼는 거 말이야.”
정지우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 2부 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올라가 포지션인 골키퍼를 하는 거다. 국가 대항전도 아닌데 여기서 왜 대한민국이 나오는 거지?
“한국의 선수로 자부심을 가지고 임한다거나, 축구 팬들의 성원 덕분이라는 그런 거 있잖아!”
정지우의 반응이 답답해서 커다란 힌트를 넘겨주는 것처럼 기자가 빠르게 말을 전해 주었다.
굳이 정답을 원할 거면 뭐하러 인터뷰를 할까?
그러나 어차피 마주 선 참이고, 한국에 있을 박용근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응원해 준 한국 팬들 덕분입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기자가 고개를 짧게 흔들며 답을 받아 적었다.
“국가대표는? 지난번에 대표를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혹시 부름을 받는다면 다시 생각할 의향은 있어?”
정지우는 그냥 웃고 말았다.
“있어? 없어?”
“없습니다.”
“왜?”
이런 기자들과 질문을 더 주고받을 생각도 없었다.
정지우는 ‘고맙습니다.’ 하고 몸을 돌렸다.
“야! 정지우!”
그때 기자가 정지우의 팔을 잡았다.
여기저기에서 놀란 시선이 날아왔고, 곧바로 유니온 시티의 스태프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기자입니까?”
“예? 예.”
“그런데 왜 선수의 몸에 손을 댑니까? 출입 기자증 보여 주세요.”
그사이 보안 요원 2명도 다가와 한국 기자 3명을 둘러쌌다. 내내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던 기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인사를 하다가 오해가 있었어요. 이쯤에서 조용하게 끝냈으면 싶은데요.”
정지우의 말에 스태프가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물러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한국 기자들을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내면서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정지우는 몸을 돌려 터널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뒤에서 무언가 듣기 불편한 소리가 날아들었을 텐데, 오늘은 그런 일이 없어서 좋았다.
라커룸에 들어선 정지우는 먼저 들어와 있던 선수들과 다시 손을 마주 잡으며 승격의 기쁨을 나눴다.
아스널전이 없었다면 이런 날에도 조용하게 집으로 향했을지 모른다.
인터뷰 시간이 길었던 레믹과 데이빗이 들어오면서 라커룸이 좀 더 소란스러워졌는데 정말이지 나쁘지 않았다.
쥬피터는 방송 카메라 앞에서 의연한 태도로 기자들을 상대했다.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나는 오늘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확보한 우리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 그리고 홈 관중들께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그의 태도에 여유가 한껏 묻어났다.
“Ji와 계약했습니다. Ji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치 정지우에 대한 질문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쥬피터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는 확실한 우리 유니온 시티의 선수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 팀에서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최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며.”
쥬피터는 방송 카메라를 신경 쓰며 정지우에 대한 권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또한 유니온 시티 구단은 정지우 선수의 공헌에 감사하는 의미로 한국에 축구 교실을 설립할 예정이며, 설립과 운영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전액 부담할 것입니다.”
기자들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국에 축구 교실을 설립한다는 게 확정된 사실입니까?”
“이미 한국의 협회에 공문을 보내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축구 교실을 정지우를 길러 낸 그의 탁월한 지도자, 박용근 감독에게 맡길 계획까지 완벽하게 세워 두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정지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서인지 쥬피터는 만족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샤워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은 다음이었다.
저녁을 함께 먹자는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한 정지우는 집으로 향하기 위해 레드 블레이트를 나섰다.
평소보다 한 시간쯤 더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정지우는 집으로 향하지 못했다.
경기 시작 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많은 관중이 통로 앞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Ji! Ji!”
역시 바리케이드에 팔을 걸친 빌이 가장 먼저 정지우를 불렀다.
정지우가 웃으며 다가가자 빌이 주먹을 내밀었다.
“오늘 멋진 경기였어.”
“고마워.”
툭 하고 그의 주먹을 마주쳐 준 정지우가 그의 부모, 토미와 샌디에게 인사를 나눈 다음이었다.
“Ji! 내가 다니는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왔어.”
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축구팀?”
“응, 축구팀.”
혹시 친구들 앞에서 정지우가 불편한 얼굴을 할까 봐 염려된 모양이었다.
“어디 있는데?”
빌이 답을 대신해 돌아보자, 빌보다는 덩치가 조금 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반가워. 빌의 친구라면 내 친구도 되는 거니까.”
“미스터 어메이징, 당신은 우리의 영웅이에요.”
“영광인데? 고마워.”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들의 눈과 얼굴에 떠오른 기쁨을 박용근과 전은주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차를 가져왔으니까 오늘은 함께 가자고. 버스를 타려면 많이 기다려야 할 거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염려하지 마. Ji가 우리에게 준 커다란 선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토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정지우는 사인지에 일일이 사인을 했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유니온 시티는 철강 노동자의 도시다.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와 준 그들이 아직 부끄러움을 털어 내지 못한 아이들을 데리고 기다릴 때의 심정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름이 뭐야?”
“짐이요.”
“반가워, 짐. 앞으로도 응원해 줄 거지?”
“물론이에요, 미스터 어메이징.”
이런 대화를 나누며 사인을 해 주고, 그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어 줄 때 아버지들의 표정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절대로 이런 시간을 외면하지 못할 거다.
“정말 고마워, Ji. 당신이 브리스톨만 가지 않는다면, 그 어떤 팀에 있든 난 영원히 당신을 응원할 거야.”
“꼭 기억할게요.”
아이의 아버지와는 대개 이런 대화를 나눈 다음 커다랗게 허그를 했다. 땀 냄새가 풍길 때도 많았지만, 저들이 흘린 저 땀의 대가로 유니온 시티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한 시간이 또 훌쩍 지나갔다.
특이하게 그동안 유니온 시티 스태프 2명이 지키듯이 계속 뒤에 서 있었는데, 리그 승격을 이룬 날이고 아까 기자들과의 일이 있어서 그런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오른쪽 정강이에 은은한 통증이 올라올 때쯤 사인이 대충 끝났다. 정지우는 그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려 준 토미와 샌디, 빌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