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77화 (77/262)

제3장. 13년이다! 13년! (1)

움츠린 반즐리의 골키퍼 아담, 놀란 얼굴로 흘러간 공을 따라 몸을 돌리는 수비수들,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레믹과 맥슨.

“우와아- 아!”

귀청을 찢을 것처럼 터지는 함성 속에서 펼쳐진 장면이었다.

공은 먼저 달려든 레믹의 바로 앞을 구르고 있었다.

완벽하게 골키퍼와 일대일로 마주 선 상황에서 그를 향해 수비수들이 달려들었다.

“오! 마이 갓!”

마틴뿐만이 아니라 그 장면을 지켜본 거의 모든 이들이 비슷한 비명을 질렀다.

완벽한 슈팅 찬스였다.

심지어 반즐리의 골키퍼 아담이 레믹의 오른발에 따라 몸을 왼편으로 기울였을 만큼.

정지우 역시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레믹은 공을 훌쩍 지나쳤다.

저 단순하고 이기적이며, 촐싹거리는 놈이 골키퍼와 일대일의 상황에서 공을 그냥 지나쳤다는 거다.

소름이 온몸에 쫙 돋을 만큼 놀랍고 환상적인 플레이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공은 맥슨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투욱!

이미 왼쪽으로 몸이 기운 골키퍼 아담의 오른편을 향해 맥슨이 가볍게 공을 차 넣었고,

출렁!

반즐리의 골대 그물을 멋지게 흔들었다.

“이예에에에에에에!”

맥슨이 20년쯤 찾아 헤매던 연인을 발견한 놈처럼 레믹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한 골인 거다. 리그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골.

그러나 레믹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통해 만들어진 이번 골은, 프리미어리그로 향하는 계단에 한 발을 올려놓는 의미라는 점에서 이전의 골과는 확연하게 다른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선수들이 모두 달려가 레믹과 맥슨을 끌어안는 동안, 마틴은 양 주먹을 허공에 들고 포효했다.

어머니와 감독님, 사모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하는 세레머니였다. 그래서 정지우는 이 순간만큼이라도 진지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레믹의 저 멋지고 헌신적인 플레이를 본 이후로 자꾸만 웃음이 멈추질 않아서, 정지우는 결국 웃는 얼굴로 양손 검지를 들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보이시죠? 저 이제 웃을 일도 생겼어요. 감독님께 전화드리면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지우가 하늘을 향해 검지를 치켜든 장면이 화면에 가득 떠올랐다.

전은주는 걱정을 잠시 접어 두고 입 앞에 모은 손으로 물개 박수를 계속 쳤다.

팀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정지우가 있다는 것쯤 전은주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바라는 거?

아니! 정말이지 사심이라고는 단 한 조각도 없다.

그저 이렇게 연락하고, 안부 전하고, 그리고 정지우가 다치지 않고 높이 높이 올라가는 거?

그것 하나면 된다.

‘잘했어! 정말 멋있어, 지우야!’

정지우의 모습과 그의 경기를 지켜본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정지우가 웃는 얼굴로 하는 세레머니를 보는 것이 전은주는 정말 정말 행복했다.

“후와! 후! 후하하하! 승격이다! 승격! 형!”

장진모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킨 자세로 부장을 돌아보았다.

“야! 골은 11번 선수가 넣었어.”

“아이, 거! 형은 다 좋은데 감정이 너무 말랐어! 이거 정지우가 넣은 거랑 다를 바 없는 거잖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이제 원고 초고라도 다듬으시는 게 어때? 경기 끝나면 여기저기서 기사 올라올 텐데, 그 전에 화면 캡처도 좀 해야지.”

“어? 그런가?”

장진모가 시계를 돌아보고는 아쉬운 얼굴로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정지우! 프리미어로 팀을 이끌다. 제목 어때요?”

“아이구! 무슨 신파극 찍냐?”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럼 뭐가 좋지?”

장진모가 진지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열광하는 관중들과 그라운드 중앙으로 걷는 선수들이 멀리서 잡은 카메라에 함께 담겨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장진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기사 쓰러 가요.”

“제목은?”

“나중에 기사로 보세요.”

장진모가 테이블을 피해 옆으로 걸은 다음, 곧장 부장실을 나섰다.

선수들이 중앙선에 나뉘어 섰을 때 반즐리는 완전히 기가 꺾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한 골을 먹었다면 오히려 더 악착같이 달려들었을 텐데, 전혀 뜻밖의 전방 압박을 통한 환상적인 골이 터지자 사기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확실히 레믹의 플레이는 너희와 우리의 실력 차이가 이 정도라는 걸 가르쳐 준 느낌도 있었다. 다른 동료들이 골을 넣은 맥슨보다 레믹의 등과 머리를 더 두드려 준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거였다.

주심이 휘슬을 입에 무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승리를 이루었을 때, 관중들이 인정할 만한 최고의 경기를 했을 때 들려주는 응원가가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웠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블레이트가 사이좋게 지냈지!”

프리미어리그 승격으로 한발 다가간 골, 그것도 리그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환상적인 호흡으로 뽑아낸 골.

그것에 흥분한 관중들이 미칠 듯한 감동을 주체할 길이 없어 불러 대는 승리의 응원가였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자 9번 샘이 툭 하고 공을 패스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가 시합에 나가면 블레이트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거친 노동으로 살아가는 홈 관중들이 13년 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뿜어내는 함성이 유니온 시티의 선수와 스태프들에게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열광의 도가니라는 상투적인 표현 말고는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공은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쉽게 넘어오지 못했다.

전반과 전혀 다르게 일제히 밀고 올라가 거칠게 달려드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반응에, 반즐리 선수들이 허둥대며 길을 뚫지 못한 탓이었다.

터더덕!

공을 잡은 반즐리의 7번 조쉬에게 포그이와 꼼빠니가 달려들었고, 세 선수의 틈에서 튕긴 공이 옆으로 흘러나왔다.

강력한 압박의 효과였다.

투욱!

근처를 지키던 포그이가 공을 뒤로 밀었고, 데이빗이 받는 순간 앞으로 쭉 밀어 주었다.

“우와- 아!”

레믹이 완전히 물 만난 고기처럼 반즐리 수비수 사이를 헤치고 뛰어나갔다. 전반을 설렁설렁 뛰어서 체력이 비축된 그를 이미 힘을 거의 다 쓴 반즐리 수비수들이 제대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골키퍼 아담이 뛰어나오는 것을 본 레믹이 여유 있게 툭 하고 공을 띄웠다.

툭! 툭툭!

커다란 곡선을 그린 공이 세 번쯤 튕긴 후에 골대로 들어갔다.

“이예에에에에에에!”

첫 골이 터진 지 5분 만에 추가 골이 터졌다.

비기기만 해도 승격을 확보하는 유니온 시티에게 이 골은 승격을 담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양손을 허리에 얹고 고개를 떨군 반즐리 선수들 저 너머에서 허공에 높다랗게 떠오른 레믹이 구부린 오른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이예에에에에에!”

간혹 미친 사람처럼 ‘이야호!’ 하거나 전혀 이해하기 어려운 ‘이히익!’ 따위의 비명 같은 고함이 들리기는 했는데, 아무튼 그라운드를 가득 메운 함성은 멈출 줄을 몰랐다.

늘 점잖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던 쥬피터 회장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는 상황이니 관중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는 남자들, 연인, 빌 또래의 아이와 눈을 마주하고 두 주먹을 부르르 떨어 대는 아버지까지!

마틴은 팀 스크립터 클락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이런 순간의 감동과 환희를 어느 곳에서 느낄 수 있을까?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그라운드에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거센 응원가를 부를 이 한순간을 위해 유니온 시티 관중들은 무려 13년을 기다려 주었다.

13년이다! 13년!

10살짜리 어린아이가 23살의 청년이 된 나이, 37살의 그의 아버지가 50의 나이가 되는 세월을 기다려 왔던 승격이 바로 두 번째 골을 타고 바로 코앞에서 어른대고 있었다.

정지우는 레믹을 보며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기복, 기복, 저렇게 기복 심한 스트라이커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레믹은 종잡기 어려운 선수였다.

욕심 가득해서 혼자 설치고 다니다가도 조금만 긁어 주면 상상도 못할 플레이를 펼쳐 내는 놈이라니.

중앙선에 선수들이 모이는 동안 귀가 얼얼한 응원가가 계속 울려 나오고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 빌과 그의 부모가 있을 거고, 릴리와 그의 엄마가 TV를 보며 기뻐하고 있을 거였다.

오른쪽 정강이가 조금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정지우는 골대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이런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아마 피가 타는 것 같았을 거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어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주장 데이빗이 라인을 조절하는 앞으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힐끔.

무둔바가 ‘저놈은 정체가 뭔가?’ 하는 눈으로 정지우를 힐끔거릴 때였다.

“우와아- 아!”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맥슨이었다. 공을 가로챈 그가 반즐리의 왼쪽을 무섭게 치고 들었다.

그의 오른쪽으로 레믹과 포그이, 꼼빠니가 동일 선상에서 뛰고 있었는데, 반즐리 선수들이 그 셋을 상대로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댔다.

퍼어엉!

골라인 근처까지 달려간 맥슨이 골대 앞으로 높다랗게 공을 띄웠다.

휘이이익!

선수들이 뒤엉킨 틈에서 몸을 띄운 건 놀랍게도 카알이었다. 그는 탄력을 이용해 높다랗게 몸을 띄웠는데, 뒤늦게 뛰어든 탓에 전혀 방해조차 받지 않아서 다른 선수들보다 머리 3개는 위에 있었다.

터엉!

카알이 머리로 공을 밀었다.

“이예에에에에에!”

또다시 골이 터졌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사람들처럼 날뛰는 홈 관중들 앞에서, 골키퍼 아담이 벌떡 일어나 공을 세차게 차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솔직히 골은 됐지만, 잘못 맞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헤더였다. 반대쪽 코너를 노렸어야 할 공이 골키퍼 아담의 바로 앞에서 한 번 튀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아담이 미리 판단하지만 않았다면, 발만 뻗었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헤더였다.

그러나 아담은 위로 날아올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공이 튀는 순간에 분명 한 번 주춤했다. 그리고 그 짧은 망설임 탓에 뒤늦게 몸을 날린 아담의 겨드랑이 밑을 스치고 공이 골대로 들어간 거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3 대 0이었다.

정지우가 남은 시간 동안 세 골을 먹어도 유니온 시티는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한다는 의미였다.

스코어를 띄운 레드 블레이트의 스코어 보드가 ‘이제 너희 프리미어리그로 가!’ 하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축구에 기권패라는 제도가 있다면 반즐리는 분명 타월을 던졌을 게 분명했다.

삐이이익!

주심의 휘슬을 원망하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반즐리의 선수들이 공을 뒤로 돌렸다.

이 정도 되면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미안해서 주춤거릴 것 같은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헉헉거리면서 따라오지 못하는 상대 선수를 제칠 때 희열을 느끼고,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을 때의 묘한 쾌감이 선수들을 지배한다.

게다가 동료의 실수를 곧바로 보완해 주는 멋진 플레이는 물론이고, 평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플레이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툭!

오른쪽을 파고든 꼼빠니가 발뒤꿈치로 기가 막힌 패스를 뒤로 보내 주었다.

“우와아아!”

뒤따르던 포그이가 한 번 툭 차는 동작으로 골대를 향해 선 다음, 달려드는 반즐리의 수비수들 사이로 공을 차 주었다.

이런 약속을 한 적도 없었고, 솔직히 이런 멋진 패스를 준비할 수준의 팀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투우욱!

“이예에에에에에!”

이제는 강하게 슛을 하는 선수가 촌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골을 넣은 레믹이 오른손 검지로 포그이를 가리키며 달려가 웃으며 그의 머리를 감쌌다.

그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였는데, 4 대 0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스코어이기도 했다.

전반 내내 그토록 악착같이 뛰던 반즐리 선수들은 고개를 떨군 채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골키퍼인 아담이 아무리 두 팔을 아래로 뻗치며 고함을 질러도 그들의 고개는 들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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