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다들 가자! (1)
반즐리 FC와의 경기는 영국 시간으로 오후 3시여서 한국으로 따지면 그날 자정 무렵이었다.
그래서 경기장으로 출발하기 전 정지우가 전화를 걸었을 때, 부천은 저녁 9시쯤이었다.
박용근은 거실에 앉아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이틀 간격이다. 부상 특별히 조심해라.”
[예, 감독님.]
“오늘 비기기만 해도 승격이지?”
[예.]
“그래. 이따가 경기 보면서 응원하마.”
혹시나 이곳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경기에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용근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경기를 코앞에 둔 제자다. 박용근은 전화를 빨리 끊어 줄 생각이었다.
[저기, 감독님.]
그런데 어딘지 어색한 정지우의 음성이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부탁할 게 있나? 아니면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겼나?
박용근이 수화기에 집중할 때였다.
[혹시 오늘 승격하면 하늘을 세 번 바라볼게요. 어머니와 감독님, 사모님을 위해서요. 축구 선수로 뽑아 주신 거… 감사드립니다.]
말을 듣는 순간, 박용근은 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왜 그런지,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던 때가 떠올랐는데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쓸데없는 거 신경 쓰지 말고…….”
박용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에 말을 이었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예. 경기 끝나고 내일 아침 시간에 전화드릴게요.]
“그래.”
박용근은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 좀 바꿔 주지? 당신 왜 그래? 지우 어디 아프대?”
전은주의 질문을 받으며 박용근은 창밖을 향해 눈만 끔벅거렸다.
***
선수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레드 블레이트를 가득 메운 홈 관중들은 열정적인 응원을 펼쳐 대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펄쩍펄쩍 뛰며 단순한 리듬으로 지르는 응원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 같다.
그러나 2만 5천 몇백 명을 수용하는 레드 블레이트에서 반즐리 FC 원정 응원단 천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2만 4천여 명의 관중이 지르는 함성이라는 것을 알면, 그리고 그 함성을 현장에서 들으면 절로 고개가 저어지게 된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그라운드에 작은 메아리를 만들 정도의 함성, 거기에 제자리를 뛰는 응원단의 모습은 마치 거세게 출렁이는 물결처럼 보인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고함을 지르는 관중들을 보고 있노라면, 홈팀 선수들마저 ‘게임에 지면 큰일 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 원정팀 선수들은 어떻겠나?
한마디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응원이란 말이 절대 과장이 아닌 거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섰다.
“우와아- 아!”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함성이 먼저 터졌고, 이어서 관중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정지우는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골대 앞으로 움직였다.
얀센과 교대로 공을 주고받았고, 이어서 번갈아 좌우로 굴려 주는 동작을 통해 컨디션을 점검했다.
긴 비행, 전날의 치열했던 경기, 그리고 이틀 만에 다시 경기에 나선 탓인지 솔직히 몸이 무거웠다.
뭐, 그렇다고 경기를 못할 정도는 아닌,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20분에 걸쳐 몸을 풀고 난 정지우는 선수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향했다.
통로로 들어설 때 ‘오늘 승격하자고!’ 하는 응원이나 ‘빌어먹을 반즐리를 묵사발로 만들어!’ 하는 거친 고함이 들려왔는데, 이런 건 시선을 돌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라커룸으로 들어간 정지우는 덧입었던 운동복을 벗고 장갑을 집어 들었다.
원정팀 반즐리는 노란색 상의와 양말, 그리고 검은색 하의를 착용했고, 홈팀인 유니온 시티는 파란색 세로줄 상의와 파란색 양말에 흰색 바지였다.
골키퍼는 반즐리의 1번 아담이 검은색, 유니온의 13번 정지우는 회색이었다.
솔직히 리그 중간이라면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경기였다. 그런데 리그 경기를 연속 두 번이나 패한 이후이고, 강등권을 벗어나기 위해 독이 잔뜩 오른 반즐리 FC를 만난 거라서 알지 못할 긴장감이 라커룸을 휘감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벽에 걸러져서 아스라이 들리던 응원 구호가 마틴이 여는 문을 통해 단박에 라커룸으로 뛰어들었다.
달칵.
비록 문을 닫을 때까지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당연하게 선수들의 시선이 마틴을 향해 달려갔는데, 그는 준비했던 것처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만할 때, 우리 어머니가 늘 해 주시던 말씀이 있었지.”
허리쯤을 손으로 가리켰던 마틴이 벽에 손을 짚으며 엉뚱한 말을 꺼냈다.
“헤이, 마틴! 넌 늘 게으르구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미리 준비하면 안 되겠니?”
그는 모친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이 분명한 음성으로 말을 뱉으며 제스처까지 보였다.
선수 몇 명이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은 다음이었다.
“지금껏 난 그 말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걸 한 번이라도 확인하고 싶으셨던 나의 어머니가 이곳에 와 계신다. 포기하실 만도 한데 말이지.”
조금 전보다 좀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에 담았던 웃음을 지운 마틴이 진지한 얼굴로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2만 4천여 명의 홈 관중들이 나의 어머니가 했던 것과 똑같은 요구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제발 리그가 끝나기 전에 승격을 이루면 안 되겠니? 하면서!”
제법 그럴듯한 연설인데?
마틴에게 저런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다.
“승격을 이루면 내가 쥬피터 회장을 만나겠다. 그리고 분명하게 요구 조건을 전하겠다. 내가 원하는 선수는 반드시 프리미어리그로 함께 가야 한다고.”
느닷없이 분위기를 바꾼 바람에 시선을 빠르게 교환한 선수들이 다시 마틴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나는! 병원에 누워 있는 클레이를 포함해! 지금 이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 모두와! 프리미어리그로 함께 가겠다!”
눈높이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마틴은 허공을 검지로 콕콕 찍어 가며 말을 이었다.
“대신에 너희가 해 줘야 할 것도 하나 있지. 그라운드를 지켜보고 계실 나의 늙은 어머니와 2만 4천의 홈 관중들에게 이번만큼은 우리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라.”
묘하게 선수들의 감정을 뒤흔든 마틴이 고개를 돌리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가능하겠지?”
답은 없었다. 그 대신 해내겠다는 선수들의 눈빛이 분명하게 마틴을 향하고 있었다.
마틴이 문을 열고 나가는 짧은 순간에 함성이 뛰어들었다가 두 번째로 꼬리를 잘리고 어딘가로 몸을 감췄다.
누군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한 순간이었다.
띠잉! 띠잉! 띠잉!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헤이! 다들 가자! 프리미어리그로!”
데이빗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고, 그의 단짝 카알이 그 뒤를 따라 일어선 다음 데이빗과 커다랗게 손뼉을 마주쳤다.
“예에!”
꼼빠니, 스웰던, 라파엘, 포그이…….
선수들이 손을 맞잡거나 하이파이브를 하며 승리를 다짐한 뒤에 라커룸을 나섰다.
***
장진모는 입 밖으로 길게 나온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형, 나는 축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건 줄 전에는 몰랐다.”
“미친놈. 그게 축구 담당 기자가 할 말이냐? 누가 들을까 봐 겁난다.”
말을 마친 부장이 캔 맥주를 들어서 남은 것을 단숨에 털어 넣은 다음, 캔을 우그러트리고는 새것을 집어 들었다.
딸칵! 치이익!
그가 새 캔을 따는 순간이었다.
“형이 보기에 정지우는 어느 정도 수준인 거야?”
“야, 인마! 나 사회부 기자야!”
장진모가 던진 질문을 부장이 답답하다는 대꾸로 받았다.
“그래도 형은 주말마다 들여다보고 했었잖아.”
“글쎄.”
오징어 다리를 길게 찢어 낸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요 몇 게임만 보면 리버풀이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연락했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겠구나 싶을 정도?”
“오?”
“솔직히 박용근 키즈라고 그 선수들이…….”
끼이익.
그때 부장실 문을 열었던 기자 한 명이 부장과 장진모, 탁자에 놓인 맥주와 오징어를 보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협회 1년 예산이 천억이 훌쩍 넘는다. 그러니 충성하지 않는 선수를 함부로 기용하기 어렵지. 왜? 그 선수가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 밥그릇을 뺏기니까. 그래서 밀려난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거야, 뭐.”
“막말로 다른 나라 기자들이 한국 축구는 왜 전 세계가 존경하는 레전드를 놔두고, 연예인이 조 추첨에 나오냐고 물어보는데 할 말이 뭐가 있겠냐? 그런 것부터 하나씩 바로잡아야 돼.”
“에이, 쯧! 그런 게 어디 한두 개요? 어? 시작하나? 야! 정지우다! 정지우!”
모니터에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 정지우의 모습이 가득 잡혔다.
“저거 좀 봐요. 저 눈빛하고 자세! 햐! 빛이 나네, 빛이! 확실히 쟤는 그라운드에 나서면 사복 입을 때와는 전혀 다른 포스가 있다니까.”
연신 쏟아 내는 장진모의 감탄에 부장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
182의 반즐리 골키퍼 아담보다 5센티미터가 더 큰 정지우다. 회색 운동복에 골키퍼 장갑을 낀 정지우를 카메라가 유독 자주 보여 주었다.
부천의 작은 빌라에서 보기에도 오늘 정지우는 확실히 이전 경기와 다르게 빛이 나 보였다.
어쩐지 등 뒤에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
그래서인지 행사를 위해 길게 늘어선 상대 팀 선수들이 정지우를 힐끔거리는 것이 분명하게 화면에 잡히고 있었다.
동전을 던진 주심이 손가락으로 데이빗을 가리키자 그가 골대를 택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열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관중들, 다음으로 벤치 위쪽 중앙 자리에 앉은 쥬피터와 이사진, 마지막으로 마틴과 유니온 시티의 벤치를 보여 준 화면이 곧바로 골대 앞에서 펄쩍 뛰어서 크로스바를 터치하는 정지우를 잡아 주었다.
저런 열광적인 응원을 받으면 긴장도 될 거고 흥분도 되련만, 정지우는 듬직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두 손 검지를 치켜들고 있었다.
지금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아까 전화로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TV로 보고 있을 박용근에게 ‘축구 선수로 뽑아 주신 거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닐까?
박용근은 이상하게 감정적으로 변하는 마음을 잡으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운 느낌이었다.
***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 경기에서 지면 반즐리 FC는 완전히 강등권에 한발 담그는 꼴이 된다.
남은 경기 성적과 다른 팀의 성적을 비교하며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피 말리는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거다.
강등되면 가장 먼저 팀의 예산이 형편없이 줄어든다.
당연하게 몸값 비싼 선수들이 팔려 나가고, 그다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힘겨운 시련이 팀과 선수들을 덮치는 거다. 그래서 리그 막바지에 팀이 강등권에 빠지면 선수들은 완전히 독사에게 발가락을 물린 것처럼 악착같이 달려들게 된다.
그나마 챔피언십 팀으로 이적이라도 하려면 실력을 보여야 하고, 그런 실력도 없는 선수들은 악에 받쳐서 퇴장, 그까짓 거 신경도 안 쓴다.
너희는 안정권이잖아! 그러니 적당히 해. 안 그러면 퇴장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잔인한 태클 들어갈 거니까 각오하든가!
이런 팀들에게 조금만 움츠러들면 경기를 뒤집기 정말 어려워진다.
막말로 반즐리 FC 처지에서 보면 유니온 시티는 배부른 상태에서 최고급 스테이크를 처먹겠다고 욕심 부리는, 딱 그 모양쯤인 거다.
시계에 손을 올린 주심이 양쪽 진영을 둘러보았다.
승격을 확정 짓고 싶어 하는 유니온 시티와 강등권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반즐리 FC와의 대결.
삐이이익!
마침내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우와아- 아!”
관중들의 함성이 울릴 때,
투욱.
반즐리의 9번 샘이 짧게 공을 밀었다.
어차피 리그에서 자주 만났던 사이여서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데 시간을 끌 것은 없었다.
투욱! 툭! 툭!
반즐리 FC는 작정한 것처럼 패스 세 번으로 유니온 시티 진영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