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라운드의 지배자가 되게. (3)
조동익의 방에 불려 온 한승관과 문광국은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책임지겠다는 한 위원 말 한마디 믿고 브라질에 유고까지 불러 줬어! 눈이 달렸으니까 기사마다 달린 댓글들 봤을 거 아냐!”
그런 두 사람에게 조동익은 작정한 것처럼 고함을 질러 댔다.
“동양인 최초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저놈이 내일 경기에서 프리미어 승격을 이뤄 내고, 그다음에 FA컵 결승까지 진출하면……? 후우!”
말을 하다 지친다는 듯이 조동익은 기다란 한숨을 달았다.
그러고는 치솟은 혈압을 낮추려는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어이구! 어이구!’를 반복했다.
“한 위원, 방법이 뭐야?”
조동익이 억지로 가라앉힌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다음, 그는 몸을 완전히 돌려 뒤편 책상에서 서류 두 장을 집어 왔다.
“유니온 시티에서 공문이 왔어. 한국에 축구 교실을 만들고 싶다는 건데, 조건이 뭔지 알아? 박용근이를 대표 감독으로 하라는 거야.”
내내 바닥을 향해 있던 한승관과 문광국의 시선이 날카롭게 조동익을 향했다.
“설립 비용, 운용 비용을 모두 유니온 시티가 제공하는 조건이야. 어떻게 할까? 이거 무시했다가 저쪽에서 보도라도 나오면 그 후폭풍을 누가 감당할 거야?”
“교활한 새끼.”
한승관이 뱉은 욕이었다.
불쾌한 표정을 지을 법도 하련만, 조동익은 그 점에 대해선 못 들은 척 반응이 없었다.
“이봐, 문 감독.”
“예.”
“다음 달에 있을 예선전 어떻게 할래?”
문광국이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제가 기자회견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평가전에 제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하고, 우리 대표팀을 지켜봐 달라고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자신 있어? 쿠웨이트에 지면 우린 그냥 벼랑 끝에 매달린 꼴이 돼.”
“해외에 있는 애들 전부 불러들이면 충분히 승산 있습니다.”
“어허, 참! 가뜩이나 분위기가 이런데, 벤치만 지키고 있는 애들 불러서 어쩌려고 그래? 그 아이들은 실전 감각이 없어요! 실전 감각이!”
“협회에서 해당 팀에 협조를 구해 주십시오.”
조동익은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문광국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벤치에서도 밀렸으니까, 이 기회에 일찍 불러들여서 제대로 팀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협회에서 공문을 보내면 해당 팀에서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팀에서 서브로도 활용 못하는 선수를 국가대표로 선발해 준다는데 반대할 팀은 없다.
잘하면 그곳에서 폼이 올라올 수도 있고, 더 운이 좋으면 그 덕분에 적당한 가격을 받고 다른 팀으로 넘길 기회가 생기는데 누가 굳이 마다하겠나.
“기자회견은 언제 할 건데?”
“허락하시면 오늘 오후라도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어차피 정지우 이야기가 나올 테니, 제가 적당히 알아서 답을 하는 게 사태 진정에 도움도 될 겁니다.”
입술의 양 끝을 아래로 늘인 조동익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문광국을 보았다. 당장 들었던 말을 계산하는 모양새였다.
“누구보다 팀에 헌신하는 선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다들 알아서 써 주지 않겠습니까?”
“흠, 자네야 기자들과 관계가 워낙 좋으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조동익의 허락은 이미 떨어진 것과 같았다.
“그러면 이건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어?”
문광국을 바라보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조동익의 눈빛이 한승관을 찾았다.
“당장 제안이 그렇다고 우리 협회가 무조건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는 거잖습니까? 축구 교실 설립과 유지에 대한 사업 계획서를 제출해 달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보완 대책을 추가로 요구하면 1년쯤 금방 지나갑니다.”
“그 뒤는?”
“문 감독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면 분위기가 분명 바뀔 겁니다.”
오늘 처음으로 눈빛에 여유를 담은 조동익이 한승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니온 시티도 프리미어리그 진출이 13년 만입니다. 놈이 2부 리그에서 펄펄 나는 것 같지만, 승격한 뒤에 세계적인 선수들과 마주하면 금방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들통 날 겁니다.”
“진용이는?”
정말이지 뜬금없다 싶을 만큼 불쑥 나온 질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승관은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우리 새끼입니다. 부회장님께서 여기 한 위원님이나 저를 찾아 주시는 것처럼 제가 끝까지 안고 가겠습니다.”
뜻밖에도 문광국이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조동익이 듣기 좋은 답을 바로 꺼내 들었다.
“어허, 거참! 내가 이래서 우리 한 위원하고 문 감독을 내치질 못해. 어떻게 된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한결같은 모습인지……. 왜 그렇게 영악하지를 못해? 그래서 이 야비한 세상을 어떻게 견디려고?”
“부회장님께서 우리 축구를 위해 이렇게 애쓰시는데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문광국의 말이었다.
덕분에 조동익이 울컥 감정이 올라온 얼굴로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고, 그래서 분위기는 숙연했다.
“그래! 해! 해 봐! 뒤에서 내가 힘껏 지원할 테니까 우리 문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한번 마음껏 휘둘러 봐! 한 위원, 자네는 문 감독이 불편하지 않게 원하는 것들을 지원하고.”
“예, 부회장님.”
“문 감독, 우리가 이렇게 굳게 버티는 가장 큰 이유가 우리 축구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조동익은 연신 문광국을 향해 대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10분쯤 뒤에 한승관과 문광국은 조동익의 방을 나섰다.
“후유!”
숨이 막힌 것처럼 셔츠의 단추를 두 개나 끌러 낸 한승관이 궁금한 눈빛으로 문광국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합니까? 부회장님을 풀어 드리긴 해야겠고, 상황은 얽혀만 있으니…….”
“고마워.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그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났어. 내가 나중에도 절대 잊지 않을게.”
“오늘 기자회견 끝나고 혹시 기자들이 전화하면 다른 말씀 절대 마시고, 그저 저를 무조건 지지한다고만 해 주십시오.”
“그러지.”
한승관이 단단하게 답을 하고는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
카알은 레드 블레이트에서 10분쯤 떨어진 곳에 있는 펍으로 정지우와 일행을 안내했다.
“헤이! 카알!”
구불거리는 금발을 멋지게 넘긴 30대 중반의 주인은 카알과 꽤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덧붙여서 그는 유니온 시티의 열성 팬인 것이 분명했다.
“오! 이런!”
라파엘과 스웰던, 멜스, 꼼빠니, 레믹을 본 그의 반응이 그랬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중에서도 정지우를 가장 좋아한다는 반응을 뚜렷하게 내비쳤다.
“오! 마이! 갓! 미스터 어메이징이잖아!”
정지우를 발견한 주인의 음성과 태도가 직전과 확실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와우! 당신은……! 어후! 감동, 그 자체였어요!”
서양 놈 특유의 과장된 행동들, 고개를 흔들며 쫙 편 손바닥으로 심장 부위를 만지는 뭐, 그런 제스처를 취하며 주인은 감동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국 엄지를 치켜세우며 조커처럼 웃는 주인과 사진을 찍고, 그가 가진 유니온 시티 유니폼에 사인을 해 주고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일단 모두 맥주를 주문했다.
어차피 한두 모금만 마시고 말 것이기 때문에 소다수를 시키거나 맥주를 시키는 것 모두 정지우에게는 다를 바 없는 주문이었다.
“Ji, 마스코트 숙녀분은?”
“아직 못 만났어.”
“그렇군.”
카알이 알았다는 것처럼 커다랗게 답을 한 다음이었다.
“이봐, 우리 분명히 하자고.”
어차피 해야 할 말인 것 같아서 정지우는 맥주병을 들어 보이며 테이블에 앉은 동료들의 시선을 당겼다.
테이블이 한 10개쯤?
벽으로 맥주병과 위스키 병이 쭉 늘어서 있는 펍의 가장 안쪽 테이블에서 정지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스널전 바로 전까지, 승격을 위한 승점 3점을 남겨 놓을 때까지 난 전혀 활약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어쩌면 난 그때까지의 과정을 무임승차한 거지.”
레믹이 데이빗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것을 보며 정지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없다고 승격에 문제가 생길까?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내 대답은 분명하게 ‘No’야. 감독이 분명 다른 작전을 내세울 거고, 여기 데이빗이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FA컵은 다르지 않을까?”
말을 듣고 있던 카알의 질문에 정지우는 ‘그거야, 뭐!’ 하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고맙게도 주장과 너희가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서 내 크린시트도 가능했던 거야. 솔직히 수비수들의 헌신 없이 무실점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거든.”
남은 이야기가 있음을 짐작한 동료들이 진지한 눈빛과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이 기회를 주더군. 아마 데이빗과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정지우가 시선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다른 선수들 역시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뭐? 내게 뭘 기대하는 거야?”
데이빗이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가 포기했다는 것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맞아. 마틴이 부르기에 그 자리에서 Ji가 우리 모두와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전한 건 있지.”
“우-!”
테이블에 있던 놈들이 장난기 가득한 눈길로 탄성을 쏟아 냈다.
“잠시만! 잠시만 내 말을 들어 보라고.”
정지우의 시선을 살핀 데이빗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Ji와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나온 거야.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데이빗은 오른손을 뒤집는 동작으로 동료들을 가리켰다.
“너희도 다 비슷한 생각이라고 말을 했어. 아니야? 내 말이 틀렸어? 레믹! 특히 넌 나와 생각이 같을 거 같은데?”
레믹은 답을 하지 않고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데이빗은 정지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바로 입을 열었다.
“내게 있었던 일은 다 말했어. 그렇다면 Ji, 마틴이 네게 주었다는 기회는 뭐야?”
“경기 도중에 필요한 지시를 내리라는 정도?”
“그게 무슨 문제가 있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뒤늦게 합류했잖아. 그런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게 너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염려스러운 거지.”
정지우의 말에 데이빗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사자가 있어서 미안한 말인데, 그 점은 네가 레믹과 다툴 때 모두 풀렸다. 솔직히 멋진 선방으로 팀을 구한 경기 후에도 으스대지 않은 것도 한몫했고. 어때? 레믹, 이제야말로 진정한 네 순서인 거 같은데?”
한국에 갔던 동안 이들끼리 무언가 이야기가 있었구나!
정지우는 돌아오자마자 뛰었던 웨스트 브로미치전에서 데이빗과 동료들이 작전을 요구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두 경기를 놓치고 나서 내가 데이빗과 카알, 라파엘에게 물어본 게 있어.”
레믹이 맥주병을 앞으로 기울이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왜 내가 골을 못 넣는지? 그리고 그때 다른 팀에서 오퍼가 왔었던 것도 솔직하게 털어놨고.”
레믹은 ‘뭐 어쩌겠어?’ 하는 투로 어깨를 들어 보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다들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지. 누군가 경기를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 그래서 결론은 Ji가 필요하다 정도? 이기는 경기를 위해서는 말이지.”
“골대를 든든하게 지켜 줄 사람이면 더 좋고.”
라파엘이 보충 설명을 하듯이 말을 덧붙였다.
“아스널전과 같은 경기, 어제 우리가 이뤄 냈던 웨스트 브로미치와의 승리, 우리 모두 그런 경기와 결과를 원해. 그래서 데이빗이 마틴을 만났던 거? 난 상관없어. 내가 궁금한 건 과연 Ji가 말했던 대로 우리 모두가 프리미어리그로 갈 수 있는가야.”
참 바쁘게들 살았구나 싶었다.
정지우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리자 데이빗이 설명처럼 입을 열었다.
“마틴이 그러더군. Ji가 마음만 먹는다면 구단주도 따를 거라고. 우리 모두 프리미어리그로 함께 갈 수 있고, 유니온과의 좀 더 좋은 조건, 아니면 다른 팀에서 좋은 조건의 오퍼를 받을 확률이 높아지는 거지. 이게 싫을 사람이 있을까?”
“Ji.”
지금껏 듣고만 있던 꼼빠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로 정지우를 불렀다.
“환호하는 관중에게 지지 않는 경기를 선보인다는 건, 내게 지금껏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프리미어리그로 함께 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좀 더 편안하게 우리에게 영감을 줘.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왜 정지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째서 시합 전날임에도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에 대해 꼼빠니가 정확하게 답을 준 느낌이었다.
“어때? 나쁘지 않지?”
데이빗이 맥주병을 들어 정지우 앞에 내밀었다.
나쁠 이유가 있을까?
정지우가 맥주병을 들자 단번에 남은 병들이 달려와서 주둥이를 부딪쳤다.
“잘 부탁해! 미스터 어메이징!”
데이빗이 웃으며 말을 건넨 직후였다.
“그래서 내일은 어떤 작전인 거야?”
지금껏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스웰던이 묵직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