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72화 (72/262)

제1장. 그라운드의 지배자가 되게. (2)

점심을 먹은 뒤에 정지우는 마틴의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내일 반즐리 FC와의 44라운드에서 승격을 확정하고 싶다.”

결정권이 정지우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마틴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바람을 정지우에게 건네고 있었다.

‘이 양반이 너무 편안하게 감독을 하는 게 아닐까?’

엉뚱한 생각에 정지우는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 냈다.

“챔피언십 팀들에 대한 자료는 필요 없을 것 같고, 어떤가? 이번엔 어떤 포메이션이 좋겠나? 아! 선수 명단은 확인했지?”

“예.”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우리 포메이션은?”

“코치, 어제 경기에서는 정면 승부를 택했고, 웨스트 브로미치의 방식을 예상했기 때문에 의견을 냈던 겁니다. 내일 반즐리가 어떤 전술로 나올지, 나는 그것까지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렇군.”

마틴이 알아들었다는 듯 답을 하고는 버릇처럼 깍지 낀 두 손을 책상 위로 올렸다.

“반즐리 FC와의 경기에 대한 나의 의견은 선발 명단에 담겨 있다고 보는데? 대신 경기가 진행되는 그라운드에서만큼은 자네가 우리 팀을 지휘해 주길 원하는 거고.”

지금이 이런 문제에 관해서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할 순간이었다.

“주장을 비롯한 선수들이 혼란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전에 이런 식으로 운영한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Ji, 자네가 팀원 전체를 끌고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고 싶다고 말했다면, 그 점에 대해 좀 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어제 경기가 끝났는데 도대체 언제, 누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까?

“나의 전술은 간단해. 상대 팀의 전술에 맞춰 기본 4-4-2 포메이션으로 선수를 선발한다. 물론 컨디션이나 기타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고려한 것이지.”

마틴이 왼편에 놓인 선발진 명단을 힐끔 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경기 중에 변칙적으로 나서는 상대 팀에 맞서 필드에서 팀을 지휘해 줄 선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임무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가 내 앞에 있다면, 당연히 그 임무를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나?”

“앞에서 말했듯이…….”

“주장과 다른 선수들의 반발? 그런 건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성적이야. 이 방법으로 훌륭한 성과를 거둔다면 누구도 이 방식에 대해 간섭하지 못해.”

정지우의 말을 뚝 자른 마틴이 염려하던 부분을 단숨에 던져 버렸다.

“아스널전에서부터 어제 웨스트 브로미치전까지. 페널티킥이 한 번 포함된 모든 출전 경기에서 자네는 크린시트를 기록했어. 8경기 무실점 약속을 지켜 가고 있는 거지.”

마틴의 눈빛이 이렇게 강렬하게 빛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자네의 신분 조회 요청이 전 소속팀으로 계속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것이 자네의 능력을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는 기준이고, 그만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이기도 하지.”

유정호도 모르는 일을 마틴의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분명 리그가 끝나기 전에 위약금을 물어 주겠다는 오퍼가 몇 개는 날아올 거다. 그런 자네가 이 팀에 남아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자는데 반발할 선수가 나온다고?”

마틴이 생각만으로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자네가 원하는 선발 명단이 있다면 요구해도 좋다. 다시 말하지만, 그 대신에 나는 자네가 단지 골키퍼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가 나선 경기에서 그라운드를 지배해 주길 원한다.”

너무 거창한 거 아닌가?

정지우가 멋쩍게 웃자 마틴은 잊은 것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믹이 오퍼를 거절할 생각인가 보더군. 자네와 한 시즌 더 보내고 좀 더 좋은 팀으로 가겠다는 결심인 거 같던데?”

아! 단순한 뺀질이!

정지우와 마틴이 동시에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자네가 영국 리그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 그리고 프리미어리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리그 중 하나이고, 그만큼 치열한 리그라는 것도. 승격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버텨 내기도 어려울 만큼.”

웃음을 덜어 낸 마틴이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면서 뭘 겁내는 거지? 뒤는 내가 지킨다. 그러니 자네는 자네의 그 특별한 재능을 발휘해서 그라운드를 지배해. 우리가 프리미어리그에서 빛날 수 있도록.”

마틴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난 다음이었다.

“Ji. Don' be afraid, and be the ruler of ground(두려워 말고, 그라운드의 지배자가 되게).”

그의 눈빛만큼이나 낮게 깔린 음성이 강렬하게 정지우에게 다가왔다.

마틴과의 면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섰을 때, 돌아갔을 줄 알았던 선수들이 통로 앞에 몰려 있었다.

“저녁 약속 없지?”

없는 건 없다고 답을 하는 게 맞다.

“함께 저녁이나 먹을까 하는데 어때? 마스코트 숙녀분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서로를 좀 더 알아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제안은 카알이 하는데, 눈빛을 가장 반짝이는 놈은 레믹이었다.

“저녁을 먹기는 이르지 않나? 내일 경기도 있고.”

“내일 경기를 위해서라도 가볍게 즐기다 들어가는 게 좋아. 그리고 대화를 많이 나눌수록 경기에 도움이 된다는 데 1파운드를 걸지.”

어쩐지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눈빛들이었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에 남기로 했다면 카알의 말대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정지우는 ‘그래.’ 하고 답을 했다.

***

쥬피터는 제안서를 보며 잘 손질된 머리를 뒤로 넘겼다. 자칫하다가는 게도 구럭도 다 놓치게 생긴 꼴이었다.

‘리버풀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까지?’

스카우트 담당자들의 능력이나 영향력만으로도 쥬피터는 상대가 안 되는 팀들이다.

게다가 당장 정지우의 가계약 위약금을 배상하겠다고 나서는 팀만 네 팀이고, 심지어는 아예 바이아웃으로 정해진 금액을 확인하고 싶다는 팀도 나오고 있었다.

“후우.”

쥬피터는 퍼뜩 마틴을 떠올렸다.

그가 독하게 마음먹는다면 얼마든지 푼돈인 위약금을 지불하고 팀을 떠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고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날세. Ji의 주택 구입은 어떻게 됐지? 흠, 그건 너무 허름한 게 아닌가? 좀 더 고급스러운 곳을 찾아봐. 서둘러서. 그리고 Ji가 이용할 차량까지 함께 알아보는 게 좋겠다.”

잠시 상대의 말을 듣던 쥬피터가 ‘그 정도가 적당하겠군.’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팀에 Ji의 전담 매니저가 있었으면 좋겠다.”

전에 없이 빨라진 자신의 말투를 느낀 쥬피터가 상체를 뒤로 기대며 넥타이를 쓸어내렸다.

“부탁하지. 하지만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점잖게 통화를 마친 쥬피터가 목소리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전화기의 버튼을 다시 눌러 댔다.

자칫하면 품 안에 안고 있던 황금 오리가 달랑 알 하나만 남겨 놓고 다른 둥지로 날아가게 생긴 거다.

통화 연결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고 있을 정도로 쥬피터의 심정은 다급했다.

“여보세요? 마틴?”

또다시 급해진 말투 탓에 쥬피터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두 번째로 넥타이를 쓸어내렸다.

“어제의 승리는 진심으로 감동 그 자체였네! 나와 우리 이사진은 자네의 놀랍고 뛰어난 경기 운영에 더할 수 없는 존경과 경의를 표하네!”

쥬피터는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가며 감정을 전하기 위해 애썼다.

마틴의 반응이 별로인 것 같아서 쥬피터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오늘은 바쁘겠지? 내일 경기가 끝나고 저녁은 어떤가? Ji의 주택이 구해진 것 같아서 말일세. 홈구장에서 승격을 확정 지은 뒤에 함께 식사를 한다면 더할 수 없이 기쁘지 않겠나?”

다시 눈을 좌우로 굴린 쥬피터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뭘 그리 걱정해? 일단 승격이 확정될 경우를 가정해서 모든 준비를 해 두겠지만, 혹여 뒤로 미뤄지더라도 나는 전혀 염려할 이유가 없어. 무엇보다 자네가 팀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속이 타는지 쥬피터가 다시 입맛을 다셨다.

“물론일세, 마틴. 자네가 우리 팀을 이끌어 주는 것에 난 늘 감사하지. 그럼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홈경기를 기대하겠네. 행운을 비네, 마틴.”

전화기를 내려놓은 쥬피터가 오른쪽에 따로 놓였던 제안서를 들어서 길게 찢어 버렸다.

“망할 한국 놈들! 하마터면 이놈들 때문에 큰 손해를 볼 뻔했잖은가! 어디서 엉뚱한 놈을 디밀려고!”

쫘아악! 쫘아악!

제안서를 찢던 쥬피터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이봐! 한국에 축구 교실 만드는 일은 어떻게 진행됐어?”

쥬피터의 음성에 화가 잔뜩 담겨 있었다.

***

포털 사이트의 스포츠 기사란에 연달아 정지우의 오퍼 소식이 떠올랐다.

리버풀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오퍼를 냈다는 기사 이후로 몇몇 팀들의 이름이 더 거론되더니, 저녁 무렵에는 추측성 기사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기사마다 ‘잘하는 짓이다. 이런 선수를 전반만 뛰게 했구나.’부터 ‘너희는 눈이 없냐? 하긴 그러니까 그따위 운영을 하겠지.’, ‘다 나가 뒈져라, 열자.’, ‘가서 무릎 꿇고 싹싹 빌어서 모셔 와라, 이 개아들아. 주어 없음’ 따위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그 외에 ‘응원할게요.’, ‘잘 생각했다. 돌아오지 말고 영국에 귀화해서 멋지게 성공해라.’, ‘일본만 빼고 다 좋다. 어디든 귀화해서 우리 축구 발라 버려라.’ 등의 댓글들도 엄청난 추천을 받으며 상위권으로 올라왔다.

***

박용근은 느닷없이 달려든 스포츠 기자들에 둘러싸여 ‘아는바 없다.’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감독님, 월드컵 예선에서 고전하고 있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지우 선수가 있다면 많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함정이 단어마다 숨겨져 있는 질문도 있었고,

“협회가 정지우 선수의 임의 탈퇴를 풀어 주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번에 대표팀 은퇴 선언을 했는데, 그 배경은 어떻게 됩니까?”

라는 따위의 유도성 질문도 나왔다.

그러나 축구 바닥 짬밥이 있고, 누구보다 정지우를 아끼는 사람이 바로 박용근이다.

그는 그저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와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답으로 질문을 피해 나갔다.

한 시간쯤 시달린 뒤였다.

“감독님, 그러면 정지우 선수는 그렇게 은혜를 입고도 이번에 귀국했을 때 감독님조차 찾아보지 않은 데다, 연락도 전혀 없었던 거네요?”

박용근의 대응이 아니꼬웠는지 기자 한 명이 어디 두고 보자 하는 표정으로 치사하디치사한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정지우,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올 거고, 아니라고 하면 만났으니까 알 거 아니냐고 달려들 게 뻔했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커피 전문점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 20년이 다 되었고, 꽃집을 운영하는 전은주 덕분에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 또한 적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도 박용근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들을 향해 커다랗게 허리를 숙였다.

“다 내가 모자라고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뜬금없는 그의 사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자들은 모두 알았다.

“에이, 진짜 씨……. 너무하네! 거, 기사 하나 그냥 줘요. 좋게 좋게 하나 씁시다. 아니! 막말로 우리 축구 팬들이 알 권리가 있는 거 아뇨!”

마지막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난처해진 입장을 모면하고, 뭐 하나라도 건져 보겠다는 속셈으로 자극했지만 박용근은 계속해서 허리만 숙여 댔다.

“에이! 가자! 가! 동대문 1번 개가 꼬리 마는 걸 다 보네!”

결국 기자들이 모두 물러났다.

커피 전문점에서 혼자 남은 박용근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점퍼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사진으로 남겨 두었던 정지우의 모습을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높이 가. 멀리 가고.”

그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하늘을 날아 공을 잡아채는 정지우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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