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9화 (69/262)

제9장. 마스코트 숙녀분의 이름은? (1)

솔직히 말해 행운의 득점이라고 할 만했다.

판독을 통해 레믹의 골로 기록됐지만, 당사자도 쑥스러운 얼굴로 웃을 만큼 욱여넣은 골이기도 했다.

라커룸에 들어선 레믹이 생뚱맞게 정지우에게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마주치는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 이유도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물을 마시고, 땀을 닦는 동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헤이, 지! 후반은 어때?”

목에 수건을 두른 데이빗이 상체를 기울여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신호라도 됐다는 것처럼 라커룸의 선수들이 죄다 정지우에게 시선을 준 채 답을 기다렸다.

“주장.”

“뭐? 나?”

지금껏 그저 ‘데이빗’이란 이름을 불러 버릇해서인지 그가 당황한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주장의 권위를 침범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조심스러운데 한마디만 해도 될까?”

“우리 팀에게 말이지?”

데이빗이 힐끔 카알을 돌아보았다가 어떠냐는 의미의 시선으로 라커룸을 쭉 둘러보았다.

“길게 하지 않을 거지?”

데이빗이 서양놈 특유의 유머로 동의한 다음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라커룸의 분위기가 진지하게 변해 버렸다.

“전반전은 우리에게 행운이 붙어 주었다고 생각해.”

“지가 나선 경기는 늘 우리에게 행운이 있었어.”

레믹이 불쑥 나섰다가 눈치를 살피며 목을 움츠렸다.

“만약 후반에 행운이라는 것이 웨스트 브로미치의 손을 잡아 주면 이 경기는 어렵게 흘러가겠지. 그건 모두 알 것 같고.”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하는 표정들을 바라보며 정지우는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슬럼프에 빠졌었다. 6년이나. 그걸 깨워 준 내 마스코트가 그라운드에 와 있어.”

“혹시 아까 돌아보던 그 관중석?”

레믹이 또다시 끼어들었다가 미안하다는 투로 양손을 들어 보이며 아예 상체를 벽에 기댔다.

“그 숙녀 덕분에 아스널전부터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데…….”

“우오-!”

서양놈들이 ‘이거 봐라?’ 할 때 지르는 탄성이 라커룸을 가득 메웠다.

“내 마스코트가 긴 시간 만에 병원에서 외출 나왔어. 나는 그 숙녀를 위해 승리를 선물하고 싶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들 수 있는 건 지지 않는 경기다. 그리고 다들 아는 바대로 승리를 만드는 건 내 몫이 아니야.”

들떴던 분위기가 정지우의 다음 말에 상을 엎어 버린 것처럼 완전히 바뀌었다.

정지우는 레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숙녀처럼, 오늘 우리를 응원하러 먼 길을 와 준 응원단 모두 우리 팀의 승리를 원한다. 누가 골을 넣든, 상관없어. 그들이 원하는 건 유니온 시티, 우리의 승리, 그것 아닐까?”

정지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레믹이 눈을 좌우로 굴리며 선수들을 살폈다.

“프리미어리그 승격 이후에도 팀에 남는 선수? 오늘 경기, 그리고 남은 리그에서 우리가 한 팀으로 멋진 승리를 이뤄 내는데 굳이 새로운 선수를 영입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 있는 우리만으로 충분할 텐데?”

데이빗이 입술 한쪽에 미소를 달고 카알을 돌아보았다.

“서브가 좀 더 필요하긴 하겠지. FA컵에서 우승하면 UEFA 리그에 나가야 하고,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해서도 다음 리그의 FA컵 경기가 있을 테니까.”

뭔 소리야?

선수들이 시선을 번갈아 마주친 다음이었다.

“우리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자.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잠시 뒤에 있을 후반전에서 분명하게 증명해 주자.”

‘그럴 수 있을까?’

바닥에 깔린 의심을 지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선수들의 눈에 설명하기 어려운 투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부탁도 있다. 나는 이 경기에서 내게 축구를 돌려준 그 숙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응원을 펼쳐 주는 내 마스코트에게 승리의 기쁨을 선물하고 싶다.”

“미안한 질문인데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

카알의 질문에 정지우는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오, 이런! 진심으로 유감이야, 지.”

지켜보던 선수들 모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숨을 커다랗게 내쉬는 놈,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놈, 입가에 묘한 미소를 단 놈까지. 선수들이 복잡한 표정으로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고민할 게 뭐 있어? 우리에게는 응원하는 관중들에게 최선을 다한 경기와 그에 따른 승리를 선물할 의무가 있다.”

데이빗이 상체를 세운 자세로 선수들을 둘러본 후 정지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아! 마스코트 숙녀분의 이름은?”

“릴리.”

“우-!”

“이왕 말을 꺼냈으니까 방법도 알려 줘.”

데이빗이 말을 마치는 순간에 감독인 마틴이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그가 분위기를 살필 때였다.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잠시 들어주겠습니까?”

“내가 방해되지 않는다면!”

데이빗이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웨스트 브로미치는 후반에도 4-3-3을 바탕으로 힘으로 밀어붙일 게 분명해. 우리는 4-4-2를 기본으로 4-1-4-1로 변형하는 포메이션을 이용해 저들의 뒤를 뚫는다. 이게 성공한다면?”

정지우가 레믹을 똑바로 보았다.

“저 친구가 또 해트트릭을 기록할 수도 있을 거야.”

“실패한다면?”

“한 점 차 승리로 끝나겠지.”

“우리는 손해 볼 게 없네?”

“내가 뒤를 지킬 거니까.”

“오우-!”

이번엔 조금 다른 의미의 탄성이었다.

서양놈들은 빤한 탄성에 참 많은 감정을 담는다.

“이야기가 끝났나?”

“그렇습니다.”

정지우의 답을 들은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질문이 있다. 4-1-4-1로 변화할 때의 구체적인 방법은?”

“수비 라인은 지금처럼 라파엘이 조율하면 됩니다. 주장이 홀로 남아 공수를 조율하는 동안, 꼼빠니가 이끄는 라인에 브라운이 합류해서 앞쪽 라인을 보강해 주면 됩니다.”

“가장 앞쪽에 서는 스트라이커를 레믹이 맡는다?”

“그렇습니다.”

데이빗이 시선을 돌려 레믹을 보았을 때였다.

“레믹, 4-1-5의 포메이션이라고 생각하고 뛰어. 전방에서 힘으로 웨스트 브로미치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우린 후반에 정말 힘겨운 싸움을 해야 된다.”

정지우가 확인하는 것처럼 분명하게 뜻을 전했다.

“맡겨 두라고, 친구!”

레믹이 뻔뻔한 얼굴로 자신감을 표시한 다음이었다.

짜악!

데이빗이 커다랗게 손을 마주치며 시선을 당겼다.

“유니온 시티의 새로운 마스코트 릴리를 위해 무식한 상대를 더 무식한 방법으로 두들겨 주자!”

“이예에에!”

“컴온!”

손뼉을 마주치는 놈, 뜬금없는 하이파이브를 하는 놈들이 나왔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훑어보던 마틴이 ‘후반을 지켜보는 것이 아주 흥미롭겠군.’ 하고는 라커룸을 나섰다.

“지! 후반전에는 가장 앞에 서서 나가. 그리고 우리에게도 마스코트를 볼 수 있게 해 줘.”

데이빗의 말에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집었다.

“레믹!”

몸을 일으킨 데이빗이 이번에는 단호한 음성으로 레믹을 찾았다.

“웨스트 브로미치는 프리미어리그 소속 팀이다. 그런 팀들을 상대로 우리가 내세울 건 힘과 투지밖에 없다. 우리가 힘에서도 밀린다면 승격해 봐야 그다음 리그는 다시 챔피언십에서 뛰게 돼!”

레믹이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데이빗이 천천히, 그리고 강렬한 눈빛으로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두들기자! 챔피언십의 힘을 보여 주자고! 그래서 우리 모두 프리미어리그로 함께 가자! 우리 뒤를 저 괴물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에- 쓰!”

느닷없이 라커룸에서 하이파이브가 터져 나왔다.

11명이 번갈아 가며 손을 마주치는 동안, 후반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가자!”

이건 축구가 아니라 마치 전투를 나서는 정도의 분위기였다.

“지! 앞장서!”

결국, 정지우가 가장 앞에서 걸어 나갔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Ollez! Ollez! Ollez! Oh-!”

문을 열자 어둠을 밝히는 터널의 전등이 눈에 들어왔고, 동시에 웨스트 브로미치의 응원가가 훅 하고 달려들었다.

자그락. 자그락.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는 호슨스의 조명탑에도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귀를 얼얼하게 할 정도의 함성 속에서 터널을 빠져나온 정지우는 그라운드가 아닌 유니온 시티의 벤치 앞으로 걸었다.

당연하게 유니온 시티의 덩치 커다란 선수들이 줄줄이 정지우의 뒤를 따랐다.

“릴리!”

정지우가 손을 입에 대고 커다랗게 부르자, 메기 옆에 있던 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흔들었다.

“저 숙녀분이 릴리?”

데이빗이 기가 막힌다는 것처럼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을 들어 가슴의 엠블럼을 두 번 두들긴 다음 주먹을 입술에 가져다 댔고, 이어서 그 주먹의 검지로 릴리를 가리켰다.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팀의 선수들이 줄지어 서서 순서대로 릴리에게 애정을 표하는 거였다. 놀라고 가슴 벅차고, 기뻐하는 릴리의 표정이 정말 볼만했다.

입을 가린 릴리의 엄마 메기가 ‘Oh my God!’을 연발하는 동안, 선수들이 차례로 릴리 앞을 지나치며, 엠블럼을 두들긴 손에 키스를 담아 어린 숙녀를 가리켰다.

이 장면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웨스트 브로미치의 홈 관중들이 부르던 응원가가 수그러들 정도였다.

정지우를 시작으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설 때, 주심과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은 ‘너희 뭐하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정지우는 지켜야 할 골대로 뛰어가 양쪽 포스트를 걸었고, 점프해서 크로스바를 때렸다.

‘최선을 다해 지킬 거다. 도와줘.’

지금 하는 생각을 다른 이들이 듣는다면 웃을 일이다.

그러나 전국대회 우승을 위해 그라운드로 들어서며 생긴 이 버릇을 버릴 수는 없었다.

주심이 시계에 손을 얹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 라파엘이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가! 밀어붙여!’

‘오케이!’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좌우를 둘러보고는 앞으로 움직였다.

삐이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와락! 와라락!

누가 더 강한지 붙어 볼까?

너희가 그렇게 힘이 좋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움직임이 꼭 그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이 경기 결과에 따라 4강 진출과 탈락이 결정되는 소위 단판 승부다.

한 점이 뒤진 웨스트 브로미치는 잃을 것이 없다는 각오로 달려들었고, 유니온 시티는 다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고 싶다는 절박함으로 맞섰다.

FA컵 4강에 진출하고 싶은 웨스트 브로미치, 동료를 잃을 수 없다는 유니온 시티.

홈 관중에게 승리를 선사하고 싶은 선수들과 릴리라는 어린 숙녀에게 승리를 안겨 주고 싶은 선수들의 욕망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경기였다.

가장 돋보이는 선수는 역시 가장 단순한 레믹이었다.

“헤이!”

웨스트 브로미치의 5번 클라우디오가 거친 플레이에 항의하듯 고개를 디밀자, 레믹이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가슴을 디밀며 대들었다.

하여간 저놈만큼 단순한 놈이 또 있을까?

정지우가 ‘미스터 어메이징’이라면 저놈은 ‘미스터 심플’ 정도 될 거다.

삑! 삑!

주심이 들려가서 두 선수를 떼어 놓고 단호한 표정으로 구두 경고를 주는 바람에 억지로 화해하긴 했는데, 별다른 효과는 없어 보였다. 정지우가 고개를 갸웃할 만큼 양 팀 선수들이 무식하게 부딪치고 있어서였다.

퍼엉!

공이 기다랗게 날아오면,

촤아아악!

당연한 것처럼 거친 태클이 따라왔고,

삐익! 삑! 삑!

주심이 신경질적으로 휘슬을 불며 달려왔다.

“도대체 갑자기 왜들 이래! 자꾸 이러면 정말 퇴장시킨다!”

주심이 금방이라도 레드카드를 뽑을 듯한 표정으로 선수들에게 으르렁거렸다.

호슨스에 있는, 이 경기를 뛰는 선수들과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알았다.

먼저 투지가 꺾이는 팀이 패배를 안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투지를 꺾는 유일한 방법이 또 골이라는 것도.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Ollez! Ollez! Ollez! Oh-!”

우렁찬 남자들의 고함이 계속해서 호슨스를 가득 메웠다.

워낙에 힘을 바탕으로 승리를 쟁취하던 팀답게 홈 관중들도 이런 싸움에서 밀리지 말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선수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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