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8화 (68/262)

제8장. Ji가 화났어요. (2)

그때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레믹 역시 멀리 있는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된 거지?’

애새끼가 얼마나 골을 넣고 싶었으면 저렇게까지 할까?

피식하는 웃음이 났지만, 정지우는 진지한 얼굴로 오른손 엄지를 들어 주었다.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은 몰라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레믹의 시선과 정지우의 제스처에 담긴 의미를 모두 알았다.

감독인 마틴마저 뺀질이라고 여기던 레믹이다. 함께 뛰던 선수들이 볼 때는 오죽했겠나.

그런데 그 뺀질이 레믹이 정지우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어지간히 골을 넣고 싶은가 보네.”

“아까 코너킥 때 Ji가 공을 잡아서 던져 줄 것처럼 바라봤거든. 또 해트트릭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데이빗의 농담에 카알이 입술을 늘이며 대꾸했다.

하긴, 정지우가 없는 지난 두 경기에서 레믹은 한 골도 넣지 못했었다.

삐익!

파울 지점에 공을 세운 포그이가 주심의 휘슬에 따라 몸을 움직였고,

투욱!

터치라인 부근에 있던 꼼빠니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꼼빠니는 주춤주춤 앞으로 움직이다가 달려드는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를 피해 뒤편에 있는 멜스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멜스가 카알에게, 카알이 데이빗에게 패스했고, 데이빗은 골대 앞에 서 있는 정지우를 향해 공을 뒤로 돌렸다.

공을 점유하는 건 현대 축구에서 무척이나 중요하다.

물론 낮은 점유율로도 승리하는 팀이 많지만, 뭐라고 해도 공을 오래 소유한 팀에게 좀 더 많은 기회가 생기는 건 변함이 없다.

공을 빼앗기 위해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이 중앙선 부근으로 쭉 달려 나왔다. 게다가 11번 크리스는 공을 받은 정지우를 향해 있는 힘껏 뛰어들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 한두 번 겪어 보는 것도 아니고, 성격상 당황할 정지우도 아닌 거다.

“우와-!”

투우욱!

짧은 함성이 울려 나왔으나 정지우는 침착하게 왼편에 있던 스웰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이 달려들고 있어서 더 이상 뒤로 공을 돌리는 건 위험한 일이다.

정지우는 재빠르게 터치라인 근처에 있던 맥슨을 가리켰다.

사인을 알아챈 스웰던이 맥슨에게 공을 넘겨준 직후였다.

툭! 툭툭!

맥슨이 빠르게 웨스트 브로미치 진영을 향해 달렸다.

당연하게 웨스트 브로미치 수비수들이 막아섰는데,

투욱!

맥슨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중앙선 근처에 있는 데이빗을 향해 공을 빼 주었다.

투욱!

데이빗은 그대로 오른쪽에 서 있던 카알에게 공을 넘겨주는 것으로 달려드는 웨스트 브로미치의 선수들을 흔들었다.

공을 받은 카알은 발 앞으로 공을 흘린 다음, 여유 있게 꼼빠니에게 패스했다.

이번에는 웨스트 브로미치의 선수 2명이 카알을 압박하며 달려들었다. 두 선수 사이에 갇힌 카알에게서 패스를 받으려는 것처럼 꼼빠니가 움직였다. 그러자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이 꼼빠니를 향해 달려들었는데,

투욱!

카알에게 공을 찰 것 같던 꼼빠니가 느닷없이 웨스트 브로미치 수비수들 사이로 공을 빠르게 차 넣었다.

모두가 ‘어?’ 하는 순간이었다. 웨스트 브로미치 수비수들 틈에서 레믹이 불쑥 튀어나왔다.

“우와- 아!”

지난 두 경기에서 절대 보이지 않던 멋지고 창의적인 패스였다.

벌떡!

마틴과 스태프, 홈 관중들이 거의 동시에 함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웨스트 브로미치의 수비수들이 뒤늦게 달려들었지만, 사실상 자세를 잔뜩 낮춘 골키퍼 벤과 레믹의 일대일 승부였다.

퍼엉!

레믹은 통쾌하게 슛을 날렸다.

쭈욱! 터억!

그러나 반사적으로 뻗어 낸 골키퍼 벤의 발끝에 걸린 공이 그대로 골라인 바깥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우우-!”

레믹은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고, 마틴과 스태프, 관중들은 모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지우는 표정을 감추고 묵묵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멋지게 찼다. 거기까지다.

상대편 골키퍼가 선방을 보였다고, 슈팅을 날린 우리 팀 선수를 비난해서는 안 되는 거다.

전반을 통틀어 유니온 시티가 가졌던 가장 결정적인 기회를 날렸지만, 그 덕분에 분위기는 확실히 유니온 시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원정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가며 구호를 외쳐 주었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코너킥을 준비했다.

“헤이! 라파엘!”

정지우는 라파엘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라인을 올려! 미드필더부터 압박하자!’

‘오케이!’

정지우의 사인을 받은 라파엘이 카알과 함께 수비 라인을 바짝 올려서, 거의 모든 선수들이 웨스트 브로미치 진영에 있다시피 했다.

양 팀 선수들이 모두 안다.

여기에서 유니온 시티가 공을 빼앗기면 역습에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반대로 유니온 시티가 그만큼 독하게 득점을 노린다는 것도.

유니온의 8번 포그이가 코너킥을 준비했고, 양 팀 선수들이 그만큼 격렬하게 골대 주변에서 뒤엉켰다.

삐이익!

주심의 휘슬을 들은 포그이가 재빠르게 움직여 끊는 것처럼 공을 찼다.

신장이 180 위아래이고, 몸무게가 80킬로그램이 넘는 선수들이 유니폼을 잡아당기고,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몸통과 어깨로 서로를 밀어 대는 앞이다.

날아오는 공을 향해 3명의 선수가 높다랗게 치솟았는데, 공은 누구의 머리에도 맞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갔다.

퍼엉!

바닥으로 떨어진 공을 웨스트 브로미치의 5번 클라우디오가 앞으로 길게 걷어 냈다. 그리고 그 공이 기회를 엿보던 웨스트 브로미치의 11번 크리스 앞으로 떨어졌다.

전형적인 역습 찬스였다.

“우와- 아!”

수비 상태에서 있던 웨스트 브로미치 선수들이 역습을 위해 일제히 달려 나왔다.

투욱!

11번 크리스가 공을 앞으로 차 놓고 죽어라 달려 나올 때였다.

수비 라인을 바짝 올렸던 유니온 시티다.

중앙선 부근에 있던 유니온의 수비수 멜스가 크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툭! 툭툭!

크리스가 멜스를 제치기 위해 툭 찬 공이 멜스의 발에 걸렸다가 다시 크리스의 발에 맞고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중앙선 부근에 빡빡하게 몰려 있던 선수들을 제치고 유니온 시티의 꼼빠니가 공을 가로챘다. 그리고 그는 공을 잡은 직후에 웨스트 브로미치의 진영을 향해 대각선 방향으로 길게 차 버렸다.

속도로 승부하는 팀. 역습을 위해 앞으로 달리던 웨스트 브로미치의 뒤를 멋지게 쑤셔 버린 꼴이었다.

불쑥!

유니온 시티의 11번 맥슨이 기가 막힌 속도로 뛰었다.

“우와아-!”

원정 응원단의 함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웨스트 브로미치의 골키퍼 벤이 달려 나왔다. 수비수까지 모두 밀고 올라간 상황이고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서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화아악! 투욱!

몸을 던진 골키퍼 벤을 피해 공을 찬 맥슨이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구를 때였다.

텅 빈 골대 앞을 공이 홀로 굴러가는 기가 막힌 상황이 펼쳐졌다.

누구라도 발만 가져다 대면 골이 나온다.

와락! 와라락!

골키퍼 벤이 기다시피 몸을 움직였고, 레믹과 웨스트 브로미치의 조나스, 클라우디오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우와아- 아!”

누구 발에 맞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공은 웃음이 나올 만큼 떼굴떼굴 골대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예에에에에!”

FA컵 8강전 선취골이다.

유니온 시티의 원정 응원단이 미친 듯한 함성을 질렀고, 마틴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뻗었으며, 스태프와 서브 선수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골대 앞에서 일어선 레믹이 그대로 달려서 맥슨에게 뛰어들었다.

골이다! 골!

릴리가 두 팔을 높게 들고서 환호할 때 데이지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더구나 지금의 골은 평소에 중계방송을 보며 느끼지 못했었던 짜릿함과 통쾌함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멋진 선방, 그림 같은 슈퍼 세이브가 있었기에 나온 골이다.

하늘을 향해 높다랗게 양손 검지를 들었던 정지우가 릴리와 메기, 데이지가 환호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고작 시선을 준 것뿐인데 그것이 골만큼이나 짜릿한 일인 줄은 몰랐다.

“닥터 데이지! 지가 나를 보고 있어요!”

릴리의 말에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선은 계속 정지우를 향한 채였다.

골이다! 골!

마틴은 힘겨웠던 지난 일주일을 응징하는 것처럼 허공에 주먹을 뻗어 냈다.

이 맛에 축구를 시작했고, 감독이 되었다.

철을 다루는 노동자들의 도시 유니온 시티.

이곳에서 마틴은 누구보다 간절하게 승리를 원했다.

힘겨운 일주일을 견뎌 내고 그라운드를 찾은 저 관중들에게 그보다 값진 보상이 무엇이 있겠나.

승격한다면 더 큰 수입이 보장된다.

아니, 지난번 오퍼대로 이적했다면 분명 좀 더 나은 조건에서 감독 생활을 했을 거다. 그러나 그가 쥬피터와의 피곤한 싸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유니온 시티에 남은 것은 투박한 모습으로 응원해 주는 홈 관중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쉰 마틴은 다가온 스크립터의 등을 두드려 준 다음 자리에 앉았다.

‘고맙다, 지!’

그는 정지우에게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중앙선에 모여 다시 시작한 경기가 막 격렬해지려는 순간,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었다.

전반이 끝났다.

마틴이 일어나 통로로 먼저 향했고, 그라운드의 선수들이 줄줄이 선수용 터널로 향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원정온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터널로 들어서는 선수들에게 손뼉을 쳐 주었다.

멋진 전반을 보여 준 것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터널로 들어가기 전에 정지우는 분명하게 시선을 돌려 릴리를 바라보았다.

“굉장했어, Ji!”

릴리의 작은 입술이 흥분으로 가득한 말을 던질 때였다.

“You’re Mr. AmaJing!”

응원석에서 ‘당신은 대단한 선수야!’라는 의미의 고함이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고작 전반이 끝난 거다.

그런데도 전은주는 경기가 끝난 것처럼 박수를 멈추지 못했다.

소름 끼치는 선방 뒤에 마침내 골이 터졌다.

멋지지 않으면 어떤가? 욱여넣은 것이면 또 어떻고?

축구 선수의 부인이었고, 감독의 아내로 산 세월 덕분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변화 정도는 알아보는 전은주다.

게다가 오늘 정지우는 지난 경기와는 다르게 자신감과 여유를 보였다.

어떻게 박수를 멈출 수 있겠나.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랑스러운 제자를 보는데 말이다.

“멋있어, 지우야! 잘했어!”

정지우가 관중석을 바라본 뒤에 터널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전은주는 좀 더 빠르게 물개 박수를 쳤다.

“하여간 운도 정말 좋아! 잘못 걷어 낸 게 오히려 어시스트가 됐네! 저놈은 누가 기도라도 해 주나?”

신동수의 말이 억지인 것을 한승관과 문광국 두 사람 모두 알았다. 그러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후우!”

다만, 정지우가 활약하면 할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탓에 한승관과 문광국은 삶은 고구마 20개를 목에 꾸역꾸역 넣은 것같이 속이 답답했다.

그냥 던져두었어야 할 놈을 공연히 불러들여서 용을 만들어 준 꼴이었다. 덕분에 기자들도, 한국 축구 팬들도 전혀 상관없던 영국의 FA컵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스포츠 관련 기사마다 경기 시청 방법을 찾는 질문이 줄줄이 달렸다.

한승관은 애꿎은 폭탄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놈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지 못할 바엔 차라리…….’

돈을 들여서라도 치명적인 태클을 할 만한 선수를 알아볼까 싶었다. 하부 리그에 있는 선수라면, 협회에서 구제해 주는 조건이라면?

‘저놈을 다시 불러서 연습이나 경기 중에 선수 생활을 못하게 만들어 버려?’

왜 이렇게 저놈이 싫지? 박용근의 제자라서 그런가?

아니면 병원비까지 개입해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을 뿌리치고 일본으로 날아가 버려서?

신동수가 잔을 채워 주는 옆에서 한승관은 모니터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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