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5화 (65/262)

제7장. 비기거나 이기는 경기 중 하나 선택해. (2)

아파트에 들어서자 있는 줄도 몰랐었던 긴장이 몸 전체에서 풀려나왔다.

“고생했다.”

“형도 함께 움직였는데, 뭘.”

가방을 한쪽으로 밀어 둔 유정호가 커다랗게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아후! 이게 사람 잡는다니까.”

“잠깐 누워 있어. 나도 좀 쉴게.”

“그래라.”

정지우는 옷을 갈아입은 후에 간단하게 샤워를 마쳤다. 그러고는 침대로 가서 벽에 다리를 걸친 자세로 누웠다.

허벅지와 정강이, 허리와 등이 나른했다.

집이 역시 제일 편하다.

그렇게 깜박 잠이 들었던 정지우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익숙한 냄새에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을 때, 어쩐 일인지 유정호가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깨우려던 참인데 잘 일어났다.”

“뭐해?”

저녁 시간이다. 그런데 질문을 하면서도 한밤중처럼 정신이 멍했다.

“윤희 씨가 음식 싸 준 게 있거든. 그거 챙긴다.”

“같이하지.”

“오늘은 아니야. 다른 소리 말고 몸이나 좀 풀어. 부상 올까 겁난다.”

축구를 아는 유정호다. 그가 단호하게 권하는 바람에 정지우는 실제로 식탁 옆에서 허리와 등, 그리고 다리의 근육을 느긋하게 풀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 종류의 냄새가 조그만 아파트에 가득 찼다.

“먹자! 햐! 어쩜 윤희 씨는 음식 하나를 챙겨도 이렇게 정갈하게 할 수 있지? 이거 좀 봐.”

정지우에게 찬합을 보여 준 유정호가 밥을 들고 다가왔다.

되돌아온 영국에서의 삶이 고마운 음식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정지우는 다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시차보다 비행에서 오는 피로를 빨리 풀어내기 위해서였다.

상쾌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머리와 몸이 찌뿌드드해서 정지우는 연신 하품을 하며 상체를 비틀었다.

그나마 정지우는 나은 편이었다. 유정호는 잠을 설쳐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시차에 대해 툴툴거렸다.

서울은 오후 5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정지우는 우선 박용근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저예요. 잘 도착했구요. 여긴 다음 날 아침이에요.”

박용근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주고받다니?

그 통화에서 신준석과 동기들이 방문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다음으로 전화기를 건네받은 전은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컨디션과 달리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 정지우는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레드 블레이트로 향했다.

최근 빌의 방문이 없는 것이 궁금해서 들러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 좀 더 나을 것 같아서 바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꼭 일주일 만에 들르는 레드 블레이트였다.

정지우는 곧바로 마틴의 사무실로 향했다.

똑똑똑.

노크를 하자 ‘들어와.’ 하는 마틴의 음성이 들렸다.

“좋은 아침이야, Ji. 컨디션은 어때?”

“썩 좋지는 않네요.”

“비행의 피로를 털어 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겠지. 앉아. 차를 한잔하겠나?”

“커피로 하겠습니다.”

의외라는 표정으로 커피를 따라 준 마틴이 책상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이걸 봐주게.”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마틴은 골대와 하프라인이 그려진 전술 용지를 정지우에게 내밀었다.

“웨스트 브로미치전의 선발 명단이다. 골키퍼 서브는 얀센, 그 외에도 평소 선발과 다를 건 없지.”

그런데 이걸 왜 나에게 따로 보여 주는 거지?

정지우의 시선을 받은 마틴이 바로 입을 열었다.

“우리 팀은 지난 두 게임에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골키퍼인 얀센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온과의 경기에서 나는 우리 팀이 다시 열정을 되찾기를 바란다.”

마틴은 깍지 낀 손을 책상에 올려놓고 정지우를 설득하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FA컵 4강에 진출하고 싶기도 하고.”

“나는 골키퍼일 뿐입니다.”

“아스널전부터 불을 지른 주범이 그런 말을 하다니 조금은 실망스럽군.”

“내게 따로 원하는 역할이 있습니까?”

마틴은 손을 벌려 보이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런 엉뚱한 질문이 있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Ji, 나는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챔피언십 4게임과 FA컵 게임,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음 시즌에 맞이할 프리미어리그 게임까지, 자네가 우리 팀을 이끌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부분은 이미 분명하게 밝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코치, 선발은 코치의 고유 권한입니다.”

“클레이를 눈여겨보라고 했던 선수가 할 말은 아니군.”

마틴은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클레이와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 자네가 가르쳐 준 골키퍼와 수비수의 동선에 대해 말해 주더군. 수비 라인에 대해서도 경기 중 수시로 지시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거야 실제로 그랬고, 변명할 이유도 없는 일이다.

“선수의 스카우트는 구단에서 알아서 할 바이지만, 선발은 내 고유 권한이지. FA컵을 통해 나는 프리미어리그 팀과 우리의 실력 차이를 알고 싶다. 그리고 자네와 내가 힘을 합하면 어느 수준까지 해낼 수 있는지 확인하기를 원한다.”

“내게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닙니까?”

“재미있는 말이군. 앞으로 우리 팀이 받아 들 성적이 감독으로서의 나에 대한 평가가 될 테니 조금은 부담스러워해도 괜찮을 걸세.”

말을 마쳤다는 것처럼 시계를 확인한 마틴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점심 전인데 어떤가? 기예르모(Guillermo)와 인사를 나누는 것은?”

“오늘 나와 있습니까?”

“자네를 무척 보고 싶어 하더군.”

시간이 아직 여유 있어서 정지우는 그러겠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함께 사무실을 나서 선수용 터널을 지나 그라운드로 나섰다.

5명의 선수가 편한 복장으로 공을 주고받고 있었고, 골대 한쪽에서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골키퍼가 캐치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마틴이 손을 높다랗게 들어서 골키퍼 코치를 불렀는데, 엉뚱하게도 그라운드 가운데서 공을 주고받던 선수들이 먼저 다가왔다.

“Ji! 오늘 볼 줄은 몰랐는데!”

맥슨, 포그이, 꼼빠니, 무둔바, 브라운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스페인 출신이라는 골키퍼도 다가왔다.

“기예르모, 누군지 알겠지?”

놈은 정지우를 보고는 급하게 먼저 장갑을 벗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를 알고 있었어?”

“FA컵 경기에서 Ji는 유명하죠. 특히나 골키퍼 사이에서는요.”

잘생기고 코가 높다란 데다 분위기 있는 눈을 가진 스페인 놈이 영어로 건넨 말이었다. 기예르모의 영어는 스페인 억양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마치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들렸다.

“한 팀에서 뛰게 돼서 기쁩니다.”

정지우는 ‘뭐 그런 거로?’ 하는 표정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점심 먹을 거지?”

“응. 오후에 간단하게 몸을 풀고 가려고.”

꼼빠니와 대화를 주고받은 뒤에 다 함께 식당으로 움직였다. 오전 11시 30분쯤 된 시각이었다.

점심을 먹은 정지우는 2층으로 올라가 자전거와 기구를 이용해서 한 시간 반가량 땀을 흘렸다.

“후!”

긴 비행으로 쌓인 피로가 몸을 타고 흐르는 땀에 녹아서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다.

당연하게 샤워를 마쳤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오후 4시쯤이었는데 정지우는 우선 빌의 집으로 향했다. 벌써 열흘 가까이 보이지 않는 것이 궁금했고, 다음으로 웨스트 브로미치와의 FA컵 입장권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벨을 누르자 샌디가 나왔고, 무척이나 반갑게 정지우를 맞아 주었다.

잠시 안부를 나눈 다음이었다.

“빌은요? 요즘 통 안 보이던데?”

혹시나 다친 것은 아닐까 싶어서 정지우는 조심스럽게 빌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걱정할 것 없어, Ji. 골키퍼를 지원한 이후로, 학교 수업을 마치면 연습하느라고 늦게 돌아와. 2주 뒤에 있을 경기에 Ji를 초대하고 싶은 모양이던데?”

정지우의 자칭 친구인 빌이 골키퍼 훈련에 시간을 보낸다는 소식이 어쩐지 웃겼다.

정지우의 미소를 본 샌디가 비슷한 모습으로 웃었다.

“샌디, 이거 내일 있을 웨스트 브로미치와의 티켓이에요.”

“오! Ji! 이렇게나 큰 선물을!”

상상하지 못했던 입장권에 샌디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Ji 덕분에 우린 지난 리그 경기도 모두 볼 수 있었어. 그리고 그 경기를 보면서 빌이 좀 더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세운 것 같고.”

샌디가 팔을 커다랗게 벌려서 정지우를 안아 주었다.

나이로 따져도, 덩치로 따져도 아주 큰누나나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막내 이모뻘이다.

“고마워, Ji.”

“내 소중한 친구에게 주는 작은 선물일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 빌이 축구를 계속할지는 알 수 없어도 Ji의 선물을 통해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는걸. 고마워. 정말 고마워, Ji.”

샌디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내일 세 식구가 함께 응원하겠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이들이 주는 응원이 내일의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각오를 심어 주고, 버거운 상대를 만났을 때 커다란 힘이 된다.

“그만 가 볼게요. 토미와 빌에게 안부 전해 줘요.”

“내일 멋진 경기 기대할게.”

정지우는 샌디와 인사를 나누고 아파트로 움직였다.

오후 5시 10분쯤이었다.

유정호는 정지우가 들어서자 전화기를 들고 몸을 돌렸다.

“예. 그럼 이만 끊을게요. 내일 경기 때문에 준비할 게 많아서요. 고생은요? 당연히 내가 할 일입니다.”

서울이 새벽 2시쯤일 텐데? 그리고 경기를 위해 무슨 준비를 한다는 거지?

정지우는 웃음을 참는 얼굴로 방에 가방을 두고 거실로 나왔다.

“배고프지? 얼른 밥 먹자.”

냄비를 꺼내 든 유정호가 힐끔 정지우를 살폈다.

“준석이 이적 문제 의논하느라고 그런 거야.”

“누가 뭐랬어? 난 괜찮아, 형. 형이 큰누나 만나는 거 나쁘지 않으니까 내 눈치 볼 거 없어.”

“그래?”

유정호가 반가운 얼굴로 정지우를 주방에서 밀어냈다.

“내일 아침까지만 챙겨 줄게. 그리고 나도 내일은 런던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마틴 감독이 다른 말은 없었고?”

“일찍도 묻는다. 내일 경기에 대해 의논한 게 전부야. 새로 온 골키퍼와 인사 나눴고.”

“그래. 잘됐다.”

뚝딱뚝딱, 그리고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준비한 저녁을, 마틴 감독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먹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조금 늦긴 했는데 이제부터라도 정말 제대로 해 보고 싶어.”

“목표는?”

“발롱도르.”

유정호가 풋 하고 밥풀을 토해 냈다.

“뭐야? 형? 선수가 비장하게 목표를 말하는데!”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앞으로 좀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제발 발롱도르 거머쥔 선수 에이전시 한 번 하게 해 주라.”

“글쎄?”

정지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유정호가 ‘야! 그거 무슨 뜻이냐!’ 하며 따지고 들었다.

얼마 전까지 외롭기만 하던 저녁이었다.

그런데 박용근과 전은주를 만나고 나서 희망이 넘실거리는 저녁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컵 대회와 얼마 남지 않은 리그 경기에 최선을 다할 때였다.

목표한 것들을 손에 쥐기 위해서.

***

버밍엄 로드에 있는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온의 홈구장 더 호슨스(The Hawthorns)는 싸구려 패널로 외벽을 둘러놓은 것처럼 첫인상은 허술해 보였다.

그러나 쇠창살 안쪽으로 잘 관리된 잔디와 2단으로 구성된 멋진 관중석을 지니고 있어서 안과 밖이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경기 시작 전, 선수들이 몸을 푸는 시간부터 호슨스는 홈 관중들이 부르는 열광적인 응원가로 선수들 간의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Ollez! Ollez! Ollez! Oh-!”

일정하게 울리는 북소리에 따라 박수를 치며 응원가를 부르는 관중들. 그리고 그들의 절반쯤은 제자리를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Ollez! Ollez! Ollez! Oh-!”

동그란 안경을 낀 여자 관중부터, 영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어린아이, 젊고 단단하게 생긴 남자, 흰색의 짧은 머리를 멋지게 넘긴 중년, 아직도 정정해 보이는 노부부까지.

“West Borm FC!”

그들 모두가 목청껏 질러 주는 응원가는 홈팀 선수들의 투쟁심을 자극하고, 그에 맞서야 하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진다.

“From the Black country!”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둥.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Ollez! Ollez! Ollez! Oh-!”

호슨스가 떠나갈 것처럼 우렁찬 응원가를 그들은 계속해서 불러 댔다. 그들이 얼마나 FA컵 8강 경기에서 승리를 원하는가를 알려 주겠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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