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4화 (64/262)

제7장. 비기거나 이기는 경기 중 하나 선택해. (1)

아무리 2부 리그인 챔피언십이라고 해도 감독이 선수의 입국에 맞춰 공항에 나와 있는 것은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비행은 어땠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도착 시간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미스터 유와 일정에 대해 통화하던 중에 들었다.”

마틴과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정지우는 새삼 영국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유정호와 인사를 나눈 마틴이 스크립터인 클락을 그에게 소개한 뒤에 시선을 돌렸다.

“아파트로 갈 거지?”

“그래야죠.”

“차를 가져왔으니까 함께 움직일까?”

“고맙습니다.”

드르르르르.

커다란 가방을 끌고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클락은 덩치가 커다란 왜건 승용차의 문을 열었다.

가방을 뒤에 실은 다음 클락이 운전석, 유정호가 앞자리, 그리고 정지우와 마틴이 뒷자리에 앉았다.

박용근의 차와는 달리 듬직한 엔진 소리와 함께 왜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을 다녀와서 그런가. 하루쯤 지나면 또 익숙해질 것들이지만, 왼편으로 달리는 자동차, 오래된 건물들, 그리고 상점의 모습들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브라질전 전반에 보여 준 활약은 인상 깊었다.”

뒷좌석 문고리에 오른팔을 걸친 마틴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한국팀은 기복이 심하더군.”

“교체한 선수들 간의 호흡이 아쉬운 경기였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 마틴은 잠시 운전 중인 클락에게 시선을 주었다.

“브라질 경기는 늘 관심의 대상이지. 전반전 덕분에 자네에 대한 평가가 좀 더 올라갔을 걸세.”

“그렇군요.”

아무렴 평가전 전반만으로 크게 달라질 게 있겠나.

정지우는 그저 듣기 좋은 소리를 했구나 하는 심정으로 받아넘겼다.

“기예르모(Guillermo)라는 스페인 출신 골키퍼를 임대 후 이적 형태로 급하게 데려왔다. 자네가 없어서 서브 선수가 필요하기도 했고, 승격이 된다면 골키퍼가 3명은 필요하니까.”

골키퍼 같은 특수 포지션에 서브를 두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독이 공항에까지 나와서 급하게 전할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팀에서 국가대표가 나올 줄은 몰라서 방심했었던 거지.”

분명 할 말이 있는데 엉뚱한 말만 건네는 느낌이었다.

유정호나 클락 때문에 못하고 있는 건가?

긴 비행으로 쌓였던 피로가 자동차의 진동을 타고 올라와서 정지우는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정신이 조금은 맑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틀 뒤에 FA컵 8강전, 그리고 다시 이틀 뒤에 로드럼 유나이티드와의 43라운드 리그 경기가 있어.”

도로 옆으로 선 건물들이 그려 낸 그림자를 연달아 맞으며 마틴은 미안한 얼굴이었다.

“시차를 극복하기 쉽지 않겠지만, 나는 FA 경기를 자네에게 맡기고 싶다.”

“상대 팀은요?”

“프리미어리그 8위에 있는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온 원정 경기다. 쉽지 않은 게임이 될 거야.”

FA컵 8강전을 두고 욕심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인 거다.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일 때 유정호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있었다. 선수 선발에 관한 대화에 에이전시가 끼어들기는 어려워서 모른 척하는 게 분명…….

“드르릉.”

그때, 유정호의 코 고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서 정지우는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고 말았다.

“피곤했던 모양이군. 자네도 마찬가지겠지.”

뜻밖에도 유정호는 잠을 자는 것으로 정지우의 컨디션을 대변해 주었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그는 에이전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였다.

“내일 훈련이 있습니까?”

마틴이 고개를 저었다.

“내일 자네가 나오겠다면 나도 그 시간에 맞춰서 나가도록 하지. 몇 가지 의논하고 싶은 것도 있고.”

“오전 10시 어떻습니까?”

“좋군. 그 시간에 사무실에서 보기로 하지.”

긴 비행도 비행이지만 좁은 좌석에 오래 앉았던 탓에 허벅지와 정강이에 피로도가 제법 있었다.

정지우는 양손을 뻗어 허벅지를 천천히 눌러 주었다.

이런 피로가 부상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피로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휴식밖에 없다.

마틴이 공항까지 나온 이유도 그런 것들을 짐작한 미안함 때문일 거다.

“괜찮다면 마사지를 받을 수도 있는데 어떤가?”

“오늘은 일단 쉬겠습니다. 내일 간단하게 몸을 푼 뒤에 필요하다면 요청하죠.”

“그러지. 클락! 내일 점심 이후에 Ji가 마사지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부상이 아니라면 구단에 소속되어 있는 프로 선수가 감독의 선발에 거부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런데도 마틴은 정지우를 최대한 존중해 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이제 정지우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경기에 나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일인 거다.

“앞선 두 경기 결과는 들었습니다.”

“자네가 왔으니 좋은 결과도 있겠지.”

정지우가 피식 웃자 마틴이 계면쩍은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낯간지러워서 웃었던 건데, 마틴은 아스널전 이후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민망한 눈치였다.

2시간 가까이 간간이 대화를 나누었는데, 한국에서 있었던 평가전에 관한 질문이 거의 전부였다.

***

커다란 화환을 들고 트럭으로 향하는 박용근의 뒷모습이 애처로워서 전은주는 애꿎은 장미 다발을 매만졌다.

동대문의 1번 개라던 박용근이다. 거칠 것 없고,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던 남자.

그런 박용근이 전은주에게만큼은 늘 지고 살았다.

딱 한 번, 무서운 눈빛을 하고 고함을 질렀던 이후로 쭉.

‘이제 그만해, 제발.’

‘미쳤어! 고작 그런 이유로 결혼을 못하겠다는 게 말이 돼!’

그날 박용근의 인상이 너무 무서워서 전은주는 떨리는 손을 꼭 쥐었다.

‘그럼 어쩌자구! 나 애기를 못 가진다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나중에 분명 원망할 거야!’

무서운데, 박용근의 쭉 찢어진 눈과 험악하게 구긴 인상에 손이 벌벌 떨리는데, 이상하게 그런 모습이 고마워서 자꾸만 눈물이 올라왔었다.

“푸흐흐흐.”

박용근이 넋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마음을 잡았나?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은주야.”

이제 끝났구나.

박용근의 착 가라앉은 음성을 듣는 순간, 전은주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내가 너한테 돈 요구한 적 있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면 집이나 차를 사 달라고 하디?”

전은주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 박용근이 찢어진 눈을 늘이며 웃었다.

“그런 거 없어. 그냥 너 하나만 있으면 돼. 너도 나 닮은 애 만들려고 나랑 결혼하려던 거는 아니잖아.”

사람이 비유를 해도 어쩌면 저렇게 무식하게…….

“나 좀 봐라. 눈 찢어졌지, 인상 더럽지, 성격 지랄 같지, 세상에 어떤 여자가 날 사람 취급이나 하겠냐?”

“용근 씨가 왜? 누가 그런 소릴 해!”

전은주는 갑자기 울컥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그때 전은주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주던 박용근의 투박한 손이 얼마나 고맙고 따듯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난 축구만 알고 살았다. 그것처럼 여자라곤 당신밖에 몰라. 평생 그렇게 살게.”

“나중에라도 후회되면 어쩌려고?”

“축구 한 거 후회해 본 적 없다. 당신 만나고 결혼하는 것도 내겐 그런 거야. 지금은 다짐뿐이지만, 그냥 한번 믿어 주라. 살면서 증명할게.”

이런 남자라면 한 번쯤 속아도 되지 않을까?

상처가 아무리 아프고 크더라도.

“참! 우리 어머니한테는 나한테 문제가 있어서 애 못 낳는다고 했어. 그래서 당신 설득하는 중이라고 그랬으니까 다른 소리 하지 마. 알았지?”

바보처럼 울음이 터졌을 때 박용근은 말없이 안아 줬었다.

결혼하고 얼마 뒤부터 3년 넘도록 암과 싸우던 시어머니의 곁을 악착같이 지켜 낸 힘도 그때 얻었었다.

“미안해서 어쩌니?”

시어머니는 마지막 순간에 아들 박용근보다 며느리인 전은주의 손을 쥐고 있었다.

“저놈 사람 만들어 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제가… 제가 어머니 속였어요.”

“이렇게 착하니까 우리 아들 사람 만들어 준 거겠지.”

전은주가 눈물을 줄줄 단 얼굴을 들었을 때 암과 싸우느라 바싹 말라 버린 시어머니는 가냘프게 웃고 있었다.

“저놈이 속 썩이면 내가 꿈에라도 나타나서 혼내 줄게. 그러니까 절대 그런 거로 기죽지 마.”

“어머니……?”

“내가 미안하다. 고맙다……

“안 돼요! 어머니! 어머니!”

볼을 만져 주던 시어머니의 손길은 또 얼마나 따듯했는지.

“당신,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때 박용근이 손을 털며 들어와 전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힘들지? 커피 마실래?”

“커피는 됐고. 무슨 일이야?”

“그냥, 당신이 멋있어 보여서 그래.”

“이 사람이.”

박용근이 어이없는 얼굴로 웃을 때였다. 꽃집 문이 열리며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박용근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젖힌 전은주의 시선에 상체를 숙이며 인사하는 신준석이 들어왔다.

“감독님!”

그리고 그 뒤로 서 있는 4명의 제자들 역시 신준석과 비슷한 자세로 박용근과 전은주를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너희가 어쩐 일이야?”

“준석이가 연락했었는데 감독님 찾아뵙는다고 하기에 따라왔습니다. 연락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시즌 중인데 시간이 났어?”

“A매치 기간이라 내일까지 휴식입니다.”

박용근의 앞에서 제자들은 자꾸만 뒤통수를 만지며 답을 했다.

“여보, 나가서 저녁 먹어. 삼삼이네 가면 되겠다.”

“그래? 당신은?”

“난 집에 가서 먹으면 돼.”

“사모님, 그러지 말고 함께 가세요. 그래서 일부러 저녁 시간에 맞춰 온 거예요.”

신준석이 권하고 나서자 다른 선수들도 박용근보다 전은주가 더 보고 싶었다며 거들었다.

“여보, 같이 가.”

“모처럼 왔는데……. 난 가게 정리하고 들어갈 테니까 당신 편하게 있다가 들어와요.”

“사모님, 밖에 있는 거 들여놓으면 되는 건가요? 그럼 저희가 정리 도와드릴 테니까 함께 가세요.”

“아니, 그게…….”

“야! 뭐하냐? 얼른 저거 안으로 넣자!”

우르르.

덩치 좋은 선수들이 나가더니 들여놓지 않는 진열대까지 들기 시작했다.

말리고, 말리다가 결국 전은주도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앞에서 걷고 있는 신준석 포함 5명에 정지우까지 6명의 선수들을 가리키는 명칭이 소위 ‘박용근 키즈’였다.

고등부에서 정지우를 중심으로 한 박용근 키즈의 위력은 참 대단했었다. 어느새 훌쩍 커서 앳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박용근과 전은주가 보기엔 아직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삼삼이네에 있는 고기를 바닥낼 것처럼 먹었다.

시즌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용근이 주의를 준 탓에 술은 소주 2병과 맥주 3병이 전부였다.

“그때, 아후! 지우 엄청났어요!”

덩치가 커다란 이정렬이 시커멓게 탄 얼굴로 감탄사를 연신 뱉어 냈다.

“게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쭉 모였을 때요.”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정지우의 일이 있고 나서 의도적으로 이런 모임을 피한 것도 한몫했을 거다. 소속팀에서 눈치 보게 하지 않으려는 박용근의 배려였다.

“지우가 늘 그랬어요. 절대 지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비기거나 이기는 경기 중 하나 선택하라고요.”

이정렬이 몸서리를 치는 것처럼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었다.

“상대 팀 선수들 버릇, 습관, 그리고 움직임을 예상해서 어떻게 하라고 알려 줬었거든요. 신기하게 딱딱 들어맞는데 그땐 그냥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신준석이 고기를 입에 넣으며 이정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그때 지우처럼 해 보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야! 그때는 지우가 있었으니까 그런 거지!”

“너도 그렇지? 골대를 확실히 지켜 준다는 믿음이 있는 것과 아닌 게 엄청나게 다른 거? 그거 맞지?”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니지! 무조건 실점했구나 싶은 걸 막은 다음에 지우가 우리 바라보던 거 생각해 봐! 아후! 그 왜? 온몸에 소름 쫘르르 돋으면서 그때부터 막 뛰게 되잖아!”

“그래! 그거라니까!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거!”

좋았다.

제자들이 이렇게 쭉 몰려와 그때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거, 그리고 박용근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떠드는 낯간지러운 대화가.

3시간에 걸친 저녁이 끝나고 일어났을 때였다.

이제는 박용근의 인상이 먹히질 않았다. 그래서 제자 둘이 박용근을 끌어안으며 막았고, 서로 누가 연봉이 많은지를 자랑하다가 결국 신준석이 계산을 마쳤다.

“감독님!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제자들이 한참이나 박용근과 전은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전은주는 박용근의 팔에 매달리는 것처럼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 오늘 정말 멋있는 거 알아?”

“푸흐흐. 아줌마, 나이를 생각하세요.”

전은주 몰래 낮에 나가 달리고 있어서인지 박용근의 몸이 전보다 훨씬 빠져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꽃집? 그걸 무리라고 하면 당신은 쓰러지겠다.”

낡은 빌라로 향하는 그 길에서 전은주는 박용근의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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