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3화 (63/262)

제6장. 부럽다, 박 감독. (3)

결국, 호텔 객실에 둘만 남았다.

“편한 옷 좀 있냐?”

“예. 안에 있어요. 얼른 가져올게요.”

정지우는 그나마 헐렁하고 짤막한 옷을 골라 박용근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반바지는 무릎을 지났고, 면 티의 소매는 팔을 완전히 덮고 내려와서 탈춤을 추는 사람의 형상이었다.

“푸흐흐.”

박용근이 팔과 다리를 들어 보이면서 웃는 바람에 정지우도 그만 참지 못하고 함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둘이서 별것도 아닌 거로 한참을 웃었다.

“이게 정말 너한테 맞는 팔 길이냐?”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른 걸 찾아볼게요.”

“놔둬라. 이거 편하다.”

박용근이 소매를 쭉 걷어 올리고 탁자에 앉았다.

“앉아 봐라. 거기 물 한 병 가져오고.”

정지우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으며 박용근의 맞은편에 앉았다.

창틀, 냉장고, 소파, 테이블, 심지어 TV까지 모두 낡은 호텔의 객실이었다. 빨리 돈을 벌어서 박용근을 좀 더 고급스러운 곳에 모시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한국에 축구 교실 만드는 조건을 달았다면서?”

정지우의 얼굴을 본 박용근이 물병을 집으며 말을 이었다.

“유 대표에게서 말 들었다. 그거 그러지 마라.”

“감독님, 그건 저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다.”

박용근이 단호한 얼굴로 정지우의 말을 잘랐다.

“축구 교실을 만들면 어떻게든 협회와 부딪치게 돼. 국가대표까지 그만둔다고 했는데 앞으로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또 그것대로 말만 나온다.”

박용근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을 천천히 마셨다.

“어흐, 시원하다. 네가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해서 중계방송 편하게 볼 수 있고, 휴식기에 이렇게 얼굴 볼 수 있다면 그걸로도 난 더 바라는 거 없다. 그러니까 나랑 우리 집사람 걱정하지 말고 네 경기에 충실해. 알았지?”

축구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박용근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정지우는 함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지우야.”

“예, 감독님.”

“경기 끝나는 다음 날이면 전화할 거고, 보고 싶어도 또 전화할 거고, 너 좋아하는 음식, 수시로 음식 보내고도 전화할 거다. 우리 이제 그렇게 지내자. 그거면 된다.”

“감독님?”

박용근이 손을 뻗어 정지우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 녀석이 이제 머리가 컸다고 말을 안 듣네?”

스물여섯의 정지우는 머리를 다듬으면서 웃었다.

“멀리 보고 높이 가라. 내가 원하는 건 그거다. 네가 우승 트로피 안는 날이 있으면, 이 박용근의 제자가 저런 선수가 된 거라고, 김문호 불러서 삼겹살 사게 하는 게 내겐 최고의 선물이다. 알았지?”

박용근의 작은 눈이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

답을 들은 박용근이 눈끝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자야지.”

“벌써요?”

“선수가 늦잠 자는 건 독이야. 프로 선수라면 특히 컨디션 관리에 신경 써야지.”

박용근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욕실로 들어갔다.

정지우가 거실을 대강 정리하고 간단하게 씻고 나왔을 때, 박용근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지우가 들어가 협탁 건너편의 빈 침대에 누운 다음이었다.

“만나는 여자는 없냐?”

“예.”

“못났다, 너.”

둘이서 바람 빠지는 것처럼 실없이 웃었다.

“술 멀리하고, 담배는 쳐다보지도 마라. 네가 프리미어리그로 가게 되면 유혹도 있을 거다.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그런 유혹을 견뎌 내는 것도 경기만큼 중요해.”

“예.”

말을 마친 박용근은 잠시 후 나직하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

끔찍한 한 주였다.

승점 1점만 채우면 자력으로 프리미어리그로 직행할 수 있는데 41라운드와 42라운드, 두 게임을 모두 놓쳐 버린 터라 마틴은 머리에 쥐가 나는 것만 같았다.

특히나 후반 45분까지 일대일로 끌고 나가던 42라운드 리들즈와의 경기가 아팠다. 후반 추가 시간인 3분이 거의 끝나갈 때 마무리하듯 차 버린 중거리 슛이 그렇게 들어갈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나.

최근 두 게임에서 얀센은 완전히 기가 꺾인 느낌이었는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후우.”

마틴은 나직하게 숨을 뱉어 냈다.

정지우가 한국으로 간 사이 선수들은 무언가 구심점을 잃은 모습이었다.

열심히는 뛴다. 평소대로 하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성과가 나오지 않으니 미칠 노릇인 거다.

벌써 정지우의 원맨팀이 된 거라고?

공연히 손바닥을 비빈 마틴이 책상에 팔을 걸치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내일이면 Ji가 돌아온다.

돌아오자마자 FA컵 8강전에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강등권 팀과의 리그 경기가 기다리는 것이 미안하지만, 그래도 정지우가 돌아오는 것이 마틴으로서는 반갑기만 했다.

‘어떻게 하지?’

오자마자 FA컵을 맡겼다가 컨디션을 망치거나 부상이라도 당하면 승격이 위태로워지고, 그렇다고 8강까지 올라온 FA컵을 버리기도 그렇고.

마틴은 기가 차다는 느낌으로 웃었다.

FA컵을 기대하다니?

이게 모두 다 그 코리안 때문이다.

이름이나 겨우 알았던 정지우가 가져온 변화.

***

잘 자고 일어나 아침 인사 나누고, 박용근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지내는 그 짧은 시간이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거기에 아침 일찍 달려온 전은주가 찬합과 보온병에 담아 온 아침을 테이블에 차려 주었다.

그냥 축구를 가르친 선수일 뿐이다. 게다가 정지우가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박용근은 청소년 대표 감독에서 밀려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주는 변함없는 깊은 사랑이 고마워서, 정지우는 자꾸만 가슴 저 깊은 곳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띵동. 띵동.

밥을 먹고 있을 때 벨이 울렸고, 유정호가 커다란 가방을 끌며 객실로 들어섰다.

“아침 드시네요?”

“자네는 어떻게 했어? 안 먹었으면 얼른 와.”

“먹기는 먹었는데, 제 것도 있나요?”

아침을 먹었다던 유정호가 달려들면서 역시나 찬합과 보온병에 남는 음식은 없었다.

“출발해야지?”

“예, 대충 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

유정호가 시간을 확인하며 답을 하자, ‘가자. 태워다 줄게.’ 하고 박용근이 먼저 나섰다.

거절하기도 그렇고, 넙죽 그래 달라기도 어려웠는데 전은주까지 앞서는 것을 말릴 방법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한 뒤에 넷이서 프런트로 내려왔다.

“계산은 제가 했습니다. 지우가 많이 벌거든요.”

“이게 그거랑 같아? 이 사람이 서운하게!”

드르르르르.

호텔에서 나오면 바로 주차장이었다.

다 함께 박용근의 오래된 승용차로 움직였다.

끼이익!

커다란 가방을 트렁크에 넣을 때, 그리고 넷이서 안에 앉을 때마다 낡은 승용차가 힘겹다는 것처럼 비명을 토해 냈다.

부르르르르릉.

출발이다.

엔진 소리는 시속 100킬로미터 수준인데 차는 걷는 것처럼 호텔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유 대표, 지우 집 옮기면 바로 주소 꼭 알려 주고.”

“예, 그러겠습니다.”

“국제 전화 카드로 전화할 테니까 모르는 번호 뜨더라도 전화 꼭 받아라.”

“예, 감독님.”

박용근이 대화를 끊지 않으려는 것처럼 자꾸만 말을 걸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좌석을 배정받고 그곳에서 짐을 부쳤다. 일찍 출발한 덕분인지 시간이 넉넉해서 넷이서 라운지에 들렀다.

녹차 3잔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홀로 커피를 앞에 둔 유정호가 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 아, 윤희 씨? 저 유정호입니다.”

박용근과 전은주, 정지우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공항이거든요. 혹시 준석이 있으면 좀 바꿔 주세요.”

신준석의 번호를 빤히 알면서 왜 그놈 큰누나에게 전화를 하는 거지?

“응, 나다. 우리 공항이라 지우랑 인사하라고 전화했다.”

유정호가 대뜸 전화기를 정지우에게 건네주었다.

바보도 아니고, 뭔가 이상한데 그렇다고 전화를 거절할 것도 아니어서 정지우는 일단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가냐? 서운해서 어쩌냐?]

“잘돼서 영국에서 보면 되지.”

[그래, 그러자. 난 내일 출발할 거니까 감독님께는 내가 따로 전화드릴게.]

사내자식들끼리 다른 인사 길게 할 것 없는 거다.

대강 서너 마디를 더한 다음 전화를 끊었는데, 전화기를 받은 유정호는 곧바로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윤희 씨, 전화가 끊겼네요. 아침부터 미안합니다.”

이 형은 영국 미인이 좋다고 하지 않았었나?

“유 대표, 괜찮으니까 저쪽에 가서 편하게 통화해.”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고개를 숙여 보인 유정호가 실제로도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우야, 몸 건강한 게 최고야. 부상 조심하고.”

“예, 그럴게요.”

“밥 꼭 챙겨 먹고.”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전은주가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정지우를 챙겼다.

“감독님, 사모님, 이제 자주 연락드릴게요.”

“그래야지. 우리 그러고 살자.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곳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고 연락하고.”

“예.”

유정호가 저쪽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것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아쉬움이 붙들기엔 힘이 부쳤는지 시간이 훌쩍 흘렀다.

“들어갈 시간입니다. 지우야, 일어나자.”

내내 전화를 붙들고 있던 유정호가 다가왔고, 정지우와 박용근, 전은주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국이다.

박용근은 변함이 없었는데 전은주는 벌써부터 붉게 물든 눈을 하고 있었다.

“감독님, 연락드리겠습니다. 몸 건강하세요.”

“그래.”

박용근이 짧은 인사와 함께 정지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사모님.”

“지우야…….”

전은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건강하세요. 자주 연락드릴게요. 이번에 감사했습니다.”

“그래, 조심하고.”

정지우는 상체를 기울여 조심스럽게 전은주를 안았다. 울음을 참는 전은주의 숨소리가 좀 더 가까이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유정호의 인사가 헤어질 시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지우는 마지막으로 박용근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게이트로 들어갔다. 여권과 티켓을 확인받은 후에 고개를 돌렸을 때, 박용근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고, 전은주는 훌쩍이는 얼굴이었다.

비행은 늘 지루하다.

그래서 가끔은 누군가 아는 사람이 함께 다니면 어떨까 싶었는데, 정지우는 그런 생각을 이번 영국행 비행기에서 모두 털어 버렸다.

유니온 시티의 상황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었다.

“그래서 윤희 씨하고는 거의 한 식구 같은 거구나?”

“3년을 봤으니까.”

“집에도 자주 갔었다면서?”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옆에서 유정호의 관심은 온통 신윤희에게 있었다.

“내일부터 준석이 옮길 만한 팀이 없는지 뛰어다녀 봐야겠다.”

정지우가 힐끔 바라보자 유정호가 억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그 녀석도 그렇고, 가족들도 그렇고, 영국에 있으면 서로 얼마나 좋겠냐? 너도 싫진 않잖아?”

“형은 영국 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에이! 그거 아니더라구. 음식이나 뭐 정서, 이런 게 맞아야 좋은 게 아닌가 싶다.”

정지우는 한숨처럼 웃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 번? 아니 두 번 본 건가?

그런데 저렇게 좋아질 수도 있나?

아까 공항에서 그렇게 길게 통화한 걸 보면 신준석의 큰누나 신윤희도 싫지 않은 걸 텐데…….

다 부질없는 생각인 거다.

정지우는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잠을 청했다.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이곳에서 다시 전철을 이용해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버스로 2시간가량을 달려야 유니온 시티가 나온다.

입국 수속을 마친 정지우가 가방을 찾아 대합실로 나왔을 때였다.

“Ji!”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을 때, 유니온 팀 스크립터 클락이 마틴의 곁에서 오른팔을 든 채 정지우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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