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부럽다, 박 감독. (2)
전반 종료 휘슬이 울린 직후에 문광국은 전용 터널로 빠르게 움직였다. 표정을 감추려고 애썼지만, 굳어진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멍청한……!’
문광국은 치솟는 욕을 꿀꺽 삼켰다.
국가대표 정도 되면 정말 재능은 거기서 거기다. 다만, 슬럼프에 깊게 빠지는 경우가 있고, 다음으로는 재능이 없는 놈들이 국가대표가 되는 수가 있기는…….
문광국은 이를 악물며 떠오르는 생각을 털어 냈다.
‘이 나쁜 새끼! 개새끼!’
이게 모두 그 빌어먹을 정지우 때문이다.
청백전에서는 대가리를 디밀고 악을 써 대서 분위기를 망쳐 놓고, 브라질전 전반에는 더럽게 좋았던 운을 마치 실력인 양 설쳐서 선수들, 특히 이진용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젠장!”
스태프 대기실에 들어선 문광국은 전술판 앞으로 움직이며 욕을 뱉어 냈다. 아직 신동수가 들어오지 않아서 그나마 감정을 쏟아 낼 수 있었다.
‘이 경기에 전부 걸렸어.’
전화기로 들은 조동익의 음성만으로도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것 같았다. 그까짓 상가 돌려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까지 망가지면 앞으로 축구 이력에 뭐가 남겠나.
이를 꽉 깨문 문광국은 매서운 눈초리로 전술판을 노려보았다.
‘이진용을 교체해?’
이것도 사람 환장할 일이다.
부회장이 바라는 유일한 기용인데 만에 하나, 이진용을 빼고 승리하게 되면 다음부터 놈을 기용할 명분마저 빼앗기게 되는 거다.
“에이, 병신 같은 새끼!”
문광국은 또다시 욕을 뱉어 냈다.
뒤늦게라도 좋으니 몸이라도 좀 날리던가. 어쩌면 그렇게 멍하니 서서 공이 들어가는 걸 바라보고만 있는 건지.
“유병조! 이 개새끼!”
도대체 축구를 한 세월이 얼마냐. 툭하면 반칙이나 하지, 감각이나 재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새끼!
조금만 똘똘한 개나 원숭이를 골라 훈련시켜도 그 정도는 해낼 것만 같았다.
“에이!”
문광국이 성질을 토해 낸 직후에 신동수가 무거운 얼굴로 들어섰다.
냉정해야 할 때였다.
문광국은 전술판을 보며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신 코치.”
“예.”
“후반에 병조 빼고 박영길이 넣고.”
박영길의 이름을 집어 든 문광국이 유병조의 이름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창진, 이재범 넣어.”
“알겠습니다.”
문광국의 고갯짓에 신동수가 얼른 몸을 돌렸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거기에 신동수가 들어와서 교체를 통보하는 순간, 유병조가 눈을 번들거리며 이진용을 노려보는 바람에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씨발……!”
고개를 숙인 유병조가 나직하게 욕을 뱉어 냈다.
그 욕이 이진용을 향한 건지, 아니면 신동수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교체를 지시한 문광국에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신동수가 애써 모른 척하고 라커룸을 나갔다.
[후반전을 위해 선수들이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 3명의 교체가 있습니다. 조성환, 공주현, 유병조 선수를 빼고 그 자리에 이재범, 이창진, 박영길 선수를 기용했습니다.]
[중원에서 패스를 풀어 보겠다는 의미로 보이네요. 거기에 브라질전에서 골을 넣은 이재범 선수, 그리고 이재범과 호흡이 잘 맞는 이창진 선수를 기용했어요.]
[후반에는 공격을 강화하겠다는 의미일까요?]
[이제는 우리 대표팀. 물러설 구석이 없습니다. 월드컵 예선에 대비한 실질적인 평가전이라고 밝힌 이상, 후반은 중원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펼쳐 점유율을 높여야 하고요. 그를 통해 반드시 만회 골을 넣을 필요가 있습니다.]
[양 팀 선수들 진영을 바꿔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보시기에 우리 대표팀이 오른쪽에서 왼쪽, 유고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공격하겠습니다.]
사회자와 해설자의 음성 저 아래에서 애처롭게 ‘대- 한민국’이란 구호가 울려 나오고 있었다.
황지산이 공 앞에서 주심의 휘슬을 기다렸다.
포메이션은 전반전과 같았다.
문제는 유병조를 대신해 들어온 박영길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공수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는가 하는 거였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을 때,
투욱!
황지산은 박영길을 향해 공을 차 주었다.
축구 역시 다른 구기 종목과 마찬가지로 흐름이 있다.
전반전의 실점으로 기가 꺾였고, 2조였던 선수 셋을 넣으면서 한국 대표팀은 완전히 분위기가 부러진 채 후반을 맞고 있었다.
투욱!
박영길은 곧바로 안동주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우-!”
응원단에서 실망한 함성이 울렸을 때, 안동주가 그대로 돌려준 공을 받은 박영길이 느닷없이 앞쪽으로 길게 차 넘겼다.
경기 시작 후, 채 3분이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가슴으로 공을 받은 이재범이 옆에서 달리는 이창진에게 공을 넘겨주었고,
투욱!
이창진은 그 공을 옆으로 흘렸다.
“우- 와아!”
박영길이 어느새 이창진의 뒤에서 공을 받아서 옆으로 밀었다.
투욱!
이번엔 이재범이었다.
“우와- 아!”
두 번째로 이재범은 공을 잡지 않고 옆에 있던 황지산에 바로 넘겼다.
[황지산! 황지산! 슈우- 웃!]
공은 골대 위를 높다랗게 지나갔다.
“우-!”
[전, 후반 통틀어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 나왔습니다.]
[그러네요. 박영길 선수와 이재범 선수의 호흡이 돋보였어요! 미드필드 진영에서 효과적으로 공을 공급하면서 확실히 공격이 살아났습니다.]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응원 구호가 펼쳐지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입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우리 대표팀, 전반전과 달리 매서운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슈팅이 나온 이후로 한국팀은 중원에서부터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정지우는 입맛을 다시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새로 들어간 박영길과 이재범, 이창진이 미친놈들처럼 달리고 있는데도 안동주는 수비 라인을 올리지 않고 있었다.
후반 15분까지는 셋이 뛰는 것으로 그럭저럭 버텨 냈지만, 20분쯤 되었을 때는 공격과 수비 라인의 간격이 확연하게 벌어졌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였다.
수비 라인을 끌어 올리든가, 공격수들을 다시 물리든가.
문광국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라운드를 노려보았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수비 라인을 조금만 더 올리면 골을 넣을 것 같은데, 그랬다가 실점을 허용하면 변명의 여지도 없다.
이진용이 위기를 막아 줄 수 있을까?
문광국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은 잔인할 정도로 선명한 ‘아니오.’였다.
이진용은 이미 기가 꺾였고, 심지어 슬럼프에 빠졌다. 거기에 타고난 끈기나 재능도 부족한 선수다.
답답해서 문광국은 자꾸만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은 벌써 후반 30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문광국은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주상도와 이진용을 교체해?
“우- 와아!”
그때, 느닷없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문광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격과 수비 라인이 벌어진 한국 진영에서 유고 선수 3명이 달리고 있었다.
[공격수 넷! 수비수 넷입니다!]
[나와야죠! 나와야죠!]
공을 몰고 달려온 유고의 마케바예프가 안동주의 앞에서 강하게 슛을 날렸다.
[마케바예프! 그대로 슛!]
이진용이 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터억!
공은 이진용의 손을 맞고 안으로 흘러나왔다.
이진용이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을 때,
[막아야죠! 걷어 내야죠!]
선수들이 공을 향해 달려들었고,
투욱!
유고 선수가 찬 공이 수비수의 발에 맞고 흘렀다.
이진용이 바닥을 기다시피 공을 향해 움직였을 때였다.
투욱! 철렁!
바로 앞에서 유고 선수가 발을 쭉 뻗었고, 공은 그대로 골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대한민국 대표팀, 또다시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경기장을 감쌀 때, 유고 선수들이 그라운드의 한쪽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세레머니를 펼치고 있었다.
정지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처음은 그럭저럭 잘 막았다. 그런데 기껏 공을 막아 낸 이진용이 왜 저렇게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한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수비수가 한번 걷어 낸 이후까지 바닥을 기고 있었다는 건 솔직히 시선에서 공을 놓쳤다는 변명 외에는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김문호가 바라보는 것을 느낀 정지우는 표정을 감추려고 애썼다. 어쩐지 이곳에서 답답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모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서였다.
TV 화면에 나오는 응원단은 이제 구호조차 외치지 않고 넋을 놓은 표정으로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광국은 또다시 벤치로 돌아가 엉덩이만 걸친 자세로 얼굴을 쓸었다.
공을 빼앗겨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황지산, 슈팅을 막지 못한 안동주, 골을 허용한 이진용이 모두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리더가 없는 팀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경기였다. 성격상 리더인 유병조는 공수 라인의 조절이 안 돼서 교체했고, 실제 주장인 안동주는 골키퍼를 지키느라 앞으로 나서지도 못한다.
이럴 때 정지우 같은 놈이 있다면.
골키퍼를 교체할 수 있다면.
“우-!”
문광국이 앉은 자세에서 시선을 들었을 때였다.
이번에도 똑같이 비어 버린 공격과 수비의 사이로 유고 선수들이 달리고 있었다. 박영길과 이창진이 허덕거리며 악착같이 뛰어들었지만, 유고는 여유 있게 공을 돌렸다.
툭툭! 투욱!
짧게, 짧게 패스를 주고받던 유고 선수 한 명이 한국의 수비수 사이로 빠르게 공을 찔러 넣었다.
불쑥! 툭!
그리고 수비수 사이에서 튀어나온 유고 선수가 발로 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무너지듯 이진용이 몸을 쓰러트렸으나 그의 겨드랑이 밑을 통과한 공은 그대로 골대를 파고들었다.
[우리 선수들, 질 때 지더라도 응원해 주는 축구 팬들을 위해서 좀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보다 못한 캐스터의 따끔한 말이 나왔을 때 이진용은 두 팔을 아래로 쭉 뻗은 채 수비수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선수를 교체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오늘 역시 물론 평가전입니다. 그렇더라도 브라질전에 이어 이런 식으로 무기력하게 패하는 건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절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캐스터와 해설자가 거듭 적극적인 모습을 당부했지만, 남은 10여 분 동안 의미 없이 공을 돌리는 것으로 유고와의 평가전이 끝나고 말았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 거실에 있던 이들 모두 마이신을 생으로 까서 혀에 올려놓은 표정이었다.
“에잇! 쯧! 우리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입맛을 다신 김문호가 고개를 저은 뒤에 몸을 일으켰다.
“저희도 가야지요.”
그러자 거실에 있던 이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준석이 하루 더 이곳에 있겠다고 했다가 부친 신재득의 눈짓에 ‘왜 그러지?’ 하는 얼굴로 가방을 챙겼다.
“오늘 경기 결과가 저러니까 너는 여기 있는 게 좋겠다.”
박용근이 정지우에게 말을 건넨 다음이었다. 전은주가 박용근과 정지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도 여기 있어, 그럼. 내가 내일 아침에 식사 챙겨 올게. 지우야, 가방은 그 옷 방에 있는 것만 가져오면 되니?”
“하루쯤 더 있어도 될 것 같은데요?”
정지우가 시선을 돌렸을 때, 유정호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왜? 원래 일정이 모레 나가는 거 아니었어?”
“유니온 상황이 안 좋아. 가능하면 오늘 비행기로 들어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내가 내일로 미룬 거다.”
이제야 왜 신재득이 신준석을 데리고 나가려는지 이해가 됐다. 박용근과 둘이 시간을 보내라는 배려였다.
“몸 건강하게 지내.”
김문호 부부가 먼저 나섰고, 다음으로 신준석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지우야, 프리미어리그 방송 꼭 챙겨 보면서 응원할게.”
신준석의 누나들을 따라 유정호까지 방을 나서서 북적거리던 호텔 거실에 달랑 셋만 남게 되었다.
“여보, 그럼 내일 올게.”
“운전 조심해.”
“알았어. 지우야, 집에서 하루 더 자고 가야 하는데 서운해서 어쩌니?”
“저 때문인데요. 제가 더 죄송하지요.”
정지우의 손을 꼭 잡아 준 전은주가 저녁 싸 왔던 찬합을 들고 마지막으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