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부럽다, 박 감독. (1)
호텔 거실이 비좁을 정도였다.
점심을 준비해 온 신준석 부모를 따라 박용근이 들어왔고, 오후에 나가서 저녁을 준비해 온 신준석의 누나 둘과 가게를 정리하고 온 전은주, 거기에 김문호 부부까지.
거실은 완전히 만남의 광장이었다.
정지우와 신준석, 유정호가 김문호 부부에게 인사를 하느라 좀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대강 정리된 거 같다. 기자들도 관심 끊었고, 기사도 슬쩍 내려간 것 같은데?”
“예.”
“그래도 너는 일단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다.”
아는 기자들을 통해 정황을 알아 온 김문호의 말에 정지우는 간단하게 답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또 이렇게 지나가는 바람처럼 끝나는 거겠지 싶을 뿐이었다. 대신 장진모 기자의 이름과 그의 얼굴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계기는 되었다.
어차피 한 가족 같은 관계이고, 모두 아군이다.
당연히 축구로 화제가 돌아서 브라질전 전반, 잠시 뒤에 있을 유고와의 평가전, 그리고 해외 리그에서 정지우와 신준석이 느낀 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유회처럼 시끌벅적하게 저녁을 먹었고, 치우고 나자 시간이 훌쩍 흘렀다. 유고전 중계 시간이었다. 다들 편안하게 자리 잡고서 TV를 켰다.
역시 중계는 함께 봐야 더 맛이 난다.
화면에서 입장한 선수들이 행사를 위해 서 있었다.
앵커와 해설자가 선수 소개를 하는 동안 거실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TV 화면에 문광국, 신동수, 그리고 이진용의 얼굴이 비칠 때마다 저만치 밀어 두었던 현실이 한 걸음씩 다가왔기 때문이다.
양 팀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나뉘어 섰고, 주심이 선수들과 부심들을 돌아본 뒤에 시계에 손을 올렸다.
삐이익!
[한국과 유고, 유고와 한국의 평가전이 유고의 선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관중들의 함성이 쏟아져 나온 뒤에 익숙한 응원 구호가 TV를 타고 거실을 가득 메웠다.
[문광국 감독이 월드컵 예선에 대비한 실질적인 평가전이라고 밝힌 만큼, 오늘 결과가 상당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선수들, 그동안 예선을 함께 치렀던 선수들인 만큼 오늘은 좀 더 짜임새 있는 경기 운영을 기대합니다.]
[유고 선수들, 공을 돌리며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탐색전의 느낌이 강했다.
공을 따라 우리 선수들이 달려들었다가 바로 뒤로 물러나곤 했는데, 유고 선수들도 무리하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축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한국 대표팀이 수비를 바탕으로 기습을 노린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정지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브라질이 사용했던 4-2-3-1의 포메이션을 들고 나온 우리 팀의 모습이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웅크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유병조의 움직임이 투박하고 거칠어서 4-3-3으로 변형되어야 하는 순간이나 4-3-2-1로 바뀌어야 할 때 삐걱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수의 연결 고리인 유병조가 저렇게 웅크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앞으로 공을 뿌려 줘야 할 타이밍에 지금처럼 뒤로 돌리면 공격하던 선수는 맥이 빠지고, 반대로 수비수들은 조급해진다.
다행히 아직은 유고 팀 역시 무리하지 않고 있어서, 양 팀 선수들이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지루한 경기가 15분 가까이 이어졌다.
[양 팀 모두 신중하게 경기를 풀어 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 선수들 전체가 내려앉은 모양새네요. 안동주 선수를 중심으로 한 수비 라인을 철저하게 아래로 내렸고, 유병조 선수도 중앙선을 넘지 않은 채로 수비에 치중하고 있어요.]
말이 좋아서 신중한 경기이지,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하품이 나오는 경기였다.
전반 15분을 넘어서면서부터다. TV를 통해 전해지는 응원 구호에서도 맥이 빠지고 있었다.
그나마 유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격을 시도하는데 반해 우리 선수들은 모두 수비수라도 된 것처럼 움직였다.
[유고를 상대로 대한민국, 극단적인 수비를 펼치고 있습니다. 마치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수비수처럼 보입니다.]
[문 감독은 철저하게 역습을 계획한 것 같은데요. 유고가 더 자신감을 갖기 전에 미드필더 진영에서 적극적인 몸싸움과 공격을 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우-!”
중앙선 부근에서 공을 잡은 유병조가 대뜸 뒤편에 있는 안동주에게 공을 돌리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굳이 저럴 필요 없는데요. 지금만 해도 황지산과 조성환 선수가 좋은 자리에 있었어요. 신중하게 경기 운영을 하는 것은 좋은데요. 지금 같은 순간에는 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설자가 답답한 감정을 음성에 담았다.
[전반 25분이 되도록 양 팀 유효 슈팅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세요. 유고 선수들은 점점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어요. 특히 10번 선수와 9번 선수가 번갈아 위치를 바꾸고 있는데요. 조심해야 합니다.]
[유고 선수들, 전반 중반에 라인을 서서히 올리면서 대한민국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물러나면 안 돼요. 지금은 물러나지 말고 미드필드 진영에서 강하게 붙어 줘야 합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설명대로 중앙선 부근의 공간을 유고가 점점 차지하고 있었다.
[아! 왜 저기서 물러나죠?]
또다시 공을 뒤로 돌리는 한국 팀을 보며 사회자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탄성 섞인 말을 쏟아 냈다.
[철저하게 지키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는데요. 저런 모습은 오히려 유고에게 자신감만 불어넣어 줄 뿐입니다. 보세요. 유고는 시작과 비교해서 굉장히 라인을 올렸어요.]
[이걸 노렸을까요? 라인을 올린 유고의 뒤 공간이 확실히 전반 초반보다는 많이 비었는데요?]
캐스터의 질문에 해설자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며 자신 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전반 30분쯤 중앙선 부근을 차지한 유고가 점차 유리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케바예프, 페널티 에어리어 앞쪽에서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나와 줘야죠! 지금처럼 물러나기만 하면 안 됩니다. 앞에서부터 막아 줘야 합니다!]
해설자의 지적이 나온 직후였다.
유병조가 뒤에서 발을 뻗었고, 거기에 걸린 것처럼 마케바예프가 앞으로 커다랗게 엎어졌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며 넘어진 마케바예프의 앞으로 달려왔다.
[유고, 한국의 골키퍼 에어리어 정면에서 파울을 얻어 냈습니다.]
안동주와 유병조가 항의했으나 이미 파울이 선언된 다음이어서 전혀 얻을 것은 없었다.
화면에 마케바예프의 발목이 유병조가 내민 발에 걸리는 장면이 정확하게 나오고 있어서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거실에 있는 남자들 모두 유병조가 왜 저렇게 자주 파울을 범하는지 알고 있었다.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거칠게 나오는 것과 부족한 실력을 메우기 위해 파울을 저지르는 것의 차이쯤은 알아볼 수준인 거다.
[공을 패스한 다음에 발이 들어왔네요. 패스를 마음 놓고 못하게 앞을 막아 주는 게 좋았는데요. 위치가 워낙 좋아요. 분명 직접 골대를 노릴 겁니다.]
[유고, 우리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정면에서 프리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진용이 손을 입에 가져가서 수비수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후우.”
그때 김문호가 답답한 것처럼 숨을 토해 냈다.
어딘가 아둔한 움직임, 웅크리고 있다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은, 선수들이 전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나오는 현상이었다.
전술을 이해 못하면 그에 맞는 적당한 움직임을 가져가지 못하고, 그럴 경우 선수들은 감독이 강조한 점만 기억한다.
그러니 우리 선수들의 전반 움직임을 통해 문광국이 ‘수비가 우선이다.’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쯤 상대 팀인 유고도 알아봤을 게 분명했다.
지금의 상황이 바로 그에 대한 답이었다.
화면에 이진용의 얼굴이 커다랗게 잡혔을 때, 정지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된 거냐?’
공을 막겠다는 의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당황한 얼굴로 고함을 질러서도 안 되는 거다.
저런 감정은 누구보다 수비수들이 가장 먼저 알아채고, 다음으로 상대 팀의 공격수들이 알게 된다.
우리 뒤에 골키퍼가 있다고 믿고 최선을 다해 달려들어야 할 수비수들에게 저런 모습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
수비벽을 다섯이나 세우고도 이진용은 거듭 좌우로 주춤대고 있었다.
‘멍청아! 한 곳을 보여 줘! 기 싸움에서 지지 말라고!’
삐이익!
정지우가 이를 깨물며 지켜보는 사이 주심이 커다랗게 휘슬을 불었다.
이진용이 막았으면 싶었다.
저놈과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건 선수들끼리의 문제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나선 이상, 승리 혹은 최소한 지지 않는 경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지우나 가슴을 졸이는 축구 팬이나 다를 바 없는 거였다.
유고 선수 2명이 공을 향해 자세를 숙였다.
주춤주춤.
2명이 순서대로 움직였다.
누가 먼저 차는 거지?
정지우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화면 속에서 먼저 달린 선수가 공을 살짝 밀었다.
“오른쪽!”
정지우가 툭 하고 말을 뱉은 직후였다.
투우욱!
유고 선수가 걷어 올린 공이 화면에서 보기에 오른쪽 골대 끝을 향해 날아갔다.
철렁!
[아! 전반 40분, 대한민국 대표팀,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이진용은 공이 들어가는 그 순간에도 굳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코스가 워낙 좋았어요.]
느린 그림에서 있는 대로 회전을 먹은 공이 커다란 궤적을 만들며 골대의 끝을 파고들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유고 선수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면서 기쁨을 나눌 때였다.
김문호가 궁금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예?”
“오른쪽이라고 했었지? 공을 흘린 다음에 그쪽으로 찰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거다. 혹시 너도 알아본 거냐?”
김문호의 질문을 받은 신준석이 ‘저는 모르겠던데요.’ 하고 답을 했다. 그 바람에 시선들이 다시 정지우에게 몰려들었다.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분위기였다.
“슛을 하는 유고 선수 상체를 보고 짐작했었습니다.”
“뭐? 어떻게?”
“어깨가 왼쪽으로 틀어졌거든요.”
“그럼 왼쪽으로 찰 거라고 의심해야 맞는 거 아니냐?”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공을 그대로 둔 채로 찼다면 왼쪽이 맞을 텐데 앞에서 공을 오른쪽으로 밀어 줬거든요. 그 상태라면 그냥 차도 왼쪽입니다. 그런데 상체까지 왼쪽으로 틀었으니까…….”
“왼쪽으로 감아 찰 거다? 그래서 오른쪽을 노린 거다?”
“예. 있는 대로 감아 차려면 오른쪽 끝을 노려야 각이 나오니까요. 왼쪽으로 그렇게 감아 차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거라서.”
김문호는 물론이고, 거실에 앉아 있던 이들 모두가 감탄하고 놀란 눈을 하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때 골을 먹는 장면이 다시 나왔다.
“어머! 정말 그러네! 말 듣고 나니까 알겠어!”
신준석의 큰누나가 유고 선수의 어깨가 비틀리는 것을 보며 감탄을 쏟아 냈다.
“그걸 아까 그 짧은 순간에 보고 판단했단 거냐?”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는데도 거실에 있는 이들의 관심사는 온통 정지우였다.
“예.”
김문호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고, 박용근은 뿌듯한 얼굴이었으며, 신준석의 가족들은 부러운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저런 걸 알아볼 수 있었냐?”
“예? 무슨 말씀이신지?”
“골키퍼 시작할 때부터 저런 걸 알아봤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김문호는 아예 TV를 외면한 채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닌데요…….”
정지우는 뒷말을 우물쭈물 삼키고 말았다. 낯간지럽게 그런 말을 어떻게 이런 자리에서…….
“아……!”
그때, 신준석이 짝 소리가 나도록 박수를 치면서 김문호과 박용근을 번갈아 보았다.
“너! 그때 했었던 말이 이거야?”
미친놈이 하필이면 이럴 때 기억력이 좋아져서!
정지우가 말하지 말라는 투로 눈짓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우리 2학년 때 전국대회 8강에서 떨어지고 나서요. 감독님! 지우가 그랬었거든요. 졸업하기 전에 꼭 우승컵 안겨 드리고 싶다고요.”
신준석이 나불나불 주둥이를 열었다.
“그때 그랬었어요. 상대 팀 선수들 전부 외우겠다고! 버릇, 습관, 하다못해 표정을 외워서라도 무조건 공 막을 테니까 졸업하기 전에 꼭 우승컵 안겨 드리자고.”
신이 나서 떠드는 신준석의 말에 전은주의 눈이 한순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절대 지지 않는 경기를 할 거니까, 무승부에 대비해서 페널티킥 연습도 해 두라고. 감독님께 해 드릴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꼭 도와 달라고. 부천의 미친… 지우가 그렇게 말해서 그때 다들 이 악물고 뛰었었거든요. 맞지?”
속이 없는지 신준석은 정지우에게 확인까지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한 골을 뒤진 채 전반이 끝났습니다. 잠시 후, 후반전을 이어서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캐스터의 말끝에 전반의 주요 장면이 흘러나왔다.
‘저, 눈치 없는 놈!’
계면쩍어하는 정지우를 신준석의 누나 둘도 감동한 얼굴로 바라보는 앞이다.
“부럽다, 박 감독.”
김문호가 신준석의 가족들을 의식해서인지 점잖은 음성으로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