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일이 커진 모양입니다. (1)
얼떨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를 먼저 보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죄 전화기가 구형이라 인터넷 검색이 되질 않았고, 호텔 거실에 컴퓨터도 없었다.
정지우는 우선 신준석과 함께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 봐야 물론 청바지와 면 티에서 운동복으로 바꿔 입은 거였다.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신준석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었다.
“누구지?”
폴더를 열고 ‘여보세요?’ 했던 신준석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전화기를 얼른 아래로 내렸다.
[야! 신준석! 너 어디야!]
대뜸 들어도 신동수 코치가 악쓰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아버지 신재득의 눈짓을 받은 신준석이 고개를 숙여 입만 전화기에 가져갔다.
“집에 도착했는데요?”
[정지우는? 너 그놈하고 연락 안 돼?]
“파주에서 헤어졌어요. 지우는 원래 전화기 안 가지고 다니잖아요.”
[도대체 왜 허락도 안 받고 그따위 인터뷰를 해! 소속팀에 일찍 복귀하라고 배려해 줬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시선을 들어 정지우를 본 신준석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너 정말 정지우 연락처 몰라?]
“휴대폰이 없다니까요. 나중에 연락해 달라고 내 번호만 줬어요. 그거 길성이랑 애들 다 아는데요.”
[혹시 기자들 연락 오면 너는 아무것도 아는 것 없다고 하고! 정지우랑 연락되면 무조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해! 알았어?]
“예.”
전화가 바로 끊겼다.
“일이 커진 모양입니다.”
신재득의 말에 ‘그런 거 같네요.’ 하고 박용근이 대꾸했다.
곤란한 표정의 남자 넷이 입맛을 다실 때였다.
띵동. 띵동.
느닷없이 객실의 벨이 울려서 네 사람의 시선이 화들짝 문으로 달렸다.
손짓으로 신준석을 막은 신재득이 조심스럽게 문으로 움직였다. 상황이 그렇긴 했는데,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삼류 첩보물에 나오는 어설픈 스파이 같아서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구요?”
“아빠.”
밖에서 여자 소리가 들리자 신재득이 안을 힐끔 보고는 얼른 문을 열었다.
우르르.
여자만 4명이 들어왔다.
정지우와 신준석이 일어나 전은주, 신준석의 모친과 누나 2명에게 번갈아 인사했다.
네 사람은 모두 양손에 보자기로 싼 찬합을 들고 있었다.
어차피 저녁 시간이었다. 8명이 소파로 식탁 의자까지 가져와 다 함께 밥을 먹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수저 가득 밥을 뜬 신재득의 말에 ‘뭐긴 뭐야? 먹고살자는 짓이지!’ 하고 신준석의 모친이 시원하게 대꾸를 하는 바람에 느닷없이 밥풀이 튀어나올 만큼 웃음도 터졌다.
사람이 모였다는 건, 그리고 함께 있다는 건 참 묘해서 그렇게 한 번 웃고 나자 오히려 ‘그래! 이것도 재미다.’란 신재득의 말처럼 상황을 즐기는 분위기쯤 되었다.
소불고기, 돼지 불고기, 쌈, 각종 무침, 하얀 쌀밥, 김밥, 잡채, 생선전까지.
명절이나 잔칫날을 연상케 하는 음식들 앞에서 브라질전을 관전할 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를 이야기할 정도로 여유 있게 밥을 먹었다.
고등학교 3년을 함께 지냈던 사이다.
전은주와 신준석의 모친이 연신 음식을 권하고, 누나 둘이 챙겨 주면서 분위기는 좀 더 화기애애해졌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가져오게 한 신재득이 정지우에게서 잔을 받으며 ‘이 녀석이 벌써 이렇게 커 버렸네.’ 하는 것으로 지난 시간의 공백을 메우기도 했다.
“감독님,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신준석이 박용근의 잔에 맥주를 따라 주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이놈아! 그러게 내가 전화라도 자주 드리라고 했었지!”
“해외에 있었잖습니까? 그래도 준석이 네가 저기 저놈보다는 낫다. 그래도 넌 1년에 한 번은 전화하지 않았냐.”
박용근이 정지우를 가리키며 던진 농담에 작은 웃음이 이어졌다.
“앞으로는 잊지 않고 전화 드릴게요. 사모님, 잔 받으세요.”
신준석이 전은주의 잔에도 술을 따랐고,
“자! 우리 건배합시다.”
신재득의 권유에 다 같이 맥주를 마셨다.
예전부터 워낙 유쾌했던 신준석의 가족들 덕분에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식사였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기 포트에 물을 끓여 차를 한 잔씩 놓았다. 주로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사이 신준석이 포르투갈에 진출하느라 얼마나 애썼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지우야.”
“예.”
“네가 보기에 우리 준석이 어떠냐? 쓸 만하냐?”
신재득의 질문에 정지우는 당장 답을 하지 못했다.
“그냥 어제 브라질전 골키퍼의 입장으로 봤을 때 우리 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그런다. 영국 2부 리그에서는 먹힐 만하냐?”
축구를 하는 아들 뒷바라지한 세월만 따져도 이미 어지간한 전문가 뺨치는 수준인 신재득이었다. 그런 그가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는데 신준석의 가족은 물론이고, 박용근과 전은주까지 궁금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 그 정도를 평가할 수준이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그냥 네 생각만 말해 봐라.”
정지우가 신준석을 바라본 후에 다시 시선을 돌리도록 신재득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석이랑은 워낙 호흡이 잘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솔직히 제가 또 브라질을 상대해야 하고, 지금껏 함께 뛰었던 모든 수비수 중 한 명을 택하라면 준석이를 꼽을 것 같습니다.”
답을 들은 신재득과 그의 가족들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만족감이 피어났다.
“예전에도 이 녀석보다는 네가 뛰어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브라질전의 전반은 특히 그렇더구나. 그래서 궁금했었다. 뻔한 대답을 강요한 것 같지만 그래도 네 말이 고맙다.”
정지우는 슬쩍 박용근을 보고는 시선을 떨궜다.
신재득과 그의 가족이 이렇게 인정해 줘서 자랑스럽다기보다는 가족이 있는 그가 한없이 부럽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2시간쯤 더 시간을 보낸 다음이었다.
“감독님, 그럼 우린 이만 일어날까 합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저도 가 봐야죠. 이 정도면 대강 잠잠해졌을 거 같은데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박용근이 ‘너는 일단 여기서 하루 자.’ 하고 말을 건넸다.
“아버지, 저도 오늘은 지우랑 있을게요.”
“출국은 언제 하냐?”
“사흘 뒤요.”
신재득이 알아서 하란 투로 고개를 끄덕이고 갈 준비를 마쳤다.
“어? 누나! 남은 음식 주고 가지?”
“얘는! 얼마 만에 온 건데 식은 음식을 먹으려고 그래? 내일 아침 챙겨 올 테니까 그거 먹어.”
신준석에게 따뜻한 말을 건넨 가족들이 박용근 내외와 문 앞으로 움직였다.
“감독님,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다른 생각 말고 일단 푹 쉬고 있어. 내일 아침에 올 때는 대강 어떻게 흐를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알았지?”
“예.”
“저녁 잘 먹었습니다.”
전은주와 신준석의 누나들이 정지우를 따듯하게 다독여 준 뒤에 문을 나섰다.
음식 냄새가 아직 가득한 거실에 정지우와 신준석, 그렇게 둘만 남았다.
“아! 한 것도 없는데 더럽게 피곤하네!”
신준석이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고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하루쯤 쉰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모처럼 신준석과 둘이 TV를 보는 거다.
어쩐지 고등학교 합숙 때가 떠올라서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띵동. 띵동.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느닷없이 객실에 벨이 울렸다.
“뭐지?”
신준석이 벌떡 일어났을 때,
“지우야! 나다!”
밖에서 유정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몸을 일으킨 정지우가 문을 열자, 종이 상자와 비닐 봉투를 든 유정호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어?”
“감독님하고 좀 전에 통화했었어.”
유정호가 답을 하며 신준석을 살폈다.
일단 두 사람을 소개하고 탁자에 앉았는데, 유정호가 가지고 온 양념 치킨과 음료수들을 꺼내 놓았다.
“먹자.”
배가 있는 대로 불렀지만 요런 걸 사양하기는 좀 아쉽다.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그러자.”
운동했던 사람들답게 유정호가 신준석을 바로 허물없이 대했고, 셋이서 탁자에 앉아 치킨을 먹었다.
“뭐라고 그런 거냐?”
“별말 안 했어. 그냥 국가대표팀에 누가 되기 싫어서 이걸로 더는 국가대표 안 하겠다고 한 게 다야.”
유정호의 시선을 받은 신준석이 정지우의 말이 맞는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사를 썼지?”
“뭐라고 했는데?”
유정호가 엄지와 검지에 묻은 양념을 티슈에 닦은 다음, 품에서 복사지를 꺼냈다.
“봐!”
정지우와 신준석이 탁자에 기사를 펼쳐 놓고 함께 들여다보았다.
‘브라질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들의 퇴소.’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오히려 정지우와 신준석을 비난하는 기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어지는 기사는 놀랍게도 왜 이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동안 월드컵 예선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기존 선수들에 대한 비판과 그들의 리그 성적을 정지우와 2조 선수들의 기록과 비교하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나 정지우와 이진용의 비교를 좀 더 상세하고 자세하게 올려놓은 바로 뒤에 부회장과 기술 분석관으로 이어지는 축피아가 특정 선수들을 싸고도는 게 아니냐는 기사를 볼 때는 나직하게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러니 당장 네가 뭐라고 불만을 터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만하지.”
“그러네.”
정지우는 기사 머리 아래 있는 기자의 이름을 확인하며 낮에 보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선수 사기를 꺾지 말라는 반박 기사가 몇 개 나온 데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도 내일 유고전을 보면 알지 않겠느냐는 쪽으로 흐르는 분위기라 대강은 가라앉은 모양이다.”
정지우는 그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옆에 앉은 신준석이 자꾸만 묘한 눈빛을 건네고 있었다.
“아 참! 형, 준석이, 영국에 오고 싶다는데 형이 좀 알아봐 주면 어떨까?”
유정호가 ‘왜?’ 하는 눈으로 신준석을 바라보았다.
“에이전시 계약은 당장에라도 바꿀 수 있어요. 포르투갈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할 수 있다면 영국으로 옮기고 싶어서요.”
“당장은 뭐라고 하기 어려운데? 리그 성적도 봐야 하고. 그리고 2부 리그라면 몰라도 프리미어리그를 원하는 거면, 난 그럴 능력이 안 돼.”
“챔피언십이라도 괜찮아요. 알아봐만 주세요.”
“결혼 안 했다면서?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는데?”
“제가 내일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럼. 우선 가족들과 상의한 후에 다시 알려 줘.”
“예.”
신준석이 만족한 얼굴로 답을 한 다음이었다.
“너 성적이 안 좋으냐? 그렇지 않으면 포르투갈 리그에서 챔피언십으로 옮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텐데? 그쪽이 주급이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고.”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이게 한 번 꼬이니까 계속 그러네요.”
“이 바닥이 그렇지.”
유정호의 궁금증이 묘한 결론으로 끝났다.
셋이서 1시간쯤 더 축구 바닥 이야기를 하다가 ‘나 자고 갈란다.’ 하는 유정호의 한마디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수 생활을 하는 둘을 위해서 침대를 양보한 유정호가 소파에 몸을 눕혔다.
“넌 시차 안 느끼냐?”
“모르겠어. 잠만 잘 오는데?”
“하아! 부럽다. 몸은 파김치랑 똑같은데 이렇게 누우면 머릿속이 말짱해서 도통 잠이 안 든다. 이러다 영국 가면 또 한국 시차에 시달릴 건데.”
“저도 그래요.”
“너도 그렇지? 하여간 지우 저놈은 어딘가 달라. 어떨 때 보면 괴물이라니까.”
“그럼 형, 우리 TV 좀 보죠?”
“그러자.”
신준석이 신난 얼굴로 떠드는 것을 보며 정지우는 침실의 문을 닫았다.
잠이 안 오나?
배가 불러서 그런지 정지우는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