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57화 (57/262)

제4장.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1)

다음 날 오전, 식사를 마친 선수들이 회복 훈련을 위해 그라운드에 모였다.

메인 구장에서 1조와 2조 선수들이 함께 몸을 풀었는데, 문광국은 뒷짐을 지고 선수들을 둘러볼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브라질전과 관련된 기사마다 후반에 새로 투입된 선수들을 비난하는 댓글이 가득해서 기사를 검색하기조차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라운드의 분위기는 한여름 날 흙바닥에 떨어져 녹은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았다.

이진용과 1조 선수들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정지우를 힐끔거렸는데, 워낙 다부지게 성격을 보인 까닭인지 정작 입 밖으로 불만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노려본다고 상처가 생기거나 죽는 건 아니다.

게다가 다른 나라 땅에서 그 나라 선수들과 기 싸움을 하며 살아온 ‘부천의 미친개’가 고작 눈초리 따위에 기죽을 것도 아닌 거다.

정지우는 느긋하고 여유롭게 몸을 풀었다.

영국으로 건너가면 곧바로 승격을 위한 게임을 뛰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니 그라운드의 분위기가 더럽다고 해서 회복 훈련을 건성으로 하는 건 정말 미련한 짓이었다.

삐익!

신동수가 휘슬을 불어서 선수들을 부른 다음, 그라운드를 달리게 했다. 다 함께 달리는 거고, 회복 훈련 과정에 분명하게 있는 거라서 반항할 이유도 없었다.

천천히 달리는 동안, 정지우는 버릇처럼 어제의 브라질전을 복기했다.

후반처럼 브라질 선수들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면 과연 전반 같은 선방을 펼칠 수 있었을까?

정지우의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는 질문이었는데, 확실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운동장을 5바퀴 돌고 난 뒤에 다시 신동수가 휘슬을 불어 스트레칭이 시작됐다.

물을 마신 정지우는 천천히 다리와 허리, 등, 그리고 어깨의 순서로 근육을 풀어냈다.

187센티미터의 키, 체형에 비해 긴 팔, 그리고 다른 선수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점프가 정지우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제자리에서 높게 뛰어오르는 정지우를 선수들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몸을 다 풀고 났을 때 신동수가 마지막으로 휘슬을 불어 오전 훈련 종료를 알렸다.

정지우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 있을 유고전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면, 오늘 저녁으로 모든 게 끝난다.

솔직히 말할 수 있다면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싫을 선수가 누가 있겠나?

열광하는 축구 팬들에게 브라질전의 전반과 같은 경기를 선보일 때의 느낌과 감동은 단순한 리그 경기와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처럼 미운 오리 새끼로 남아서 분란을 일으킬 바엔 조용하게 사라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박용근과 정지우를 철저하고 악착같이 배척하는 바닥에 구질구질하게 남고 싶지도 않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선 식당 역시 분위기는 여전히 칙칙했다.

어제의 패배가 선수단 전체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2조 선수들은 그대로 두었다면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하는 얼굴이었고, 후반에 교체로 들어왔던 1조 선수들은 너희가 전반처럼만 뛰었어도 그따위로 지지 않았을 거라는 원망 가득한 눈빛이었다.

한마디로 훈련만큼 피곤한 식사 시간이었다.

“언제 넘어갈 거냐?”

“부천에서 하루 자고 가려고.”

“박 감독님 댁에서?”

식판에 고개를 숙인 바람에 신준석은 묘하게 치켜뜬 눈을 하고 있었다.

“나도 가도 될까?”

“너는 부모님 기다리시잖아?”

“저녁까지 너랑 있다가 부모님 댁에 가도 되고, 나는 하루쯤 더 있다가 출국해도 돼.”

그런 일정이야 신준석이 알아서 조절하는 걸 거다.

“감독님께 여쭤 볼게. 어차피 너희 부모님과 어제저녁에 같이 계셨다면서?”

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가 잠이 들었을 때, 그리고 아침에도 부친에게 전화를 걸었던 신준석이다. 그래서 그는 어제 호프집에 함께 갔었다는 이야기를 모두 정지우에게 전해 주었다.

“내 번호 가지고 있지?”

“정호 형, 나랑 같이 들어왔어. 감독님께 갈 때 형도 오라고 하면 되니까 그때 직접 만나 볼 수도 있을 거다.”

“그럼 좋지!”

조용하게 나눈 이야기였다. 그러나 워낙 식당 분위기가 가라앉아서 주변에 앉은 선수들은 정지우와 신준석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을 정도였다.

적당하게 먹은 정지우는 식판을 가져다 놓고 신준석, 주길성과 함께 식당을 나섰다.

“아이, 씨……! 속에 밥알이 그대로 있는 거 같네. 분위기라고, 원!”

2층으로 걷는 동안 신준석이 투덜거렸는데 정지우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뒤에서 주길성이 커다란 덩치와 우락부락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얌전한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방에 들어온 신준석이 정지우보다 먼저 의자에 앉았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볼지 모르는 일이라서 녀석의 행동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지우가 양치를 하고 나왔을 때 탁자에 녹차와 믹스 커피가 놓여 있었다.

“너는 안 마셔?”

“괜찮습니다.”

여기가 고등학교 합숙소도 아닌데 뭐 저렇게까지 공손하게 그러지? 그것도 한 살 터울에?

딱 거기까지였다.

신준석이 주절주절 떠드는 말에 대꾸하면서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에 문광국은 신동주 코치, 주장 안동주, 유병조와 함께 있었다.

“유고전은 수비 라인을 좀 더 두텁게 해서 비기는 한이 있어도 지지 않는 경기를 할 생각이다. 우리끼리 하는 경기니까 이번에는 너희 둘이 잘 이끌어.”

문광국이 가리킨 전술판을 보며 세 사람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4-2-3-1 포메이션이다. 공격을 포기하더라도 동주 네가 수비 라인으로 진용이 충분히 지켜 주고, 병조 넌 미드필드에서 밀리지 않게 공수에서 좀 더 뛰어.”

“예.”

안동주와 유병조가 동시에 답을 한 다음이었다.

“내일은 카드 조심하고.”

“예.”

유병조가 머리를 긁으며 답을 했다.

유병조는 제 나이보다 3살이나 낮춰 학교를 다녔다.

이유? 그런 걸 바로 ‘아!’ 하고 짐작하지 못했다면 세상을 살면서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에 속하거나, 아니면 무지하게 순진하고 정직하게 살았다는 뜻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는 한 살 터울이 체력이나 기술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운동선수 부모 중에는 치과 의사의 검사서를 만들어 법원의 판결을 받는 방법으로 자식의 나이를 낮추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래서 유병조는 실제로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놈이 중학교 3학년으로 3살이나 나이를 낮춰서 중등부 대회에서 뛰었다.

그 차이가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이 되나?

덕분에 유병조는 눈에 띄는 실력으로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었고, 탄탄하게 대학과 프로팀에 진출했으며, 지금은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물론 지금의 유병조는 중학교 때처럼 발군의 실력을 보이지 못한다. 그러니 협회에 비비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나중에 감독이라도 한자리 해먹기 때문이다.

유병조가 주민등록 나이보다 얼굴이 더럽게 삭아 보이고, 성질이 지랄 같아진 데는 3살이나 어린 애들 사이에서 지냈던 환경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제는 유병조처럼 나이를 속이기 어렵다. 국제 축구연맹에서 청소년 대회 참가 선수들에 대해 MRI로 손목 성장판 검사를 시행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다른 말로 전 세계에서 비슷하게 나이를 속이는 선수들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가 감독을 하는 한, 너희가 진정한 국가대표다. 다른 생각 말고 내일은 진용이 좀 분명하게 지켜. 이기는 건 바라지 않겠는데 절대 골을 먹지는 마라.”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안동주가 먼저 답을 했고,

“우리 애들로 선발진 짜면 유고전은 걱정 없을 겁니다.”

신동주가 바람을 잡았다.

“2조 애들은 오늘 해산시키는 거로 하지? 소속팀 복귀에 도움되라고 먼저 해산하는 거라고 홍보하고, 이따가 우리 애들 전술훈련 나간 다음에 2층 미팅 룸으로 모이라고 해.”

“2시쯤이면 괜찮겠습니까?”

시계를 흘깃 바라본 문광국이 신동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점심을 먹은 선수들이 하나둘 자연스럽게 정지우의 방으로 몰려왔다. 방이 넓지 않아서 침대에 걸터앉고 벽에 기대서 있었는데, 분위기는 회복 훈련과 식당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때 준석이 형 고함지르는 거 들으셨죠?”

“야, 인마! 내가 그런 덕분에 지우가 공을 막은 거야!”

신준석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흉내 내듯 손을 쭉 뻗는 바람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형! 그건 어깨를 다친 사람이잖아요!”

“얼래? 이게 왜?”

“형은 진짜 팔 짧다!”

흐느끼는 듯한 웃음이 이어졌고, 그날 전반에 느꼈던 감정과 느낌이 진솔하게 이어졌다.

“솔직히 리그 경기 뛰다 보면 잘 풀리는 날이 있고, 안 풀리는 때가 있잖아요.”

“그렇지.”

이재범의 말에 신준석이 장단을 맞춰 주었다.

“브라질 골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지금껏 그런 느낌은 축구 하며 몇 번 없었던 것 같아요.”

“왜? 골대가 남대문 정도로 커다랗게 보이디?”

“그게 아니라요. 공에 각오가 실리는 느낌? 뭐 그런 거였어요. 공을 차는 순간에 솔직히 좀 빗맞았거든요.”

“어쩐지! 그 상황에서 바운드를 만들었다 싶었다.”

신준석의 말에 이재범이 머리를 긁었다.

“지우 형이 공 던져 줄 때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았어요. 오른쪽으로 공을 빼낸 거요. 그건 정말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 몸이 반응했던 거거든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발이 알아서 공을 그쪽으로 툭 차 놓은 것 같았어요.”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막을 때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 같을 때가 있어서 그런 느낌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우리 다시 기회 있겠죠?”

“이 자식이! 잘하면 언제고 기회는 오는 거야!”

신준석이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는 것처럼 말을 뱉어 냈는데 분위기는 서늘했다. 다들 프로 선수로 뛰고 있는 터라 현실을 모르지 않은 탓이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처럼 김범주가 네이마르의 탄력에 대해 감탄을 털어놓았고, 이어서 브라질 선수들의 움직임과 몸놀림에 대한 놀라움이 연달아 나왔다.

“이대로 서너 게임만 발을 맞추면 우리도 죽여줄 것 같은데요. 전반 후반에는 브라질 애들 별거 아니구나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분위기가 한창 고조될 때였다. 문이 열리고 신동주가 불쑥 들어섰다.

“여기서 뭐해?”

“그냥 잡담하고 있었는데요?”

답은 신준석이 했다.

“2시까지 미팅 룸으로 모여.”

“예.”

그게 전부였다.

말을 마친 신동주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하여간 저렇게 정 안 가는 양반도 참 드물 거야.”

신준석의 말을 끝으로 간단한 모임이 끝났다.

미팅 룸에 모여서 10분쯤 기다리자니 문광국과 신동주가 나타났다. 앞으로 나간 문광국은 공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유고전 명단이 나왔다. 김범주, 김오영, 박영길, 이창진, 이재범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오고, 나머지 선수들은 이 자리가 끝나는 대로 돌아가도 좋다.”

희비가 교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수들의 표정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국가대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너희는 어제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얻은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앞으로 이 중에 누가 또 선발될지는 모르지만, 어제의 경기에 감사함을 잊지 않도록.”

문광국이 신준석을 바라보았다.

“감독님께 인사!”

“고생하셨습니다!”

선수들이 건네는 인사를 받은 문광국이 먼저 미팅 룸을 나섰다.

“원래는 내일 경기 끝날 때까지 함께 있어야 하지만, 구단에 일찍 돌아갈 수 있도록 감독님이 배려한 것이니까 그 점 잊지 말고! 나가는 선수들은 프런트에 반드시 퇴소 확인서를 제출해. 다들 수고했다.”

신동수가 가까이 있는 선수들 몇 명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미팅 룸을 나섰다.

“씨……! 쯧!”

이창진이 대놓고 불만을 쏟아 냈다. 어제 경기 중에도 입 모양으로 욕을 뱉어 냈을 만큼 유병조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브로 남으라는 것이 그만큼 못마땅한 눈치였다.

“자! 우리는 가자!”

신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신호로 다들 미팅 룸을 빠져나왔다.

짐이라야 운동복이 전부여서 20분도 되지 않아 떠날 준비가 끝났다.

“형, 조심해서 가세요.”

“잘해.”

남아야 하는 선수들과 아쉬운 인사를 마쳤는데 이재범이 특히 서운한 얼굴이었다.

정지우는 신준석, 주길성과 함께 프런트로 내려가 퇴소 확인서에 사인하고 건물을 나섰다.

차를 가진 선수가 없어서 근처의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 주는 미니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불러야 했는데, 다 같이 버스를 이용해 움직이기로 했다.

드르르르.

바퀴 달린 가방을 끌어가며 정지우와 선수들이 현관을 나서 정문 옆 주차장으로 움직일 때였다. 주차장에 세워진 승용차와 승합차 문이 열리며 기자 3명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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