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56화 (56/262)

제3장. 이제부터 행복해 질 거다. (3)

[문광국 감독, 게임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보다는 이틀 뒤에 있을 유고전을 대비한 작전을 구상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캐스터의 멘트를 해설자가 얼른 듣기 좋게 바꾸어 주었다.

교체 들어온 선수들은 신경질적으로 달리고, 전반을 뛰었던 선수들은 지쳐서 허덕거리는 경기였다.

“우- 아.”

한순간 함성이 피었다가 바로 시들었다. 이창진이 브라질의 페널티 에어리어로 밀어 준 공이 유병조의 앞을 그대로 스쳐 버렸기 때문이다.

유병조가 왜 그렇게 세게 찼느냐는 투로 이창진에게 눈을 부라리며 손짓을 했다.

‘씨발!’

돌아서는 이창진의 입 모양이 고스란히 TV에 잡혔다. 물론 당연하게 벤치에 앉은 선수들과 수비수들 역시 이창진이 툭 뱉어 낸 욕을 분명하게 알아봤다.

[우리 선수들! 서로 좀 더 다독이고 격려해야 합니다!]

보다 못한 캐스터가 또 바른말을 했을 때,

[브라질을 보세요. 4-2-3-1과 4-3-3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4-3-2-1의 형태로 역습을 구사합니다. 우리 선수들, 저런 움직임을 눈여겨보면서 배우는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해설자는 엉뚱한 대꾸로 상황을 풀어냈다.

이어지는 경기는 브라질이 많이 양보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경기였다. 만약 브라질 선수들이 작정하고 달려들었다면 아마 5골쯤은 더 넣었겠지 싶을 정도로 한국 팀은 조직력이 엉망이었다.

[유병조 선수! 저기에서 왜 시간을 끕니까!]

유병조가 공을 가지고 중앙선을 넘어와 움찔움찔 브라질 선수 앞에서 공을 끌고 있었다.

[줘야죠! 오른쪽에서 이창진 선수가 손을 들고 있는데요! 넓게 벌려 줘야 합니다!]

유병조에게 삽시간에 브라질 선수 2명이 달려들었다.

투욱! 툭!

뒤늦게 패스한 공을 파울리뉴가 재빠르게 잡아냈다.

“우-!”

이번 함성은 한국 선수들에 대한 명백한 비난이었다.

파울리뉴는 기습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뒤편에 서 있던 단테에게 공을 넘겨주었고, 단테와 골키퍼, 브라질의 수비수들이 돌아가면서 공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끌었다.

“우-!”

관중들의 야유가 그라운드에 울려 퍼질 때, 이창진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공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후반에 교체된 선수들이 한 걸음이라도 더 뛰어 줘야 합니다! 이창진 선수, 오늘 많이 뛰었는데요!]

캐스터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그라운드의 상황을 전해 줄 때였다.

퍼엉!

단테가 한국 진영으로 길게 공을 차 주었다.

투욱!

중앙선 부근에 서 있던 파울리뉴가 몸을 홱 틀면서 묘기를 부리는 것처럼 오른발 발뒤꿈치로 공을 튕겨 주었다.

파울리뉴의 뒤꿈치에 튕긴 공이 안동주가 끌어 올린 수비 라인을 훌쩍 넘어갔고, 기회를 노리던 코스타가 또다시 불쑥 튀어나와 공을 향해 달렸다.

“우-!”

[또 뚫렸습니다! 코스타! 코스타! 단독 질주!]

[수비수들이 좀 더 달려 줘야죠!]

강서준이 허덕거리며 달려들고, 안동주와 최윤섭이 뒤를 따라 달렸지만, 코스타는 주변을 살피기까지 하며 슈팅을 날렸다.

퍼엉!

[코스타, 슈웃!]

공은 몸을 날린 이진용의 손을 벗어났다.

티잉!

“우-!”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왼쪽 포스트를 맞고 골라인 바깥으로 흘렀다.

코스타가 장난처럼 혀를 길게 내밀고 동료들을 돌아볼 때였다. 오스카와 네이마르가 다가와 검지를 들고 이건 아니라는 것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차라리 골을 넣고 환호하는 걸 보는 게 백배 낫겠다 싶을 정도로 굴욕적인 모습이었다.

시간은 7분쯤 남았다.

하미레스가 코너킥을 준비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갈 때,

삐이익!

주심이 커다랗게 휘슬을 불었다.

[브라질의 선수 교체입니다.]

[평가전이라 교체 인원에 제한은 없는데요. 브라질이 9명이나 선수 교체를 하는 건 좀 의외네요.]

[명단을 확인하기도 바쁩니다. 오늘 A매치 데뷔전을 치르는 선수가 4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라질 선수들이 줄줄이 나오고, 그 숫자만큼 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골키퍼 제페르슨과 수비수 다니를 제외하고 선수 전체가 교체되어서 거의 새로운 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삐익!

주심의 휘슬에 브라질 선수가 코너킥을 찼다.

투욱!

공은 중앙선 쪽에 서 있던 선수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공을 받은 선수는 아예 공격할 의도가 없는 것처럼 교체로 들어온 수비수에게 공을 차 주었고, 이어서 골키퍼와 수비수들이 주거니 받거니 여유 있게 공을 돌렸다.

[브라질! 이대로 경기를 끝낼 생각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요.]

노경래와 이창진이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퍼졌고, 공연히 거친 동작을 펼쳤던 유병조가 심판에게 구두 경고를 받느라 엉뚱하게 시간을 날렸다.

유병조의 반칙으로 가져간 브라질의 프리킥.

“우-!”

브라질 선수들은 역시 공격보다는 연습처럼 공을 돌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후반전에 들어간 황지산과 조성환, 유병조가 달려들어 봤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문광국 감독, 아직까지 벤치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유고를 상대로 어떤 작전을 펼칠까를 구상하지 않을까요?]

캐스터와 해설자가 맥 빠진 대화를 주고받은 직후였다.

삑! 삑!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부는 것으로 평가전이 끝났음을 알렸다.

[경기 끝났습니다. 대한민국과 브라질, 브라질과 대한민국의 평가전은 3 대 1 브라질의 승리로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며 중계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설에 캐스터 한승재, 조운선 해설위원이었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전반전에 펼쳐졌던 정지우의 선방과 이재범의 슈팅 장면, 그리고 실점 장면이 연달아 화면에 떠올랐다.

파주로 향하는 버스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초상집을 향해 가는 문상객의 분위기와 다를 바 없었다.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뛰고 나온 노경래와 이창진, 강서준, 김범주의 표정이 교체된 신준석, 주길성, 김오영, 이재범보다 더 분한 기색이었다.

만약 1 대 0을 지켜 내서 승리로 끝났다면 저렇게 뛴 것이 활력으로 변해서 컨디션 회복에 도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지우는 잠자코 창밖을 보았다.

국가대표 마지막 경기치고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더는 국가대표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에, 지금부터 유럽 최고의 골키퍼를 목표로 뛰어서 세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꿈을 얻은 것만으로도 이번 경기는 충분히 만족할 수준이었다.

화려한 건물 위로 어두운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국가대표라는 화려한 허울 아래에 깔린 더러운 욕심처럼 말이다.

박용근과 김문호 내외는 신준석의 부모, 누나들과 호프집에 모여 앉았다. 절대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신준석 부모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런 날 호프집은 사실 괴로운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저런 것들이 내 세금으로 뛴다는 게 말이 돼? 내가 나가도 그거보단 잘 뛰겠다!”

역시나 호프집 한쪽에서 듣기 거북한 욕설이 얼큰하게 취한 음성을 타고 터져 나왔다.

“아니, 왜! 전반을 잘 뛰는 선수들을 바꾸냔 말이야! 그냥 잘하는 애들한테 그거 맡겨 두면 뭐 어때서!”

이런 말은 그나마 좀 낫다.

“우리 양념으로 2마리하고, 튀긴 거로 2마리…….”

“너무 많아요.”

신준석 부친이 주문하는 것을 전은주가 말리고 들었다.

“그래, 여보. 닭은 2마리만 시키고, 여기 이런 거, 과일이랑, 뭐 다른 걸 더 시켜.”

그러나 신준석의 모친이 한술 더 뜨고 나와서 전은주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아니! 정지우 말이야! 걔가 인성은 좀 그래도 얼마나 좋아! 응? 그런 앨 시켜야지!”

“야! 그런 놈은 써 주면 안 되지! 그건 아니다!”

김문호 내외와 신준석의 가족들이 힐끔 박용근의 눈치를 살필 때였다.

“맥주 500짜리? 그걸로 전부 하나씩 가져다주고, 거기에 소주 2병.”

박용근이 작은 눈을 찌푸리며 술을 주문했다.

파주에 도착한 선수들은 각자 씻거나 간식을 먹거나, 혹은 휴식을 취했다.

전반만 뛴 경기였는데 방에 들어서는 순간, 정지우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지우야!”

“나 좀 잘 테니까 내일 이야기하자.”

“그래? 그럴래?”

신준석이 억울한 표정으로 들어왔다가 침대에 누운 정지우를 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방을 나섰다.

눈을 감은 정지우는 오늘의 경기를 천천히 되새겼다.

무섭다.

세계적인 수준은 정말 다른 거였다.

만약 초반부터 브라질이 악착같이 골을 넣겠다고 달려들었다면 어땠을까?

유럽 최고의 골키퍼가 되려면 저런 선수들로 구성된 세계 최고의 프로팀과 맞서야 할 때가 많을 거다.

여유를 가지고 설렁설렁 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자신처럼 최선을 다해 달려드는 브라질 팀을 상대해야 한다면?

노력할 거다. 그래서 악착같이 달려드는 브라질 팀을 막아낼 수 있는 선수가 될 거다.

정지우는 다짐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

조동익이 무서운 얼굴로 뜨거운 김을 쏟아 내는 앞에서 한승관은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대책이 뭐야! 대책이!”

조동익이 있을 리도 없는 대책을 추궁하는 바람에 한승관의 목만 더욱 아래로 처졌다.

“하! 이 사람 이거! 이거 봐! 한 위원!”

“예, 부회장님.”

“지금 이게 6년 전과 다를 게 뭐가 있어? 정지우를 우리 밑으로 끌어들이겠답시고 소속팀까지 찾아가 병원비 지급을 막게 해 놓고는 홀랑 일본으로 날려 보냈을 때와 뭐가 다르냐고! 그 바람에 내가 그 구단주에게 얼마나 난처했었지는 몰라? 잊었어?”

한승관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들어간 돈이 얼마야! 브라질 불러서 엉뚱한 놈들만 죄다 용이 돼 버린 거 아냐! 당신 갈아치우라고 인터넷 댓글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기나 해! 알기나 하냐고!”

“송구합니다, 부회장님!”

소파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인상을 찌푸린 조동익이 입술 한쪽을 고약하게 틀었다.

“이럴 거면 박용근은 왜 감독 자리에서 쫓아낸 거야! 차라리 잘 꼬드겨서 그놈이 정지우를 우리 밑으로 가져다 바치게라도 했어야 할 거 아냐!”

“박 감독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하여간! 말은!”

“죄송합니다.”

조동익이 입술 사이로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고전은 어쩔 거야?”

“그건 문 감독과 상의해서…….”

“어허! 이 사람이 진짜!”

한승관이 슬쩍 눈치를 살피는 순간이었다.

“진용이를 살릴 방법을 생각해! 진용이를! 정지우를 밀어내고 그 아이를 유니온에 보낼 정도까지 이야기가 진행됐는데 정지우가 용이 된 건 관두고, 애를 아주 못쓰게 만들었잖아!”

“유고전에서 꼭 되살려 놓겠습니다.”

“흐음.”

못마땅한 표정으로 잠시 한승관을 노려보던 조동익이 협탁 서랍을 열었다.

타악.

그가 던진 봉투가 탁자의 유리를 타고 한승관의 앞에 놓였다.

“이충도 회장이 주신 거야.”

“예?”

“얼른 집어넣어!”

한승관이 힐끔 문을 보고는 봉투를 품 안에 넣었다.

“그런 양반을 도대체 얼마나 더 실망시킬 셈이야?”

“분명하게 방법을 짜내겠습니다.”

조동익이 남은 화를 털어 내겠다는 것처럼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우리가 뭉쳐서 진용이 한 명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게 더 우스운 일 아니야?”

“면목 없습니다, 부회장님.”

“그래. 내일 유고전이 있으니까 오늘 문 감독하고 잘 의논해서 우리 진용이 좀 빛나게 만들어 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조동익이 무언가가 생각난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정지우인가, 그놈? 혹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방법 없을까?”

한승관은 눈만 껌벅였다.

“그놈이 우리 말만 잘 듣게 만들면 축구 팬들 성화를 적당하게 누를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지?”

“박 감독이 문제입니다.”

“녀석이 박용근이에게 당했다, 뭐 그런 인터뷰를 하게 어떻게 안 되겠어?”

“부회장님, 그놈은 절대로…….”

“알았어, 알았어.”

입맛을 다신 조동익이 ‘얼른 문광국 만나서 내일 실수하지 않도록 잘 좀 해 봐!’ 하고 말을 던지는 것으로 자리를 끝냈다.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한승관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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