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이제부터 행복해 질 거다. (2)
평가전인 관계로 선수 교체에 인원 제한이 없었다.
하프타임을 이용해 양 팀의 꽤 많은 서브 선수들이 그라운드 곳곳에 퍼져 공을 주고받으며 몸을 풀었다.
정지우는 선수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걸었다.
그라운드에 목청껏 외치는 응원 구호가 가득했는데, 터널 앞에 있던 관중들이 ‘멋졌어요!’, ‘정지우 선수! 앞으로 계속 응원할게요!’, ‘대한민국 화이팅!’ 등의 고함을 질러 주었다.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동안 우리 선수들은 활기가 넘쳤고, 브라질 선수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문광국은 터널을 지나 스태프를 위한 방으로 들어갔다.
경기가 엉뚱하게 풀려서 주저앉았어야 할 놈이 오히려 영웅으로 등극한 모양새가 나오고 말았다.
‘이재범이 이 새끼……!’
거기에 터치라인을 따라 달린 선수가 감독과 벤치를 외면한 채 골키퍼에게 뛰어들었으니, 망신스러운 모습이 그대로 TV에 잡혔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기라도 한다면……?
협회와 부회장이 신임하는 선수들이 모조리 외면당하는 일이 생긴다.
문광국은 고개를 저었다.
브라질이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해서 얻은 결과이고, 정지우가 잘했다기보다는 놈이 막기 편한 쪽으로 공이 날아갔다고 했을 만큼 운이 따랐던 경기였다.
재능?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다.
국가대표가 될 수준이라면 그날의 컨디션과 운이 반은 좌우하지, 특별한 차이는 없다. 그러니 이왕 국가대표 선수를 선발해야 한다면, 협회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조직에 순응하는 선수들을 써 주는 게 옳은 일이다.
문광국은 선수 명단이 걸린 전술판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라커룸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
“형! 후반도 이렇게 가요?”
“브라질이 다부지게 나올 거다. 앞쪽에서 압박하고 기회가 생기면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선 무조건 슈팅을 날려.”
정지우의 지시를 선수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너 번만 밀어붙이면 브라질도 함부로 밀고 올라오지 못한다. 힘들겠지만 수비 때도 악착같이 도와주라. 45분이다. 우리 악착같이 싸우고, 이긴 뒤에 다 같이 쓰러지자. 그런 각오면 이 경기 분명히 우리가 잡는다.”
선수들이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말을 마친 정지우는 왼팔을 들어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괜찮냐?”
“견딜 만해.”
주길성과 부딪친 이후로 왼쪽 어깨가 뻐근했는데 경기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차암! 우리가 브라질을 잡다니? 하여간 넌 나중에 감독을 해도 엄청나게 성공할 거다.”
“흥분하지 마. 후반에 정말 위험할 수 있어.”
“그렇지.”
정지우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 시간 15분 중, 10분쯤 지났다.
문이 열리고 신동수가 무거운 얼굴로 들어왔다.
망가졌으면 싶었던 경기가 이렇게 풀리니까 답답하기도 하겠지. 그렇더라도 전반전을 그렇게 잘 뛰었는데 표정이 저게 뭐야?
신동수를 맞이한 선수들의 감정이 눈빛과 표정에 고스란히 올라왔다. 어쩌면 전반의 결과가 좋아서 지난 청백전 때의 억울함이 되살아나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신동수가 문을 닫은 다음, 곤란한 표정으로 라커룸을 돌아보았다.
“후반에 선수 교체가 있다.”
뭐? 어째서? 도대체 왜?
라커룸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정지우, 김오영, 이재범, 박영길, 신준석, 주길성은 옷 갈아입고 벤치로 움직여.”
사람이 어처구니가 없어지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
정지우가 피식 웃는 것을 본 신동수가 불편한 눈빛으로 애꿎은 신준석을 노려보았다.
답답하고 분하고 억울한 감정이 복잡하게 라커룸에 뒤엉켰을 때, 신동수가 권위를 보이는 듯한 태도로 몸을 돌렸다.
그가 라커룸을 나가고 난 다음이었다.
“너무하네! 3골 차가 나면 교체한다더니!”
“감독 권한이야.”
“누가 모르냐!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잖아!”
“전반 뛴 거로 만족하자. 후반 뛰는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라.”
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선수들의 표정에 굴욕감까지 넘나들었다.
정지우는 유니폼을 벗고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벤치 코트를 겉에 입었다.
“하! 정말 맥 빠진다.”
유니폼을 거칠게 벗는 신준석의 혼잣말이 라커룸에 있는 선수들의 심정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대- 한민국!”
둥둥둥! 둥둥!
응원 구호가 가득 울려 퍼지는 그라운드를 향해 선수들이 터널을 빠져나왔다.
[후반전을 위해 양 팀 선수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은 전반과 변화가 없는 반면에, 대한민국은 상당수 선수를 교체했습니다.]
[그러네요. 우선 골키퍼를 정지우 선수에서 이진용 선수로 교체했구요. 그 외에도 5명이나 선수를 교체했습니다.]
[전반을 뛰었던 김오영, 이재범, 박영길, 신준석, 주길성 선수를 빼고 황지선과 조성환 선수를 투톱으로 내세웠습니다. 거기에 유병조 선수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그리고 수비에는 안동주와 최윤섭 선수를 기용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광국 감독은 이번 브라질과의 평가전을 승리로 마무리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반전의 작전이 먹혀들었던 만큼 우리 선수들, 후반전에서도 멋진 경기를 보여 줄 것을 기대합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설명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서서 후반전을 준비했다.
주심이 좌우를 돌아본 후에 입에 휘슬을 물었다.
삐익!
“우와아- 아!”
[후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선공입니다. 황지산이 뒤로 넘겨준 공을 유병조가 받았습니다.]
정지우는 체온을 지키기 위해 목에 수건을 두르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브라질 선수들은 쉽게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전반전을 뛰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멋지게 막아 내기는 했었다. 그런데 지켜보는 동안 이렇게나 무서운 팀을 상대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브라질 팀의 조직력과 개인 능력은 대단했다.
브라질은 4-2-3-1의 포메이션을 사용한다.
그러나 공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11명의 선수 전체가 유 기적으로 움직이며 포메이션을 변형시키고 있었다.
특히나 기가 막힌 것은 모우라의 움직임이었다.
수비 시에는 뒤로 내려와 4-3-2-1의 형태로 수비를 지켜 주고, 공격할 때는 바로 앞으로 달려 다시 4-2-3-1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코스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톱 형태의 공격수였음에도 모우라가 뒤로 내려가면 바로 아래로 내려가 그의 빈자리를 메워 주었다.
모우라와 코스타의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변하면서 브라질은 수시로 4-3-3의 형태로 변하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중앙선 부근에서 완벽하게 한국팀을 압박하고 있었다.
후반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경기는 다시 일방적인 브라질의 공세로 바뀌었다. 거기에 전반과 달리 브라질 선수들도 악착같이 공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후반 시작 10분을 갓 넘겼을 때였다.
콰악!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것처럼 공을 잡은 네이마르를 향해 유병조가 발바닥을 높게 들고 달려들었다.
“아악!”
허공에 높다랗게 떴다가 떨어진 네이마르가 발목을 잡고 바닥을 굴렀다.
“헤이!”
삐이익! 삑! 삑! 삑!
“우!”
브라질 선수들이 달려들어 유병조의 가슴을 밀쳤고, 한국 선수들이 뛰어가 중간에 서서 말렸다.
누가 뭐래도 할 말이 없는 거칠고 매너 없는 태클이었다.
[주심! 유병조 선수에게 옐로카드를 꺼냈습니다.]
해설자는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잠시 대꾸가 없었다.
[네이마르 선수가 크게 다치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평가전에서 서로 다치는 일이 없으면 좋겠네요.]
유병조가 태클하는 장면이 느린 그림으로 나왔다.
발목을 향해 발바닥을 든 채로 달려드는 모습은 뭐라고 감싸 줄 수조차 없는 장면이었다.
[주심이 퇴장을 명해도 할 말 없는 태클이었네요. 평가전을 통해 교훈을 얻었으니 월드컵 예선에서는 저런 태클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잠시 중단되었던 경기가 브라질의 프리킥을 준비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동주야! 안동주!”
문광국이 전반과는 달리 터치라인 앞에서 악을 쓰며 세운 손바닥을 앞으로 밀어 대고 있었다. 라인을 올려 압박하라는 의미였고, 기습을 노리라는 뜻이었다.
삐이익!
하미레스가 기다랗게 공을 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수비 라인에 맞춰 서 있던 브라질 선수들이 일제히 골대로 달려들었다.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을 때 이진용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멍청아!’
정지우는 욕을 꿀꺽 삼켰다.
저런 공은 분명 중간에서 휘어지기 마련이어서 골키퍼가 절대 함부로 뛰어나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역시 날아오던 공이 골대 앞에서 급격하게 휘어졌다.
그리고 이진용의 앞에서 높게 솟구친 다비드가 고개를 젖히며 골대 구석으로 공을 날렸다.
터엉!
[다비드! 헤딩슈웃!]
티잉!
크로스바 위를 맞고 아래로 꺾인 공이 맥없이 골대 안을 굴렀다.
[아! 대한민국! 후반 15분에 다비드에게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느린 그림으로 이진용이 뛰어나온 것이 화면에 나왔다.
[하미레스의 프리킥이 앞쪽에서 휘는 바람에 이진용 키퍼가 위치를 잘못 판단했구요. 거기에 다비드 선수가 또 자유롭게 헤딩을 할 수 있도록 놔둔 것이 컸습니다.]
침묵에 휩싸였던 관중석에서 그래도 힘을 내라는 것처럼 ‘대- 한민국’이란 구호가 애처롭게 터져 나왔다.
“야! 다비드를 잡아 줬어야지!”
이진용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강서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괜찮아요. 우리 선수들!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양 팀 선수들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고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황지산이 조성환에게 넘긴 공을 유병조가 받는 순간이었다.
투욱!
네이마르가 가볍게 공을 뺏어 내 빠르게 달려들었다.
[네이마르가 공을 가로챘습니다. 네이마르! 대한한국, 위기입니다!]
안동주를 중심으로 잔뜩 라인을 끌어 올린 상태였다.
툭툭! 투우욱!
패스를 할 것 같았던 네이마르가 발 사이에서 공을 이리저리 옮기며 김범주를 제치고 달렸다.
[달려들면 안 돼요! 길만 막으면 돼요! 시간을 벌어 줘야죠!]
“우와- 아!”
안동주가 네이마르 앞을 막아서는 순간이었다.
투욱!
네이마르가 발로 공을 튕겼다.
“우-!”
장난처럼 튕긴 공이다. 그런데 그 공이 거짓말처럼 안동주의 키를 훌쩍 넘겼다. 멍한 안동주까지 제친 네이마르가 공을 몰고 그대로 골대를 향해 달렸다.
[뚫렸습니다! 네이마르! 네이마르! 골대를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앞을 막아 줘야 돼요! 선수를 놓치면 안 됩니다!]
중앙으로 오스카와 코스타, 모우라까지 달려들고 있어서 수비수들이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급해요! 지금은 자리를 지켜 줘야……!]
이진용이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파고든 네이마르를 향해 달려든 직후였다.
투우욱!
네이마르가 가볍게 공의 아래를 차올렸고, 멋진 포물선을 그린 공은 그대로 골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대한민국, 또다시 골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네이마르 선수! 혼자 40미터를 질주해 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선수들, 실망하지 말고 좀 더 경기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브라질 선수들이 달려와 네이마르를 감싸며 환호할 때, 경기장은 전체가 깊은 침묵에 빠진 것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TV 화면에 벤치에 앉아 있는 정지우와 신준석의 얼굴이 차례로 잡혔고, 다음으로 이재범의 얼굴이 나왔다.
[우리 선수들, 어딘가 손발이 맞지 않는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기존에 있던 선수들과 새로 선발된 선수들이 호흡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평가전을 통해서 문제점을 알았으니까 이틀 뒤에 있을 유고전에서는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진용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고 선수들을 노려보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이진용 키퍼가 벌써 2골이나 실점을 했습니다.]
[첫 골은 위치 선정이 안 좋았구요. 두 번째 골은 조금 일찍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위축되어선 안 돼요.]
[그렇습니다. 우리 대표팀, 좀 더 힘을 내 줘야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캐스터와 해설자도 맥이 쭉 빠져서 경기장 분위기만큼이나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브라질은 2골을 넣고 나서 조금은 여유롭게 경기를 풀어냈다.
정지우는 냉정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만약 아까 2골을 먹을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네이마르가 그렇게 달려들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정지우의 시선 앞에서 브라질 선수들은 완벽하게 공간을 제압한 상태에서 여유 있게 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빠른 패스, 긴 패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공을 받아도 몸 밖으로 튀어나오는 법이 없었다.
‘이건 아닌데?’
정지우가 안동주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수비 라인이 너무 위로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투우욱!
모우라가 넘겨준 공을 코스타가 잡고 그대로 골대로 달려들었다.
‘제발 좀 나오지 마! 이 돌대가리야!’
정지우가 이를 악물며 속으로 외쳤을 때 이진용이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이진용은 너무 빨리 나왔고, 그래서 골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다. 게다가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투욱!
이번에도 이진용의 키를 넘긴 공은 서글플 정도로 천천히 골대로 굴러 들어갔다.
[대한민국, 또다시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캐스터의 안타까운 음성이 흘러나올 때 문광국은 벤치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