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음을 비워. (1)
최윤섭과 유병조가 들어오면서 1조의 전력이 강해진 딱 그만큼 2조의 독기가 올라갔다.
어디 한번 해보자는 근성과 우리도 나름 프로 선수라는 묘한 자부심이 2조 선수들 사이를 떠돌았다.
전력이 강한 팀이 무조건 이긴다면 뭐하러 번거롭게 경기를 하겠나?
하위 팀이 상위 팀을 잡아먹는 짜릿한 드라마가 있어서 승부란 알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양 팀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서면서 전반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떠돌았다.
삐익!
휘슬이 울리며 2조의 선공으로 후반이 시작되었다.
투욱! 툭!
2명을 채워 넣었다는 믿음 때문인지 1조는 처음부터 강하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2조 역시 전방 압박을 하기로 약속했던 후반이었다.
45분 경기도 아니고, 20분 경기다.
2시간 달린 피로가 풀린 건 절대 아니었지만, 전반을 보내며 조금이나마 체력을 쌓았다. 다시 말하지만, 2조의 선수들은 2부 리그라고 해도 해외파 6명에 모두 프로 선수들이어서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거였다.
“야! 좀 더 강하게 압박해!”
문광국의 다급한 심정이 그의 고함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신준석의 뒷모습을 보았다.
골을 먹으면 그냥 2조가 1조에게 진 거로 끝나는 자체 경기여서 그런지 신준석은 라인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이럴 때 1조에서 누군가 길게 공을 차 주면 정말 정지우 하나 남는 꼴이 나온다. 당연하게 그걸 알고 있는 2조 선수들이 공을 넘기지 못하도록 거칠게 달려들고 있었다.
“패스해! 패스! 야! 유병조! 왜 공을 끌어!”
문광국의 고함처럼 공을 잡은 유병조는 오히려 자기편인 1조의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패스할 곳이 마땅치 않았고, 2조 수비수를 넘겨 앞으로 차 주려고 해도 2조 선수들이 바싹 붙어서 도무지 틈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 잘한다!
질 때 지더라도 밀어붙이는 거다!
1시간에서 2시간을 달린 2조 선수들이 이렇게 달려들 줄 몰랐던 것처럼 1조 선수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로 들어온 유병조가 페인트 모션으로 공을 빼려는 순간이었다.
터억!
공을 뺏기 위해 발을 뻗은 2조 선수에게 걸린 그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삑!
이 정도면 당연하게 파울인 상황이었다.
2조 선수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날 때였다.
“야! 이 씨……!”
시커먼 얼굴에 광대가 유난히 튀어나온 유병조가 욕 비슷한 말을 뱉으며 벌떡 일어났다. 생각대로 게임이 풀리지 않는 것과 예상하지 못했던 강한 압박에 짜증이 올라온 듯했다.
“뭐하자는 거야!”
유병조가 2조 선수에게 으르렁거렸다.
거친 얼굴에 나이까지 있어서 2조 선수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때 유병조가 2조 선수의 어깨를 잡아챘다.
“야, 이 새끼야!”
문광국과 신동수가 잠자코 있었다. 잠시라도 알아서 기를 죽이라는 의미인 모양이었다.
권투를 시작하기 직전에 시선을 피하면 안 된다고 들었다. 축구에도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기세에서 밀린 팀은 이상하게 경기를 제대로 풀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거친 반칙을 하거나, 선배들의 경우는 위치를 이용해 후배들을 윽박지른다.
전국 대회는 물론이고, 프로팀 간의 경기에서도 선배의 위치를 찾는 놈이 나오고, 나이를 따지고, 빌어먹을 힘자랑을 하는 놈이 있다. 기세를 잡아서 경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한 거였다.
정지우는 빠르게 중앙선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신준석과 수비수 둘, 그리고 2조 선수 셋이 따랐고, 그걸 본 1조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이리 와.”
정지우는 파울을 범한 선수의 어깨를 감싸고 유병조에게서 몸을 돌렸다. 별 같잖은 거로 화를 낸 거였다. 정지우의 팔 안쪽에서 고개를 떨구고는 있었지만, 녀석은 억울한 얼굴이었다.
“넌 뭐야! 이 새끼야!”
그때 유병조가 대뜸 욕을 날렸다.
“넌 저리 가 있어.”
정지우는 파울을 범한 선수를 신준석에게 밀어주고 천천히 돌아섰다.
“지금 나보고 욕한 거야?”
“뭐? 욕한 거야? 야, 이 새끼야! 너 몇 살이야?”
“경기 중에 나이 따지고 싶으면 조기 축구를 하지?”
“뭐?”
전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변에 있는 모두가 나서지 못한 채로 눈만 휘둥그레하게 떴다.
“가뜩이나 하기 싫은 거 하려니까 속이 뒤집혀 죽겠는데, 좀 매너 있게 합시다!”
“야! 너 이 새끼, 이리 와 봐!”
정지우가 피식 웃으며 손목에 감겨 있던 찍찍이를 풀어낼 때였다.
“뭐하는 거야!”
문광국이 고함을 질렀고, 신동수가 달려왔다.
“정지우! 너 이 새끼! 미쳤어!”
문광국과 신동수를 믿었나 보다. 주장 안동주가 앞으로 나서며 정지우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래! 미쳤다! 왜? 게임이나 똑바로 해! 어떤 게임에서 그 정도 반칙 가지고 욕을 해! 그리고 상대 선수 어깨 잡아당긴 새끼가 욕을 먹어야지! 그걸 말린 내가 잘못한 거야!”
“저 씨발놈이 나를 보고 새끼라네!”
유병조가 대뜸 욕지거리를 하며 대가리를 디밀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경기 중에 선배고 지랄이고가 어디 있어! 다른 새끼는 몰라도 선배 넌 이리 와! 나 선수 생활 안 해도 되니까 욕한 너는 이리 오라고!”
그때였다. 신준석이 정지우의 가슴을 뒤에서 안았다.
“지우야! 좀 참아!”
“놔 봐! 저게 무슨 선배야! 이건 너무하는 거잖아! 2시간 뛴 애들을 상대로 뭐하는 지랄이야! 그래 놓고 선배라고! 야, 이 선배들아! 니들이 내일 2시간 뛰고 우리랑 해 봐! 지면 내가 아예 선수 생활 접을 테니까! 이 엿 같은……!”
유병조가 눈만 힐끔거리며 신동수를 보았다.
“야! 제발 좀! 그만해!”
“아니면 지금 해서 니들이 지면 선수 생활 접을래? 접을 거냐고! 이 선배 놈들아!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좀 정정당당하게 해 봐! 이 개 삽살이 선배들아! 놔! 놓으라니까!”
정지우가 오른쪽 장갑을 벗어서 그라운드에 집어던졌다.
워낙 미친놈처럼 설쳐서인지 문광국부터 신동수, 안동주, 유병조까지 이를 악문 채로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하기야 지금 끼어들어 봐야 다들 보는 앞에서 후배인 정지우에게 욕만 잔뜩 처먹게 생긴 꼴이어서 나서기도 지랄인 상황이었다.
“신 코치, 애들 들여보내!”
문광국이 쓸개 씹은 얼굴로 지시를 내리고 건물로 먼저 걸어갔다.
“다들 들어가!”
신동수가 손짓을 하자 선수들이 하나둘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야! 그만해! 좀!”
정지우를 골대 옆까지 끌고 간 신준석이 그제야 팔을 풀었다.
“어쩌면 너는 부천 미친개에서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정지우는 피식 웃었다.
가슴을 막고 있던 벽의 쪽문이 아침에 열린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아예 벽이 와르르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웃어? 고등학교 때 이랬으면 너는 맞아 죽었고, 2조 전체가 엉덩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때 파울을 했던 선수가 정지우의 양쪽 장갑을 모두 들고 다가왔다.
녀석이 공손한 태도로 정지우에게 장갑을 내밀었다.
“넌 몇 살이냐?”
“22살입니다.”
“나 때문에 곤란하게 됐다면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녀석이 복잡한 표정으로 웃었다. 국내에서 선수 생활 하려면 이번 일로 아마 머리 지겹게 조아려야 할 거였다.
“들어가자. 배고프다.”
정지우의 말에 신준석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고, 장갑을 가져온 선수가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지었다.
뭐 이렇게 순둥이같이 생긴 놈이 있지?
정지우는 걸으면서 녀석에게 이름을 물어봤다.
“이재범입니다.”
“내 이름 알지?”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거여서 정지우는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짜그락. 짜각. 짜각.
본관 건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정지우, 너 이리 와 봐.”
입구에 서 있던 선수 중 안동주가 정지우를 불렀다.
“너희는 올라가 있어.”
안동주는 신준석과 이재범에 고갯짓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이재범은 계단으로, 신준석은 정지우에게로 다가왔다.
“이것들이 진짜! 야, 인마! 올라가 있으라니까.”
정지우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안동주와 유병조를 보았다.
“가만 보니까 사과하겠다는 게 아니네?”
“뭐? 그런데 이 새끼가 진짜?”
유병조가 일어섰고, 6명 정도 되는 선수들이 우르르 정지우와 신준석을 둘러쌌다.
정지우는 뒷짐을 졌다.
“자! 자신 있는 선배 먼저 나와. 일대일이면 나랑 조용하게 건물 뒤로 가는 거고, 다구리 놓을 거면 먼저 날려. 나 이대로 나가서 기자회견 할 거니까. 오늘 훈련 내용, 지니까 후배 윽박지른 거! 어디 해 보자.”
“야! 이 새끼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유병조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가소롭다는 말을 뱉은 직후였다.
정지우가 상체를 놈의 앞으로 숙여 얼굴을 바싹 가져갔다.
“뭐! 뭐야?”
눈과 눈이 몰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상태였다.
“오늘 경기 이겨서 뭐하려고 그랬냐? 창피하지 않냐? 후배들 불러서 2시간씩 달리게 하고 경기 뛰는 거? 나 같았으면 미안해서 걸음이 안 떨어질 것 같은데?”
유병조가 또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경기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주먹질이라도 정정당당하게 해 봐. 일대일이면 언제고 붙어 줄 테니까. 국가대표? 난 이번 평가전 끝나면 국가대표 은퇴하고 사라질 테니까 선배들끼리 두 손 꽉 마주 잡고 돌아가며 벽에 똥칠할 때까지 실컷 해 먹어.”
정지우가 상체를 세우자, 안동주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대표에 관심 없고, 국내에서 선수 생활 하지 않는 놈에게 디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열심히 하시고, 한 번만 더 따로 부르거나 엉뚱한 짓 하면 그땐 나도 손 나갈 거 같으니까 생각 잘해.”
정지우가 몸을 돌리며 움직이는 순간에 신준석이 따라붙었다.
짜가락. 짜가락. 짜가락. 짜각.
계단을 올라갈 때였다.
“아! 이런 멋진 놈!”
“시끄러워!”
로비에 서 있는 선수들을 약 올리려는 게 분명한 신준석의 농담과 정지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꾸가 터져 나왔다.
방으로 들어섰을 때, 침대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주길성이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정지우와 신준석을 보았다.
“왜 그러고 있어? 안 씻어?”
“형 먼저 씻으시라구요.”
정지우는 장갑을 침대 위로 던지고 윗옷을 벗었다.
방마다 침대 옆으로 욕실이 있어서 이거 하나는 정말 편했다.
“지우야! 나 가서 씻는다. 일 있으면 불러!”
“넌 이게 재밌냐?”
“어차피 너랑 나랑은 국가대표 틀린 거잖냐? 덕분에 시원하게 속을 뚫었더니 10년은 더 살 것 같다.”
정지우가 수건과 목욕 용품을 들고 욕실로 향하자 주길성이 벗어 놓은 옷들을 주섬주섬 들었다.
“야! 그건 왜?”
“세탁하려구요.”
“놔둬, 인마!”
“괜찮습니다.”
저놈이 갑자기 약을 먹었나?
정지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다시 챙길 생각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솨아아아아!
물을 틀고 가장 먼저 칫솔을 입에 물었다.
거울 속에서 참 긴 세월 만에 돌아온 옛날 눈빛의 정지우가 양치를 하고 있었다. 신준석과 주길성이 보기에는 과거 기억 그대로인 것 같겠지만, 사실과는 많이 다른 거였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답은 박용근과 전은주를 만난 거 하나밖에 없었다.
국가대표 따위 기대한 적도 없었다.
왜 불렀는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저들의 의도는 부르라고 악쓰는 한국 축구 팬들에게 불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면피용, 꼭 그 수준이었다.
솔직히 더럽다.
이 더러운 축구판에 조동익이 만든 ‘베스트 11인회’라는 것이 존재하고, 문광국처럼 그곳의 회원인 인간의 눈에 들지 못하면 국가대표를 못해 먹는 이 시스템이 구역질 날 만큼 역겨웠다.
돌아간다.
내 능력으로 벌어서 박용근과 전은주와 행복하게 살 거다.
박용근의 품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과 발롱도르 컵을 안길 정도로 뛰어난 선수가 되어서 유정호까지 넷이서, 서로 위할 줄 아는 사람끼리 행복하게 살 거다.
그때 가서 국가대표로 부른다면?
끔찍하다는 생각에 정지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축구판에서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인질로 돈과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버둥대는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 경기를 뛸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몸을 닦고 가지고 들어간 새 운동복 바지를 입은 정지우가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방 안에 선수들이 바글바글하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