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너무하네, 진짜. (1)
보조 그라운드로 2조 선수들을 이끈 신동수는 선수들을 다시 3개 조로 나누었다.
“조별로 트랙을 뛴다. 6바퀴 이후부터 앞 조를 잡을 수 있고, 전원이 앞 조를 모두 추월한 조부터 휴식, 마지막 한 조는 추가로 운동장을 더 돈다. 다들 알지?”
선수들이 의아함에 약간의 불만이 묻은 시선을 교환했다.
실제로도 대개 해 본 적 있는 훈련이었다.
앞 조를 따라가기 위해 기를 쓰고 달리는 훈련. 문제는 앞 조에서 빨리 달리는 놈을 따라가는 조의 전원이 통과한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얼핏 듣기엔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는 훈련 같지만 결국은 전원이 토할 때까지 달릴 수밖에 없는 훈련이기도 했다.
정지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신동수를 보았다.
이건 평가전을 앞두고가 아니라 전지훈련을 갔을 때나 씀 직한 훈련법인 거고, 솔직히 고등학교 때나 할 법한 무식한 훈련이기도 했다.
“달릴 준비해.”
신동수가 휘슬을 입에 무는 순간이었다.
“코치님!”
정지우가 손을 들며 부르자, 신동수가 시선을 주었다.
“전 몸이 안 좋아서 이 훈련은 빠지겠습니다.”
답을 기다릴 것도 없어서 정지우는 말을 마치고 트랙의 바깥쪽으로 걸었다.
“야! 몸이 어떻게 안 좋다는 거야?”
“몸살 기운도 그렇구요. 허리에 가벼운 통증이 있어서요.”
신동수가 갑갑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일단 뛰어.”
“못 뜁니다.”
“야!”
단숨에 나온 정지우의 답에 신동수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너 국가대표 하기 싫어? 그냥 나갈래?”
“그래도 됩니까? 정말 그래도 되면 지금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신동수가 멍하고 당황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3개 조로 나뉜 선수들이 정지우와 신동수를 번갈아 보는 앞에서 주길상만 암담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너 훈련 거부하는 거야?”
“몸이 불편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동수가 이를 악물고 정지우를 보았다.
고등학교 축구부가 아닌 거다. 설사 프로구단이라 해도 몸이 불편하다는 선수를 억지로 달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럴 경우 응징은 출전 기회를 없애거나 다음 계약을 안 하는 것 말고 답도 없었다.
“좋아! 정지우만 빼고 일단…….”
“코치님! 저도 몸이 안 좋습니다.”
신동수가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몸을 돌릴 때였다.
신준석이 손을 들어서 삽시간에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야!”
신동수가 고함을 버럭 지르는데도 신준석은 트랙을 지나 정지우 옆으로 걸어왔다.
이놈은 또 왜?
정지우의 시선 앞에서 신준석은 뻔뻔한 얼굴이었다.
대놓고 숨을 커다랗게 내쉰 신동수가 남은 선수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또 아픈 사람?”
더는 나오는 사람이 없어서 일단 4명씩 3개 조가 서로 간격을 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왜 그랬냐?”
“어차피 우린 구색 갖추기잖아. 이렇게 해 놓고 청백전을 하면 뭐하냐? 그냥 자기들 편한 사람 선발할 텐데, 공연히 바보짓 하기 싫었다.”
신준석이 마음을 비운 듯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하긴 26살이면, 그리고 박용근의 제자라면 이 바닥 생리쯤 대강 알 법한 나이였다.
트랙 바깥쪽의 벤치에 앉은 정지우는 이제 뛰기 시작한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나 목표가 다를 수 있다.
심지어 정지우는 목표도 없는 삶을 살았었다.
그러나 그게 돈이든, 연줄이든, 하다못해 실력이든, 이미 정해 놓은 스쿼드를 향해 저렇게 달리게 하는 건 올바른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헉헉. 헉헉.”
눈앞에서 주길상이 지친 얼굴로 달려갔다.
열심히 뛰어라. 잘해서 눈에 들면 교체 선수로라도 기회를 잡을 거다.
그런데 너 그거 아냐?
넌 벌거벗고 뛰어도 저 사람들 눈에 안 들 거라는 거?
트랙을 달리는 선수들이 복잡한 시선으로 정지우와 신준석을 보며 지나갔다.
어쩐 일인지 2조는 정지우와 신준석보다 나이 많은 선수들도 없었다.
“잘 뛴다.”
신준석이 툴툴거리는 음성으로 달리는 선수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놈은 그래도 먹고사는 걱정을 하는 집은 아니었다.
장사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넉넉한 성품이어서 정지우에게도 제법 잘해 주시던 분들이었다.
“포르투갈에 가 보니까 감독님께 교육받은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라.”
정지우가 힐끔 시선을 준 앞에서 신준석은 달리는 선수들을 보고 있었다.
“거기만 해도 어린 선수는 승부와 상관없이 경기 중 부족한 기술을 익히는 데 집중하게 하더라고. 기발한 패스나 테크닉을 보이면 욕하기보다 박수부터 쳐주는 것도 그렇고.”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발한 패스나 테크닉?
전국대회 예선 중에도 선수들을 삥 둘러 세우고 뺨을 갈기는 마당에 어딜 그런 짓을 생각이나 하겠나.
‘난 너희가 죽을 정도로 뛰면 져도 상관없어! 그런데! 정말 죽기를 각오하고 뛰는 팀은 절대 안 져!’
고등학교 예선전에서 상대 팀 감독이 하프타임 때 선수들을 쭉 세워 놓고 외치던 고함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개를 떨군 선수들에게 다가간 그 감독은 결국 볼을 주먹으로 때렸었다.
후반이 되고 그 팀 선수들은 정말 죽기를 각오한 것처럼 달려들었었다.
그게 재미있었을까?
그 선수들에게 축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결국, 후반 30분이 지나면서 죄다 퍼져서 뛰는 시늉만 하던 그 아이들은 지금 선수 생활이나 하고 있을까?
자각. 자그락. 자각. 자각.
바로 눈앞에서도 선수들이 달리고 있었다.
염병!
마라톤 선수도 아니고, 평가전을 앞두고 저렇게 달리면 지금 쌓인 피로가 부상이나 부진이라는 독이 돼서 돌아온다.
정지우는 정말이지 이렇게 빠져나온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햇살, 잘 가꿔진 잔디.
그 아래를 국가대표란 뿌듯한 사명을 얻기 위해 선수들이 달린다. 딱 여기까지다. 저들은 그저 눈앞에 매달린 당근을 보며 달리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저렇게 달리던 선수들은 교체로 넣어도 흥이 나질 않는다.
운동장에도 왕따가 있다면 믿겠나?
의도적으로 패스를 주지 않는다.
몇 번이나 결정적인 기회를 잡아도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선수는 맥이 풀린다. 그런 뒤에 어쩌다가, 마지못해 공을 주어도 그 선수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디 한번 해 봐.’
이런 느낌으로 주는 공에 무슨 흥이 나겠나?
“그때 우리 진짜 재밌었어.”
신준석이 재미난 일이 떠오른 것처럼 입가에 웃음을 달았다.
“난 중학교 때랑 너무 달라서 그때 진짜 축구하는 게 좋았었거든.”
“뭐가?”
“경기 끝나고 감독님이 한 명씩 세워서 박수 쳐준 거 있잖냐.”
신준석이 그때로 돌아간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상대 선수 막아 낸 거 하나씩 설명하시면 다들 박수 쳐주고 했었잖아. 아버지랑 어머니 보시는데 그럴 때면 어깨도 으쓱하고 그렇더라구.”
정지우가 피식 웃으며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삐익!
신동수가 휘슬을 불었다. 지금부터 앞 조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한 조가 남거나 아니면 감독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 달린다.
“왜 저런 훈련을 따라 하는 거지?”
“국내 구단에 있으려면 달려야지, 뭐. 여기서 너나 나처럼 이래 버리면 구단에 연락해서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냐? 문광국 감독이 협회와 구단에 영향력이 굉장하니까.”
신준석의 답을 들으며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식아, 이따가 청백전 할 때 말이다.”
“응?”
“무리하지 말자. 괜히 다치면 손해고, 어차피 우린 들러리인데 굳이 힘 뺄 것 있냐?”
“그래!”
신준석은 미팅 룸에서와 조별 훈련을 보며 마음을 완전히 비운 놈처럼 답을 했다.
정지우는 속이 편해졌다.
이렇게 이틀 훈련 견디고, 평가전에 벤치에 있다가 돌아가면 되는 거다.
1시간을 넘기면서부터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 선수들이 2시간쯤 되자 두 놈을 남기고 모두 그라운드에 널브러졌다.
“에효! 불쌍한 새끼들.”
신준석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의 이런 유쾌함은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다.
훈련을 마치고 합숙소에 퍼진 아이들을 보며 신준석의 어머니는 늘 비슷한 말을 던지며 혀를 차곤 했었다.
정지우는 일단 주길상에게 다가갔다.
“발 줘.”
“예?”
“발 달라고, 인마.”
그라운드에 누운 주길상의 발목을 든 정지우는 마치 터는 것처럼 녀석의 발을 흔들었다.
이래 놓고 청백전?
정말 웃기는 건 이런 일이 외부로 잘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대놓고 이런 거로 불평을 터트리면 한국에서 선수 생활이 내내 불편해지는 탓이었다.
삐익!
마지막까지 달리던 두 놈이 휘슬이 울리자 그대로 그라운드로 널브러졌다.
정지우는 주길상의 발을 잡고 위로 꺾어 주었다. 다음은 커다랗게 돌려서 허벅지의 근육을 당겼다.
“이따가 청백전 때 무리하지 마. 이대로 가면 근육 다쳐.”
주길상이 복잡한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국가대표가 되고 싶은 거냐?”
“예.”
이런 목표를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함께 훈련했던 한 학년 후배이고, 함께 합숙소를 썼던 동료이기도 하니까 그냥 네 목표는 그런 거구나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들 저쪽으로 움직여!”
얼굴이 시커멓게 올라온 선수들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신동수의 지시에 따라 걸었다.
메인 그라운드에서는 선수들이 생생한 얼굴로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문광국이 의아한 눈으로 정지우와 신준석을 바라본 후에 묻는 것처럼 신동수를 보았다.
그가 다가가 무언가를 설명한 다음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문광국이 휘슬을 불어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2조는 체력 훈련을 마쳤다. 그래서 청백전은 1조 9명, 2조는 11명으로 한다. 전반 20분, 후반 20분이다.”
문광국이 1조의 선수를 짰고, 신동수가 2조의 선수들을 짰다. 어차피 1조 13명, 2조 14명이니까 대개 다 뛴다고 보면 된다.
“너! 골키퍼는 볼 수 있어?”
“예.”
신동수가 기가 막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포지션은 원래 맡던 것들이 있어서 당연하게 골키퍼는 정지우, 수비수로 신준석과 주길상, 그리고 남은 선수들이 차례대로 정해졌다.
몸이 풀려서 뛰기 딱 좋은 선수 9명과 완전히 퍼져서 20분을 버틸까 하는 선수 11명의 대결이었다.
극단적으로 수비만 하는 팀을 상대로 득점 연습을 하는 거라면 할 만한 훈련이었다.
양쪽 조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섰다.
1조의 골키퍼는 이진용이었다.
정지우는 골키퍼 장갑의 손목 밴드를 적당하게 조이며 골대로 향했다.
“지우야! 우리 화이팅이나 한 번 하자!”
정지우가 시선을 돌렸을 때 선수들이 몰려 있었다.
하여간 저런 짓들을 정말 잘한다.
정지우는 걸어가서 선수들 틈으로 섰다. 신준석이 팔을 뻗어 정지우와 반대쪽 선수의 어깨를 잡았다.
“살살 하자.”
그러고는 기운이 쭉 빠져 버릴 것 같은 멘트를 꺼냈다.
정지우가 피식 웃은 다음이었다.
“어이!”
신준석이 선수들이 주로 사용하는 고함을 외쳤고,
“어이!”
선수들이 비슷한 고함을 질렀다.
골대로 걸어간 정지우는 버릇처럼 왼쪽 포스트에서 오른쪽 포스트까지 걸었고, 점프하며 크로스바에 손을 걸었다.
적당히 하자고 했었다.
지난 6년간 그런 심정으로 경기했었다.
그런데 막상 골대 앞에 서고 보니 이상하게 피가 끓었다.
억눌려 있던 감정이 터져서 그런 건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게 화가 나서인지는 잘 몰랐다.
삐익!
노란 조끼를 입은 1조의 선공이었다.
그래도 호흡을 맞춰 왔던 선수들답게 1조는 후방으로 공을 굴리며 천천히 기회를 노렸다.
“야! 황지산! 그쪽에서 벌려 줘야지! 끌지 말고!”
스탠드에 올라간 문광국이 공이 움직일 때마다 위치와 동작을 지적해 주었다.
이건 대놓고 1조가 선발이라는 의미였고, 2조는 그들의 훈련 상대라는 뜻도 되었다.
1조가 소유한 공은 빠르게 돌았다.
2조 선수들이 달려들어 봤으나 이미 체력이 떨어져서 그다지 효과적인 방어는 아니었다.
툭! 투욱!
“그렇지! 안으로 파고들어!”
문광국의 고함이 중계처럼 들리는 순간이었다.
1조의 공격수 박진오가 페널티 에어리어 왼편을 뚫으며 달려들었다.
주길성이 자세를 낮추고 앞을 막는 순간, 정지우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반대편에서 1조 선수 황지산과 조성환이 달려들고 있었다.
“준석아! 오른쪽! 오른쪽 잡아!”
정지우가 고함을 지르며 자세를 낮춘 순간이었다.
투욱!
주길성을 제친 박진오가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공을 패스했고, 황지산과 조성환이 동시에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