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46화 (46/262)

제8장. 잘해 보고 싶어요. (2)

주차장에서 파주 NFC 입구로 걸어가는 앞을 기자들이 막다시피 섰다.

“어떻게 된 거야? 비행 편을 바꿨어?”

“예. 사정이 좀 있었어요.”

“어? 저 양반 박용근이 아니야?”

박용근과 나이가 비슷할 수는 있지만, 그렇더라도 동네 꼬마도 아닌데 덜컥 이름만 부른다.

정지우는 욱하는 심정을 가라앉혔다.

박용근과 관련된 일이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예전의 성격이, 경기 중에서나 나왔던 성격이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정지우는 기자들을 피해서 안으로 걸었다.

“야! 정지우!”

피식.

언제는 돈에 팔려 간 개처럼 몰아 놓더니 이제 와서 뭔 정지우?

정지우는 그냥 갈 길을 갔다.

어머니 때문이라는 변명을 하기 싫어서, 구질구질하게 언론에 떠들며 도와달라고 하기 싫어서 잠자코 있었던 것이지, 기자 따위가 두려워서 그랬던 적은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팔기 싫어서 그동안도 입을 다물었었다. 자칫하면 어머니가 정말 앞길을 막았다고 눈물 흘릴까 봐 말이다.

저들이 정말 왜 정지우가 그랬었는지를 몰랐다고?

차라리 함께 밥 먹고 저 양반이 돈 냈다는 소릴 믿겠다.

드르르륵.

정지우는 바퀴를 끌며 파주 NFC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그 새끼! 더럽게 비싸게 구네.”

이런 건 대꾸조차 아깝다.

그러는 제 놈 모습이 더러운 것은 알고 있을까.

어쩐지 박용근과 전은주, 유정호를 제외하면 한국에 정나미마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잔디 그라운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은 정지우는 건물 현관으로 들어섰다.

안쪽의 데스크에 다가갔을 때였다.

“지우야?”

누군가 반갑게 다가왔다.

고개를 돌린 정지우는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신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지냈냐?”

“나? 나는 포르투갈 리그에 있었어. 우리 진짜 오랜만이다.”

전국대회를 마지막으로 못 봤으니까 정말 그렇다.

중학교 때부터 될성부른 놈들은 서로서로 대회를 통해 얼굴을 익히게 된다. 꼭 동기만이 아닌 건 당연한 거다.

“길성이도 왔어. 너랑 한 방이던데?”

“그래?”

“난 어제 왔다. 넌 언제 왔냐?”

“나도. 어제 도착했어.”

정지우는 프런트에 입촌 신고를 하고 방을 배정받았다.

2층에 있는 방이었다.

드르르르르.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올라가는 동안 신준석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 왔다.

전국대회에서 함께 뛰었던 신준석과 주길성이 함께 불렸다는 것이 신기했다. 박용근 키즈라 불릴 때까지는 좋았는데 정지우의 일이 있고 나서는 아무래도 밀려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207호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길성이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다.”

정지우는 손을 내밀어 주길성과 악수를 나눴다.

1년 후배였는데, 역시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였다.

“너 쓰는 침대가 어느 거야?”

“형이 먼저 정하시면 남는 거 쓰겠습니다.”

“그럼 내가 창가 쪽 써도 되지?”

“예.”

주길성이 얌전히 답을 하고 한쪽에 세워 두었던 가방을 안쪽 침대로 옮겼다.

“점심 먹기 전에 미팅이란다. 11시라고 하던데?”

“아까 프런트에서 들었어.”

“이따 보자.”

신준석에게 손을 들어 보인 정지우는 트렁크를 침대와 벽 사이에 눕히고 앞쪽을 열었다.

먼저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형, 계약하셨다면서요?”

“응.”

“좋으세요?”

정지우는 가방을 향해 숙였던 상체를 천천히 들었다. 어쩐지 말속에 뼈가 들어 있는 느낌이어서였다.

사람은 시선으로 뜻을 전할 때도 있다.

녀석은 아차 하는 얼굴이었다.

“주길성.”

“예.”

“내가 너한테 피해 준 거 있어?”

“그런 거 아니었습니다.”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운동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면서, 누구한테 밀려 본 적은 없었다. 이런 성격은 특히나 운동할 때 강해지는데, 레믹의 코앞에 머리를 디밀 때가 꼭 그런 때였다.

그런데 후배 놈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소리를 그냥 듣고 있으라고? 그것도 박용근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감 충만한 날 말이다.

“좋게좋게 가자. 내게 있었던 일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만, 너나 나나 빽 없이 운동하는 놈끼리 태클 걸지는 말자. 알았어?”

“예.”

마지막으로 주길성의 눈을 들여다본 정지우가 다시 가방으로 몸을 숙였다.

나쁜 새끼들.

박용근이 밀려나니까 인사조차 오지 않았던 놈들이 이제 와서 손해를 입은 척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 같으면 국가대표고 뭐고 확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구단의 입장이 있는 거고, 그런 행동이 결국은 박용근을 욕 먹이는 일이라는 생각에 참았다.

침묵 속에서 둘이 옷을 정리했다.

웃기게도 한국에 와서 이러고 있으려니까 예전의 성격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게 운동 바닥 생리여서 그런지, 지기 싫은 성격 탓인지, 아니면 박용근을 만나고 나서 자신감이 다시 떠올라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복도가 시끌시끌하게 울렸다. 청소년 대표를 지냈기 때문에 대강은 다 아는 놈들일 게 분명했다.

짐을 챙긴 정지우는 침대의 발 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0시 45분이었다.

“미팅은 아래로 가면 되냐?”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가 보자.”

하필이면 직계 선배랑 한 방에 넣었을까?

주길성이 그런 불만을 구겨 넣은 얼굴로 정지우를 따라나섰다.

다들 소속팀이 있는 프로 선수들이다. 그리고 그중 26살은 적지 않은 나이였다.

정지우는 복도로 나가 아는 얼굴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반가운 척하는 놈, 데면데면하게 아는 척만 하는 놈, 그리고 적대감을 보이는 놈들이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2층에서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가서 미팅 룸이 있었다.

정지우는 들어가면서 나이 많은 선배 선수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역시 받아 주는 선배, 무시하는 듯한 선배, 그리고 깔보는 듯한 시선이 역력한 선배 놈이 있었다.

여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남자들은 첫 모임이 무척이나 뻑뻑한 분위기를 만든다. 거기에 서열이 자리 잡은 바닥은 더욱 그렇다.

정지우는 들어가서 중간쯤에 편하게 앉았다.

네 자리 건너서 이진용이 거만한 시선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는데 그것까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정지우는 전국대회 우승팀 골키퍼, 저놈은 준우승팀 골키퍼인 거고, 그때 본 게 마지막인 데다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 놈인 거다.

잠시 후에 인사를 나누느라 시끌시끌하던 미팅 룸으로 4명이 들어섰다.

협회 로고를 가슴에 새긴 옷을 입고 가장 앞쪽에 들어선 이는 문광국이었다. 그는 빤히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한 3명과 함께 미팅 룸 안쪽으로 움직였다.

“반갑다.”

문광국이 앉아 있는 선수들을 주르륵 둘러보았다.

“새로 선발된 선수들이 있는데 다들 얼굴은 알 거라고 믿고, 여기 있는 코치진을 소개하겠다.”

그는 자신이 감독을 맡게 되었다는 그 흔한 인사말조차 없이 헤드 코치 박중길, 필드 코치 신동수, 골키퍼 코치 이광호를 소개했다.

짧고 형식적인 박수가 세 번 나온 다음이었다.

“알다시피 스케줄이 바쁘다. 사흘 뒤에 브라질, 그리고 이틀 뒤에 유고와의 평가전이 있으니까 점심 먹고 팀별로 나눠 체력 훈련과 전술 훈련을 시작하겠다.”

27명의 선수가 앉아서 문광국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영국 리그에서 온 사람은 정지우가 유일한 것처럼 보였다.

문광국이 시선을 돌리자 박중길 코치가 명단을 들고 이름을 불러 주었다.

1조 13명과 2조 14명이었다.

전부터 국가대표를 해 왔던 선수들이 1조, 새로 부른 선수들이 2조여서 편성 기준에 대한 설명조차 필요 없는 조 편성이었다.

골키퍼는 1조에 이진용과 주상도가 있었고, 2조는 정지우만 있었다. 이것도 조 편성 기준에서는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평가전의 주장은 동주가 맡아.”

“예.”

미리 언질을 받았던 것처럼 안동주가 바로 답을 했다.

“질문?”

문광국이 선수들을 천천히 돌아보다가 정지우를 보고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선수들이 모두 보는 앞이다. 시선들이 빠르게 달려들었는데, 정지우는 전혀 변함없는 얼굴로 문광국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바로 돌린 그가 코치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미팅 룸을 나섰다.

정지우가 몸을 일으켜 방으로 옮겨 가려는 참이었다.

“야! 정지우!”

자리에서 일어난 이진용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정지우를 불렀다.

나가던 선수들이 고개를 돌리며 무슨 일인가 할 때였다.

“너 계약했다며? 영국에선 잘나가는 모양이야?”

놈이 빈정대는 투로 말을 건넸다.

저놈은 전국대회 결승에서 본 이후로 처음 보는 거고, 그전에도 그리 친분이 있던 놈은 아니었다.

정지우가 피식 웃으며 문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거긴 돈을 많이 주냐?”

이진용이 또다시 빈정대는 말을 뒤통수로 던졌다.

여기까지만 참는…….

“많이 벌면 박 감독도 좀 주고 그래라.”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몸을 돌렸고, 곧바로 이진용의 앞으로 걸어갔다.

양동이로 물을 퍼부은 것처럼 침묵이 미팅 룸 안에 쫙 퍼졌다.

“너 나 알아?”

“뭐?”

손을 뻗으면 딱 닿을 만큼의 거리였다.

“너 나 아냐고?”

이진용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하는 말이었다.

놈이 이를 꽉 깨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쓸데없이 종알거리지 말고.”

“부럽긴 뭐가 부러워!”

이진용이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정지우는 한 걸음을 움직여 놈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키가 비슷해서 놈의 머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주접떨지 말고 아니꼬우면 조용하게 찾아와. 다 보는 앞에서 종알종알 참새 새끼처럼 그러지 말고.”

“그만해!”

지켜보던 안동주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런 거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어서 정지우는 몸을 돌려 다시 입구로 움직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이진용이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방으로 온 정지우는 털썩 침대에 몸을 던진 다음, 양팔을 머리 뒤에 넣은 자세로 누웠다.

별 병신 같은 것들이 다 건드린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 빌어먹을 평가전에 절대 오지 않았을 거다. 어차피 리그 끝나면 박용근과 전은주를 만나러 왔을 테니까 고작 한 달 정도 만남이 뒤로 밀린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을 거였다.

“후아!”

지금에 와서 모든 걸 털어놓으면 시선이 바뀔까?

아니! 어차피 이진용을 밀어주기로 한 것쯤은 이곳에 모인 모든 선수가 다 느꼈을 일이었다. 그렇다면 인식이 바뀐다고 해서 이런 분위기가 쉬 가시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이었다.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을 현명하게 이겨 내기는 어려운 나이였다.

신세 지기 싫었었다. 소문나서 어머니를 팔아 가며 무언가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지우는 천장을 우두커니 바라보면서 당시를 떠올렸다.

구단에서 왜 그렇게 독하게 나왔을까? 빤히 사정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지우야! 밥 먹으러 가자.”

그때 신준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정지우는 상체를 일으켰다.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던지 주길성은 아예 방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둘이서 식당이 있는 1층으로 걸어갔다.

“넌 어쩌면 옛날하고 그렇게 똑같냐?”

이놈은 어제까지의 모습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걸 거다.

“지금 구단에서도 그러냐?”

“뭘?”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자 앞에 선수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너 활약하는 거 보고 골키퍼 교체하라고 난리였었나 보더라. 그래서 신경이 날카로웠을 거야. 적당히 좀 참고 지내.”

“감독님만 입에 안 올리면 아무 일 없어.”

“알았다.”

박용근의 말이 나오자 신준석도 입을 다물었다.

음식은 제법 잘 나왔다.

식판에 먹을 만큼을 담은 정지우는 신준석과 마주 앉았다.

주변에 하나둘 편한 선수들끼리 앉아서 식사했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천천히 밥을 먹으며 신준석에게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고, 더불어 구단에서의 생활도 들었다.

“우리 부른 거 아무래도 구색 갖추기 같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신준석이 고개를 바싹 기울이며 속삭이는 것처럼 건넨 말이었다.

“길성이도 그렇고, 지금까지 안 부른 해외파를 불렀다고 하는데 전부 2부 리그에 있는 선수들만 부른 거잖아. 거기에 나하고 길성이는 수비수야. 수비랑 골키퍼가 엉망이라니까 우리는 그저 면피용으로 부른 거 같아서.”

정지우는 잠자코 잘 모르겠다는 투의 표정을 지어 보이고 다시 밥을 먹었다.

오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온 건 아무래도 정지우 하나처럼 보였다. 마주 앉아 있는 신준석, 저쪽에 끼어서 밥을 먹는 주길성, 그 외 해외에 왔다는 선수들 모두 이번 기회를 잡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오후 훈련 집합은 오후 1시에 있었다.

간단하게 몸을 푼 다음, 편안한 자세로 운동장을 돌았다.

30분에 걸쳐 운동장을 돌고 난 다음이었다.

“1조는 전술훈련, 2조는 체력 훈련을 하고, 3시부터 자체 청백전을 한다.”

문광국이 간단한 지시를 내리고 운동장 가운데로 몸을 돌렸다.

“2조는 저쪽으로 가!”

필드 코치 신동수가 손짓으로 보조 그라운드를 가리켰다.

조별로 다른 훈련을 한다고? 그것도 경기를 앞두고 2조만 체력 훈련을?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했는데, 일단 잠자코 보조 그라운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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