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잘해 보고 싶어요. (1)
박용근은 고개를 떨군 정지우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고개 들어. 너 죄지은 거 없다.”
“지우야, 그러지 마.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우리가 미안해.”
박용근의 말을 전은주가 얼른 거들었다.
“아닙니다.”
“이 녀석아, 얼른 들어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배고프다.”
박용근의 진심이 정지우의 가슴에 담겼다.
덩치가 커서 그런가 작았던 빌라가 좀 더 작아진 느낌이었는데, 아늑함은 전보다 훨씬 진하게 다가왔다.
컴퓨터를 두었던 옷 방으로 들어간 정지우는 가방을 열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했던 선물 2개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감독님, 이거…….”
“이게 뭐냐?”
“사모님, 이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역시나 옷을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은 정지우가 선물을 건넬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뜯어 봐도 되지?”
“그럼요.”
박용근을 위해 준비한 건 양주였다.
“녀석… 여유도 없을 텐데 뭘 이런 걸 샀어?”
전은주는 박스를 여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지우야?”
상자의 뚜껑을 연 전은주가 고개를 들어 정지우를 보았다.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 안의 내용물은 아직 열어 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제가 프로 선수 되면 사 드리기로 했던 건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전은주가 감정을 가라앉히면서 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제가 프로 선수 되면 꼭 명품으로 사 드릴게요.’
전은주는 선물만큼이나 언젠가 정지우가 그녀의 낡은 백을 보면서 했었던 말을 기억해 준 것이 더 고마운 얼굴이었다.
“어쩜…….”
까만 백은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전은주는 백의 겉면을 쓰다듬었다.
“고마워, 지우야.”
“마음에 드세요?”
“정말 마음에 들어. 고맙다, 지우야.”
전은주가 팔을 벌리고 다가와서 정지우는 상체를 숙였다. 이제는 훌쩍 커 버려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은주는 정지우를 안아 주기 어려웠다.
대강 정리하고 전은주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
어쩐 일인지 박용근은 평소처럼 거실에 앉아서 정지우가 돕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얼마 전에 유정호가 가져다주었던 음식과 별다를 것 없는 음식들이 가득 놓인 건데도 느낌은 전혀 달랐다.
“여보! 얼른 와요.”
“그래.”
셋이서 식탁에 앉았다.
“먹자.”
“잘 먹겠습니다.”
햇반이 아니라 솥에 지은 밥이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알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파주로 들어가냐?”
“예.”
“몇 시까지 가면 되는데?”
“오전 10시까지 소집이라고 들었습니다.”
박용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커다랗게 떠서 입에 넣었다.
정지우는 세 번째로 밥을 떠서 자리에 앉았다.
전에도 그랬다. 떠 주는 것보다 이게 편했었다.
밥을 먹으면서 정지우는 봄 햇살 아래의 얼음처럼 몸 안에 단단하게 눌려 있던 감정들이 서서히 녹는 것 같았다.
지난 시간에 대한 질문은 없었다. 그저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앞으로의 계획이 어떤지만 물었고 비슷하게 답을 했다.
밥을 다 먹은 후에 설거지만큼은 전은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도 전과 같았다.
정지우는 박용근과 함께 거실로 옮겼다.
소파라고 벽에 길게 놓인 게 전부여서 두 사람은 소파의 앞 거실 바닥에 앉았다.
“다리 펴고 앉아.”
“괜찮습니다.”
“펴라니까! 비행기 오래 타고 와서 그러고 있는 건 미련한 짓이야. 이리 기대서 얼른 다리 펴!”
박용근이 엄하게 하는 말을 거역한 적은 없었고, 실제로 장거리 비행 이후에 양반 다리 자세가 좋을 것은 없어서 정지우는 박용근의 말대로 소파에 기대 다리를 길게 폈다.
“지금이 영국은 몇 시쯤 된 거냐?”
정지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전 10시쯤 됐을 겁니다.”
“잠도 못 잤을 텐데 피곤하겠다.”
정지우는 괜찮다고 답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몸과 눈은 금방에라도 잠이 들 것 같은데 정신만 말똥말똥한 그런 느낌이었다.
“가서 씻고 나와. 뜨끈한 물에 씻으면 좀 나을 거다.”
“조금 있다가요.”
그때, 전은주가 녹차 3잔과 과일을 깎아 와서 모처럼 셋이 앉았다.
“어머, 눈에 잠이 가득하다. 지우야, 피곤하면 얼른 방에 가서 좀 누워.”
“그래. 잠이 안 와도 좀 눕는 게 좋아. 내일 훈련장 들어가면 또 거기 훈련에 따라야 하니까 선수라면 체면보다 컨디션 챙기는 게 더 현명한 짓이다.”
박용근이 엄하게 재촉해서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전은주가 함께 일어나 칫솔을 챙겨 주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치자 확실히 정신이 또렷해졌다. 대신 그만큼 피곤이 밀려오기도 했다.
거실로 나온 정지우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옆으로 가서 바닥에 앉았다.
고작 샤워하고 나온 건데 묘하게도 떨어져 있던 시간의 간격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한 시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평가전 끝나면 바로 가야 하니?”
“예. 바로 리그 경기가 있어요.”
전은주가 안쓰러운 얼굴로 정지우를 볼 때였다. 하품이 나와서 정지우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들어가 좀 누워라. 차라리 우리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남은 이야기하자.”
박용근이 벌떡 일어나서 옷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직접 펴 주는 바람에 정지우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 녀석, 정말 덩치가 많이 컸네.”
박용근이 신기한 눈으로 누운 정지우를 보고는 방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잠이 스르륵 몰려왔다.
어둠이 내려앉아서 거실 밖으로 옆 건물의 불빛이 보이는 시간이었다.
“많이 피곤했었나 봐.”
방을 살핀 전은주가 거실에 돌아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여보, 지우가 좀 이상한 거 아냐?”
그러면서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방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얼굴이야. 경기할 때 모습과는 전혀 다르던데, 당신 생각은 어때?”
박용근은 답을 하지 않고 정지우가 있는 옷 방을 보았다. 그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
얼마 만인지 모른다.
늘 무언가를 경계해야 하는 삶에서 살다가 완벽한 보호자의 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깊게, 그리고 편안하게 잤다.
“지우야.”
전은주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정지우는 입가에 웃음을 달았다.
편하다. 행복하다.
이렇게 일어나서 박용근과 함께 경기를 나서면…….
화들짝!
정지우가 벌떡 일어났을 때 전은주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얼른 나와서 세수해. 밥 먹자.”
“예?”
“오늘 파주 훈련장 가야 하잖아.”
창밖에 환한 빛이 들어와 있었다.
세상에! 도대체 얼마나 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는 이불을 개켜 장롱에 넣고 거실로 나왔다.
“편히 주무셨어요?”
“흐흐흐, 이제 좀 사람 얼굴 같다.”
박용근이 정지우의 등을 툭 치고는 욕실을 가리켰다.
“얼른 씻고 나와.”
구수한 된장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아침이었다.
항상 아침을 먹고 샤워를 했었다. 어차피 양치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지우는 고개를 흔들며 세면대 위에 걸린 유리를 들여다보았다.
이 집에 들어오고서 알았다.
그동안 외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면서 울음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때 울게 되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고, 그럴 때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무서웠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이렇게 올 수 있는 곳인데 말이다.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게 먼저 간 어머니에게 그렇게 큰 죄를 짓는 건 아닐 거다.
그렇지? 엄마?
“엄마…….”
정지우는 세면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보고 싶다.
깡마른 손이라도 좋으니 잡아 보고 싶고, 링거약이 물든 눈이어도 좋으니 보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 싶은 마음을 마음 놓고 꺼내고 싶었었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놓은 채로 정지우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
“흐으으. 흐으. 흐으.”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고, 박용근과 전은주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못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죄스러웠다.
경기에 나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전혀 의미 없는 삶이었다. 그러면서도 경기에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했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올 곳으로 돌아온 느낌, 안에 눌려 있던 무언가가 툭 터져서 눈물로 나오는 느낌이었다.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작은 빌라다.
아무리 세면대 물을 틀어 놓았다고 해도 정지우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모두 감추지는 못했다.
입을 틀어막은 전은주가 눈물을 연신 훔쳤고, 이를 꽉 깨문 박용근은 창밖으로 시선을 준 채로 서서 그 울음을 들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아직은 눈이 빨갛게 물든 정지우가 밖으로 나왔다.
정지우가 박용근을 보았다.
“감독님.”
“왜?”
웃겼다. 작은 눈이 발갛게 돼서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박용근이.
“저 용서해 주세요. 예전처럼 잘해 보고 싶어요.”
“미친놈. 너 지난 경기에서 최고였어. 그리고 너 잘못한 게 없어서 난 용서할 것도 없어, 인마!”
전은주가 눈물이 왈칵 올라온 눈으로 지켜보는 앞에서, 언젠가 고등학교 때처럼 박용근이 정지우에게 다가와 가볍게 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막혀 있던 코와 입이 뻥 뚫린 것처럼 숨을 들이켤 때마다 가슴이 후련했다.
“이놈이 이거, 이제야 눈빛이 돌아왔네.”
셋이서 동시에 어색하게 웃었다.
“밥 먹자. 출근 시간 걸려서 훈련장까지 꽤 걸릴 거다.”
똑같이 탁자에 앉았는데 어제저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된장찌개를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자 온몸에 향이 퍼지는 느낌도 들었다.
“천천히 먹어, 얘!”
“괜찮아요.”
정지우가 벌떡 일어나 밥솥으로 움직였다.
“내 것도 좀 더 퍼라.”
“예.”
돌아왔다.
집으로, 축구를 처음 시작했었던 그곳으로.
식사를 마치고 제대로 씻고 나온 정지우는 식탁에 앉아 녹차를 마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병원이 무서워서 도저히 가지 못했었어요. 하얀 건물만 봐도 자꾸만 피했었구요.”
유니온 시티에서 빌을 만났고, 그 꼬마의 소개로 릴리를 알게 되고서야 정지우는 병원에 들를 수가 있었다.
“어머니와 같은 병이었어요. 릴리의 부탁으로 아스널전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구요.”
박용근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 이제 가야지.”
“예.”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는 트렁크 하나만 들었다.
“이리 또 올 수 있겠냐?”
“밥 한 끼는 더 먹고 가려구요. 억울해서 그냥 못 갈 것 같아요.”
“흐흐흐.”
정지우의 답에 박용근이 넉넉하게 웃어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화이팅! 꼭 경기장 가서 응원할게.”
“예.”
박용근과 함께 집을 나선 정지우는 가방을 뒷좌석에 넣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카라라라랑.
너무 무리한 운행 아니냐는 것처럼 승용차가 악을 써 대며 움직였다.
박용근이 힐끔 정지우를 보고는 앞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어제 공항에서 오던 길에는 중학교 때의 눈을 하고 있더니, 지금은 전국대회 결승전 날 아침의 눈을 하고 있었다.
“지우야.”
“예.”
느낌마저 그날과 비슷했다.
“최선을 다해. 그거면 된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기죽지 마라. 축구장에서는 축구 잘하는 놈이 최고인 거다.”
“예.”
박용근이 씨익 웃었고, 정지우는 피식 웃었다.
아쉬운 건 덧없이 흘러 버린 지난 세월이었고, 반가운 건 그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함께 있다는 것이었으며, 행복한 건 앞으로 이렇게 함께할 수 있다는 기대였다.
“아! 그런데 너 경기 중에 하늘로 두 손가락 든 건 뭐였나? 그거 멋지더라.”
정지우는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하고 감독님 생각했었어요.”
“녀석! 요거 문호가 좀 들어 줬어야 하는데, 아쉽다.”
6년을 쌓아 두었던 벽 구석의 작은 문이 열린 느낌이었다.
“먼 길 돌아왔다. 이제부터 똑바로 가자.”
“예. 정말 잘해 보고 싶어요.”
“그래! 브라질이라면 좋은 경험도 될 거다.”
박용근과 정지우가 비슷한 눈빛으로 함께 웃었다.
“견제가 심할 거다. 좋은 의도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것도 신경 써야 할 거야.”
김문호 축구 교실 감독 자리마저 뺏은 사람들이 오죽할까.
정지우는 단단하게 ‘예.’ 하고 답을 했다.
마침내 파주 NFC에 도착했다.
“잘하고 와라.”
“끝나고 뵙겠습니다.”
주차장에서 트렁크를 내린 정지우가 박용근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다음이었다.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다른 말 하지 말고 바로 들어가.”
박용근의 조언이 나직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