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42화 (42/262)

제6장. Ji에게 축구는 어떤 의미야? (3)

다음 날, 오전 훈련과 점심을 마친 정지우는 마틴과 마주 앉았다.

“미스터 유에게 말은 들었나?”

“충분히 들었습니다.”

“계약서는?”

마틴은 계약서가 분명한 서류 2부를 들고서 정지우의 표정을 살폈다.

“못 본 모양이군.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지.”

그는 그중 한 부와 연필을 정지우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누군가의 말과 눈빛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기록할 수는 없지. 계약서는 시간이 흘렀을 때를 위한 것이니만큼 한 번은 꼭 봐 두는 게 좋아.”

선생님처럼 말을 마친 마틴은 자신의 앞에 두었던 계약서를 펼치고 연필을 들었다.

“기본 내용은 지나가기로 하고.”

유정호가 전해 주었던 내용을 반복하는 과정이었지만 정지우는 마틴의 이런 꼼꼼함이 배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30분쯤이 지나서 계약서를 모두 살핀 다음이었다.

“메디컬 테스트는 스미스가 담당이니까 자네만 괜찮다면 내일 하는 게 어떤가? 그리고 계약서 서명은 그다음 날로 하지.”

서두르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자네의 기존 평가에 비하면 큰 금액의 계약이다. 쥬피터 회장은 이 계약을 통해 두 가지를 희망하지. 하나는 자네를 통한 기업 후원, 다음으로는 이적을 통한 수익.”

“두 가지 모두 어려운 이야기군요.”

마틴이 입술을 한쪽으로 몰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냈다.

“쥬피터 회장은 이미 한국의 기업과 연결된 곳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에 자네가 한국의 차출에 동의해 주길 바란다.”

정지우가 짐작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계약은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전제로 하는 계약이라 만에 하나 승격을 이루지 못한다면 쥬피터는 그다지 크게 손해 보는 것도 없어.”

마틴은 아직 전하고 싶은 설명이 남은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 계약을 체결하고 자네가 골키퍼로 나선다면, 그리고 승격 후에도 눈부신 선방을 보여 준다면, 동양인 최초 프리미어리그 선발 골키퍼라는 영예와 그에 따르는 인기를 얻게 되지.”

“그렇다고 한국 기업이 달려들까요?”

“아시아 시장을 눈여겨봐야 해. 자네의 활약에 따라 아시아의 신흥 브랜드들이 유니온 시티로 달려들 수 있어.”

이런 계산은 결국, 사업가를 당할 수는 없는 거구나 싶은 조언이었다.

“메디컬 테스트와 계약은 내가 제안한 대로 진행해도 되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스터 유에게 그 자리에 참석하라고 전해 주게. 물론 내 변호사가 나서겠지만, 그도 증인으로 자리를 지키는 게 유리한 것들이 많아.”

“알겠습니다.”

마틴은 말을 마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한국의 선수 차출 신청에 대해선 어떻게 하겠나?”

“계약에 의무 조항은 아닌 거잖습니까?”

“그렇더라도 구단에 협조할 필요는 있지. 자네가 끝까지 거부하면 구단은 손해 보는 장사를 시작하는 꼴이 되니까.”

뭔가 반대로 된 느낌이어서 정지우는 입맛이 썼다.

사실 이런 건 선수가 참가를 원하고 구단이 말려야 정상인 거다.

“다녀와. 자네가 한국에 다녀오는 일주일 동안 고작 두 게임밖에 없으니까.”

“FA컵 8강전과 리그 게임입니다.”

“쥬피터 회장의 계산기는 그 두 경기를 버리더라도 자네가 한국에 다녀오는 게 더 이익이라고 표시하는 모양이던데?”

마틴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 역시 이번 일은 정지우가 양보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흠.”

정지우는 답답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박용근 축구 교실의 기틀이 만들어지는 계약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축구 팬들에게 굳이 나쁜 인상을 심어 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일세.”

정지우의 답이 나오기도 전에 마틴은 두툼한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자네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일본에 진출해서 이제껏 선수 생활만 했어. 더구나 이번 몇 경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기록이었지. 그게 전부인가?”

“어떤 답을 원하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훈련이나 교육, 뭐 그런 걸 받은 적은 없나 하는 걸세.”

“각 구단에서 지도하는 골키퍼 교육 외에는 없었습니다.”

마틴은 천천히 서류를 넘기며 몇몇 항목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클레이와의 호흡은 어떻게 맞추게 된 거지? 기록에 남은 그동안의 자네 성향이라면 누군가와 그렇게 지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외톨이로 지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겠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네. 전혀 비하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는 질문이었네.”

마틴의 정중한 사과를 듣자 정지우는 좀 더 성의껏 답을 하고 싶었다.

“제 방식으로 정리해 둔 노트가 있습니다. 다들 아는 것들인데 상대해야 하는 팀의 주 포메이션, 선수들의 특이한 버릇, 슈팅 타이밍, 반사적으로 나오는 습관 같은 겁니다. 클레이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야 알겠다는 것처럼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미어리그에 승격되어도 그해에 리그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55퍼센트밖에 안 된다. 우리가 그 55퍼센트 안에 들기 위해서 내겐 자네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프리미어리그 소속팀과의 경기는 아스널전이 유일합니다.”

“초반에 최대한 경험을 얻고 후반에 힘을 내야지. 17위까지 살아남는다. 그 안에 드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목표다.”

“알겠습니다.”

“더 궁금한 것은 없나?”

“없습니다.”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움직였다.

메디컬 테스트는 임대 후 완전 이적의 형태이고, 스미스가 담당이라 마틴마저도 간단하게 통과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심장과 폐 기능, 관절, 골반, 등속력 검사 등을 꼼꼼히 마친 스미스는 성 마테오 병원으로 이동해 MRI와 치과 검진까지를 진행했다.

하마터면 하루에 끝마치지 못했을 만큼 시간을 많이 소요하는 검사였다.

“고생했어.”

스미스가 내민 손을 잡으며 정지우는 이적의 절반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모처럼 양복을 차려입은 정지우와 유정호가 쥬피터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메디컬 테스트가 있었다는 정보를 들었는지 보도를 위해 한국 기자 4명을 포함한 총 10명가량의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식 입단 기자회견은 정식 계약일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유정호, 양측의 변호사, 이사진 3명, 마틴 감독이 지켜보는 앞에서 쥬피터는 최대한 친근한 미소와 태도로 정지우를 맞았고, 우호적인 느낌으로 계약서의 뒷장에 사인했으며, 정지우와 악수를 나누는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첫해에 일본에 진출할 때와 비슷한 느낌?

이렇게 정지우는 유니온 시티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기자회견은 어떻게 하겠나?”

“지금 당장은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쥬피터가 정지우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적에 합의했다는 정도만 발표하는 것으로 하지. 어차피 계약 내용 역시 그런 것이니까.”

쥬피터가 넉넉한 표정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자네를 레드 블레이트의 선수로 영입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도 모두 마쳤다.

정지우와 유정호를 따라 계약에 참석했던 변호사들과 마틴, 그리고 유니온 시티 구단의 이사 한 명이 뒤를 이어 사무실을 나섰다.

“동양인 선수에게 너무 큰 금액을 지불하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염려됩니다.”

쥬피터의 심복 중 콧수염을 길게 기른 이사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사무실 문을 노려보았다.

“승격에 실패하면 오늘 지불한 계약금을 찾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손해였는데, 그걸 한국에서 지원해 주지 않았나?”

“동양인 골키퍼는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공하면 아시아 시장에서 엄청난 수익을 기대해도 될걸세. 자네 염려대로 저 친구가 반짝해서 계약만 이루고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는 한국의 축구 교실이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네.”

“따로 계획이 있으시군요?”

쥬피터가 묘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그려 냈다.

“그렇다기보다는 이번에 한국 협회를 통해 한 수 배웠다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새로운 선수 영입은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마틴의 능력을 지켜보자고.”

무언가 믿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쥬피터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정지우는 1층의 현관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뒤로 유정호와 마틴, 그리고 변호사가 서 있었다.

“유니온 시티와의 계약을 체결한 겁니까?”

“두 달 남은 계약이 완료되는 대로 이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메디컬 테스트는 받았습니까?”

정지우가 뒤를 돌아보자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 어제 받았습니다.”

“이제 유니온 시티가 소속팀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적하게 된 소감을 부탁합니다.”

“레드 블레이트에서 계속 경기할 수 있는 점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쥬피터 회장과 감독, 주장 데이빗과 동료 선수를 만난 것이 내게 훌륭한 경험이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연달아 나오는 질문 몇 개에 답을 하고 났을 때였다.

“한국의 국가대표 차출에 대해 거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심정을 좀 밝혀 주세요.”

유니온 데일리 기자의 질문이 바로 달려들었다.

“흠! 그 답은 내가 하겠소.”

마틴이 앞으로 움직여 정지우의 옆에 섰다.

“우리는 중요한 게임을 앞두고 있으나 선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한국 축구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Ji의 국가대표 차출에 흔쾌히 그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국 기자들이 눈짓을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었다.

대충 질문이 끝나고 마틴에게 기자들의 질문이 달려들 때였다.

“정지우 선수, 한국의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는데 감회를 한 번 들어 볼까?”

한국인 기자로부터 예의를 갖춘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어정쩡한 말투의 질문이 날아왔다.

“국가대표로 선발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기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게 확실하게 보였다.

“일부에서는 정지우 선수를 국가대표로 기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쭈? 이렇게 피해 가겠단 말이지?

기자가 고개를 갸웃한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의 일에 대해서 국내의 축구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

정지우는 시선을 떨구고 박용근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질문에 답을 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였다.

일본에서 처음 했던 인터뷰 때 질문과 답을 교묘하게 편집해 놓았던 기사 때문에 힘들었던 이후로 자꾸만 기자들을 피하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게…….”

기자가 말꼬리를 잡으려 드는 순간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유정호가 정지우의 상체를 안다시피 해서 걸음을 옮겼다.

“야! 정지우! 야!”

질문을 던지던 기자가 몇 차례 불렀지만, 유정호는 바로 서 있던 택시를 잡아타고 정지우와 함께 사라졌다.

“황 기자님, 인제 그만 적당하게 써 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흥! 저 새끼 저거, 건방져. 하긴 가르친 감독부터가 그 꼬락서니니까.”

질문을 던졌던 후배 기자가 황종연의 대꾸에 멀리 시선을 던졌다.

“어? 너 표정이 왜 그래?”

“그게 아니라, 얘기 들어 보니까 저 녀석 아픈 사연도 있던데요. 이 정도 고생했으면 좀 다독여서 월드컵에서 활약하게 도와도 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야! 세상 살면서 아픈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어? 그리고 그런 걸 원하면 저놈이 알아서 이러저러하다고! 죄송했다고! 그렇게 기어야지! 내가 일일이 선수 쫓아다니며 기사 써야겠냐! 제 놈이 무슨 야신이야? 부폰이냐고!”

목청을 높이는 황종연을 두고 기자 셋이 걸음을 옮겼다.

인터넷 시대다. 먼저 올리는 게 더 중요한 세상에서 더는 시간을 빼앗기기 어렵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정지우는 유정호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섰다.

“수고했다.”

“형도 고생 많았어.”

둘이 불편한 양복을 벗어 던지고 편한 옷으로 입자 마음까지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정지우는 물을 꺼내 작은 병 하나를 단숨에 들이켰다.

“한국 출발은?”

“모레.”

“나도 같이 갈 거다.”

“그래.”

“무슨 미친놈의 평가전을 이렇게 급하게 잡아서. 하여간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후아!”

유정호가 소파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길게 누웠다.

“신기하네. 그래도 이런 계약을 했다는 게.”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입금됐겠지?”

“그랬겠지.”

“흐아! 이게 정말 믿기지가 않네.”

유정호는 뒤로 또다시 길게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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