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41화 (41/262)

제6장. Ji에게 축구는 어떤 의미야? (2)

클레이가 던진 철학적인 질문을 머리에 담은 채 정지우는 릴리의 병실로 움직였다.

오늘은 안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다. 의사 가운을 입은 동양인 여자와 메기가 병실 밖에서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였다.

시선을 들었던 메기가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Hi! Ji!”

눈인사를 하고 다가가자 메기는 앞에 있는 동양인 의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인사해. 이분은 릴리의 담당 의사 데이지 킴(Daisy Kim) 박사, 이쪽은 유니온 시티 골키퍼 Jiwoo Jung.”

“만나서 반가워요.”

“릴리가 워낙 말을 많이 해 줘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거 같네요.”

손을 내민 데이지와 악수를 한 정지우가 안을 힐끔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머리카락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어.”

메기가 릴리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항암 치료에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그렇더라도 속도가 너무 빠르긴 했다.

“들어가도 돼.”

정지우는 ‘만나서 반가웠어요.’란 말을 남기고 병실로 들어섰다.

“Hi, Ji.”

침대에 앉은 릴리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정지우를 맞았는데, 지난번보다 상태가 좋아 보여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끔찍한 일이야.”

릴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러지 마.”

정지우는 침대 옆에 앉으며 릴리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건강해지면 다시 자라날 건데, 뭘. 그리고 난 릴리의 머리카락을 좋아했던 게 아니니까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번 주 결과 보고 일주일 뒤에 외출 허락할지 모른다고 했거든. 그걸 기대하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더 빠지면 흉해서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야.”

“외출?”

“응, 외출. 치료 결과를 봐야 하지만 기대해 볼 만하대.”

어린아이답게 외출 이야기를 하면서 릴리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어디 가고 싶어?”

“Ji가 경기하는 곳.”

“그건 가능한데, 내가 선발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워. 그 외는?”

“밀레니엄 브리지 건너서 세인트폴 대성당.”

너무 엉뚱한 곳이라 웃음이 푹 나왔다.

“기도하고 싶어. 엄마와 Ji를 위해서.”

“멋진 계획인데?”

“그렇지? 그런데 엄마는 내가 집에 있었으면 싶은가 봐.”

건강이 염려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릴리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한숨을 푹 쉬는 게 예뻐서 정지우는 눈에 웃음을 달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지난 게임은 너무 거칠었어.”

근심을 그친 릴리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을 꺼냈다.

“그래도 그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는데 밤벤트리에 지는 바람에 기운이 다시 쑥 빠졌어.”

인형같이 생긴 여자아이가 축구 경기에 졌다고 기운이 빠졌다며 어깨를 축 늘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웃음 말고 다른 대꾸를 하기가 어렵다.

“웃을 일이 아니야.”

“뭐가?”

“유니온 시티는 아직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확보하지 못했거든.”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어려운 단어들인데도 릴리는 능숙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감독은 왜 Ji를 선발로 내세우지 않는 거지?”

“내 컨디션이 안 좋았거든. 그리고 감독은 한 게임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리그 전체와 FA컵도 계산해야 하잖아.”

입을 내민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치료실에 있던 닥터 요셉이 그랬어. 우선 리그에 충실하고 그 뒤에도 기회가 있다면 FA컵을 노리는 게 옳은 거라고.”

“그런 얘기도 해?”

“응. 닥터 요셉도 Ji의 팬이래. 그래서 그가 하는 평가는 늘 옳아.”

뭔가 똑똑한 말 같은데 자세히 들어 보면 엉뚱한 말이어서 정지우는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런데 웃음 끝에 밖을 보았을 때 메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아니! 아래층에 라우쓰전에서 다쳤던 동료가 입원해 있어서.”

“클레이!”

정지우는 ‘응.’ 하며 답을 해 주었다.

“나중에 소개해 줘. 그럼 내가 시간 날 때 가서 위로해 줄게.”

“그럼 좋지.”

20분쯤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정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가 잘 나오길 빌어.”

“고마워, Ji.”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마친 정지우가 밖으로 나왔을 때 메기는 혼자 있었다.

“릴리가 외출할 수 있다면서요?”

“그런 말을 했어?”

메기가 커다랗게 한숨을 털어놓았다.

“결과가 안 좋은가요?”

“아니. 닥터 킴 말로는 외출은 괜찮을 거래.”

그럼 뭐가 문제지?

정지우의 시선에 담긴 의문을 알아챘는지 메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1년 만에 하는 외출이거든. 열흘이나 시간을 주었는데 그동안 직장을 나가지 못하면 다음 달 생활이 당장 걸려. 그것 말고도 릴리가 가고 싶은 곳이 워낙 많고.”

슬픈 메기의 눈동자를 보며 정지우는 마지막에 보았던 어머니의 눈빛이 떠올랐다.

“한국에도 가고 싶은 모양이야. 그런데 당장 런던을 가기에도 벅차.”

“비행기를 탈 수 있대요?”

메기가 고개를 저었다.

“어려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경제적으로 어려운 건지, 아니면 릴리의 건강 상태가 어려운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더 묻기도 애매해서 정지우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다음 주말에 Ji가 나서는 경기가 있으면 그곳에 갈지 몰라.”

“선발이 확정되면 알려 줄게요.”

“고마워, Ji.”

“잘될 거예요.”

메기와 허그를 한 정지우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다독인 후에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였다. 데이지가 복도를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정지우는 그녀를 잠시 불렀다.

“릴리가 비행기를 탈 수 있나요?”

“무슨 뜻이죠?”

의사라 그런가 똘똘하고 당찬 이미지였다.

성형을 했나 싶을 정도로 뾰족한 코, 서양인을 연상시키는 얼굴 윤곽과 턱선을 지녔는데, 한마디로 포카혼타스의 여자 주인공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릴리가 외출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비행기를 타도 되는지 알고 싶어서요.”

“별로 좋지 않아요. 위험할 수도 있고요.”

자신 있는 눈빛과 말투였다.

때앵.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서 정지우는 그만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짧게 인사한 정지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서 몸을 돌렸을 때 데이지는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를 반겨 준 것은 또다시 현관에 쪼그려 앉은 유정호였다.

“형?”

벌떡 일어선 그는 분명 빈손이었다.

“야! 전화 좀! 제발 전화 좀 가지고 다녀!”

“무슨 일인데? 뭐 안 좋은 일 있어?”

계약이 깨졌나 싶었다.

하긴 8게임 무실점이 어쩌고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니 그럴 법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정호가 와락 달려들어서 정지우를 꽉 껴안았다.

“야! 유니온 시티가 정식으로 오퍼 냈다! 내일 어지간한 신문에는 오퍼에 관련된 기사 다 뜰 거다! 너 주급이 3만 5천 파운드야! 우리 돈으로 기본 연봉 30억! 거기에 출전 수당, 승리 수당 별도!”

“잘됐네.”

“너 미쳤냐! 제대로 한 건 한 거지! 이 바닥 짬밥이 무섭다더니, 마틴 감독이 그래도 한가락 하긴 한 모양이다. 우하하!”

과장되게 웃은 유정호가 웃음을 뚝 자르고 정지우의 표정을 살폈다.

“너 무슨 안 좋은 일 있었냐? 이거 안 기뻐?”

“그냥. 좀 뜬금없잖아. 내가 그 정도로 받을 선수도 아닌 거 같고.”

“미친놈! 야! 가자! 저녁은 내가 산다!”

“근처에 갈 만한 곳도 없어.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라면에 밥 먹지?”

“그래? 그럼 저녁은 그렇게 할까?”

흥분을 전혀 털어 내지 못한 유정호를 데리고 정지우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면서도 유정호는 차량 지원, 숙소 지원 따위의 세부 조건을 주절주절 털어놓았다.

그가 깻잎 통의 뚜껑을 열다가 검지에 묻은 양념을 ‘쪽’ 소리가 나도록 빨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계약에 축구 교실도 포함되어 있어.”

“정말?”

정지우는 라면에 분말 수프를 넣다 말고 홱 고개를 돌렸다.

“하아! 이거 중증이네. 야! 좀 너를 위해서도 살아 봐라. 애늙은이도 아니고, 무슨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린 마마보이처럼…….”

“그거 확실한 거지?”

“그렇다니까! 변호사가 연락했기에 내가 계약 내용 하나하나 다 줄 쳐 가면서 챙기고 또 챙겼다니까!”

“와아!”

정지우는 어려운 슈팅을 막아 냈을 때처럼 양손을 움켜쥐었다.

“이제 좋냐?”

“그러네!”

“그럼 얼른 가스 불 꺼라. 라면 넘친다.”

이런 엉뚱함이 유정호의 매력이기도 했다.

역시나 정지우는 햇반만 먹었고, 유정호가 라면에 밥을 말아서 먹었다.

“너 이렇게 탄수화물만 먹어서 되겠냐?”

“아침은 샐러드하고 연어, 달걀, 우유를 돌아가면서 먹고, 점심은 구단에서 적당하게 해결하니까 아직 문제는 없을 거야.”

“에효! 구단에서 정해 주는 집 생기는 대로 일단 함께 지내자. 이제부터 주전으로 뛰게 될 텐데 먹는 것도 좀 신경 쓰긴 해야지.”

밥을 먹고 대강 치운 뒤, 둘이서 편안하게 앉았다.

“세금이 40퍼센트, 형식적인 내 몫이 10퍼센트야.”

“형식적은 뭐야?”

“너무 많은 거 같으니까 너하고 생각해서 적당한 선에서 받으려고 하는 거지.”

“형은 그래서 돈을 못 벌었나 보다.”

“아쭈?”

함께 웃을 일이 있다는 것이 일단 좋았고, 다음으로 박용근 감독에게 축구 교실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뭔가를 이뤄 낸 거 같은 기분.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전국 대회 우승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5분쯤 설득한 뒤에야 유정호의 몫을 계약서대로 10퍼센트로 결정할 수 있었다.

“내가 어째 강도 같다.”

“형도 참! 그래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

“네 걱정이나 해!”

유정호가 미안해할 정도의 수입을 만들어 냈나 싶어서 어딘가 값어치 있는 사람이 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차피 던캐스트와는 법적으로 하자 없고, 이적 계약은 가계약 형태로 계약금만 지불한 뒤에 리그 종료 후 선수 등록, 계약 기간 3년, 바이아웃은 연봉의 3배. 이 정도다.”

정지우는 다른 생각이 없어서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던캐스트와의 남은 계약 기간이 6개월 미만이라 보스만룰에 의해 소속 구단에 통보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다른 팀과 접촉해도 상관없다.

“바이아웃이 연봉의 3배는 좀 세지 않아?”

연봉이 40억이라고 가정할 때 어느 팀이든 120억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정지우가 동의할 경우 유니온 시티는 이적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의미다.

“그 정도에 이적한다면 유니온 시티는 대박 치는 거지.”

이적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계약이라고 해도 연봉부터 이적료 기본선까지, 좀 과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메디컬 테스트는 내일 마틴 감독과 만나서 의논해 봐. 마틴 감독 의견은 하루라도 속히 계약을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하던데.”

“내일 만나면 되는 거지?”

“아! 그 이야기를 안 했다. 내일 기다린다더라. 점심 먹고 나서 보자던데?”

빠져나간 넋을 잡아당기는 사람처럼 유정호는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 보였다.

“나 자고 갈란다!”

그러면서 유정호가 두 팔을 쭉 편 채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모처럼 행복한 밤이었다.

***

박용근은 흡사 멍청이처럼 보였다.

“어어? 이이가 정말, 쌔근이도 아니고.”

전은주가 처녀 시절 안성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릴라치면 늘 씨익 웃으며 ‘백 원만!’ 하던 머저리가 일명 ‘쌔근이’였다.

“흐흐흐.”

“어어?”

“푸흐흐.”

“이이 좀 봐?”

전은주는 그만 박용근을 따라 웃고 말았다.

새벽에 올라온 인터넷 기사에는 분명 오퍼라고만 했고, 설이 돈다는 말만 있었다. 그러나 기사에도 나왔듯이 성사만 된다면 ‘동양인 두 번째 프리미어리그 골키퍼’이고, 선발로 나선다면 동양인 최초 선발이 바로 정지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아서 전은주는 웃는 얼굴로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좋지?”

“응.”

부천 쌔근이의 질문에 전은주는 고개를 끄덕여 가며 답했다.

“우리 지우, 정말 계약되겠지?”

“계약 안 하면 유니온 시티가 손해 보는 거지.”

이번에는 쌔근이의 부인이 질문했고, 쌔근이가 답을 했다.

좋았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소속팀 차출 거부와 상관없이 두 사람에게 정지우의 소식은 그런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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