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Ji에게 축구는 어떤 의미야? (1)
마틴의 사무실을 나온 정지우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선수단 통로를 지났을 때였다.
“ji.”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바리케이드에 기대 있던 멜스가 기다렸던 것처럼 몸을 세웠다.
프로 선수답게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몸이어서 놈이 걸친 셔츠와 양복이 꽤 괜찮아 보였다.
“무슨 일이야?”
“궁금한 게 있어서.”
정지우는 ‘여기서?’ 하는 느낌으로 멜스를 들여다보았다.
“너는 내가 본 그 어떤 골키퍼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거든.”
하여간 영어의 이런 과장된 칭찬은 따라갈 방법이 없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왜 클레이보다 못한 거지?”
정지우의 표정을 살핀 멜스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난 오버래핑도 괜찮고, 주력도 좋은데 왜 경기 분석이나 평점에서 클레이에게 뒤지는 건지 모르겠는 거야. 전에 보니까 클레이의 위치를 잡아 주던데 나의 단점이 있다면 알려 줄 수 없을까?”
“글쎄? 그런 건 코치들하고 의논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러지 말고 원포인트 레슨 한번 부탁해.”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후에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 그리고 그 뒤로 숨겨 놓은 불안함이 멜스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클레이처럼 뛰고 싶어. 수비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내가 부족한 게 뭐지?”
“비디오 분석은 해 봤어?”
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이에게는 골키퍼의 동선을 알려 주었을 뿐이야. 그 외에는 비디오 분석에 나온 것들을 다시 정리했지. 다음 경기에 나올 선수들의 특징을 알고 있으면 서로 쉽잖아.”
너무 뻔한 이야기여서 그런지 멜스는 실망한 얼굴이었다.
“넌 오버래핑이 좋아. 하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당장 속도가 처지니까 내가 상대편이라면 네가 오버래핑한 다음을 노리고 들 거다.”
“흠.”
“그 외에 수비할 때 너무 쉽게 달려들어. 인내를 가지고 상대의 모션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데 너는 유혹하면 바로 뛰어들지. 그게 문제야.”
멜스가 입맛을 다시며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가도 되겠지?”
“고마워, Ji.”
멜스에게 손을 들어 준 정지우는 느긋하게 집으로 향했다.
릴리와 클레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병원에 가기에는 아직 컨디션이 불안했다.
그나저나 국가대표 소집?
피식.
그것도 관심이 있을 때나 감사한 일이지.
정지우는 느긋하게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
김문호는 의심스러운 표정에 한심하다는 뜻을 덧바른 얼굴로 한승관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지금 때가 어떤 때냐? 인터넷이니 방송이니, 말로는 나보다 전문가가 바글바글한 세상이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럼 이건 뭐야?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한다는 협회에서 A-매치 기간도 아니고, 앞으로 남은 6게임에 리그 승격과 탈락이 갈리는 팀에게 대뜸 선수를 차출해 달라니. 그것도 느닷없이 잡힌 평가전에…….”
김문호가 손을 뻗어 공문을 들었다.
“뭐야? 다 영어잖아?”
그는 A4 용지를 탁자에 놓고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애들은?”
“예?”
“다른 팀에 속한 애들은 어떻게 됐냐고? 너… 설마 이거, 해외에서는 지우만 부른 거냐?”
“그런 건 아니고, 지금까지 기용되지 않았던 애들 위주로 5명 선발했습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띠었던 김문호는 아예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기용해 보라고 말 나왔던 선수들 불러서 브라질하고 붙여 보겠다, 이런 거였구나. 가라.”
“선배님! 이거 중요한 경기입니다. 브라질이나 유고 같은 강팀과 경기를 마치면 애들 실력이 쑥쑥 느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경기를 자격증도 없는 문광국이한테 맡기는 거고, 중요한 경기를 앞둔 지우를 부르는 건데?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난 지우한테 아무런 권한도 없다.”
“그러지 마시고, 박 감독님을 좀 만나 주시죠.”
“야! 이……!”
한승관은 움찔했다가 고개를 비틀고는 인상을 버럭 썼다.
지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겁을 먹나 싶기도 했고, 위치로 보나 뭐로 보나 김문호에게 꿀릴 것이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사람이면 좀 양심이 있어 봐라. 용근이 여기서 나간 지 두 달이 됐냐? 석 달이 됐냐? 잘하던 놈 앞길 뚝 잘라 놓고 뭐? 박 감독을 만나 주시죠? 이걸 진짜, 확!”
한승관이 ‘선배고 뭐고, 이걸 확 뒤집어엎어?’ 하는 순간이었다.
“야! 한승관이! 나도 여차하면 이거 때려치울 생각이니까 내 앞에서 눈깔 그렇게 뜨지 마.”
김문호의 다부진 대꾸에 한승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지우를 부르지 못한다면 조동익 부회장은 한승관의 평가서에 붉은 글씨로 ‘모자란 놈’이라고 적어 둘 게 분명했다.
“선배님, 그러지 마시고 좀 도와주십시오.”
“아! 거참, 모자란 새끼.”
한승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탁자 아래로 얼른 내렸다.
“우리가 나서도 지우가 속한 팀에서 걔를 보내 주겠냐? 보내 주겠냐고? 당장 FA컵 8강전에 프리미어리그 승격이 달렸는데?”
“끝내 안 도와주시겠다 이겁니까?”
“도와줄 방법이 없는 거야, 이건!”
박용근을 찾아가 봐야 얻을 건 하나도 없는 거다.
한승관은 암담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무슨 일을 이렇게 처리해!”
조동익의 음성이 쨍하고 그의 사무실을 메웠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평가전에 차출한 선수를 소속팀이 거부한다고 해 봐! 또 무슨 소리들을 하겠어?”
조동익이 답답하다는 듯 분통을 터트리는 앞에서 한승관은 고개를 떨궜고, 문광국은 아예 후련한 얼굴이었다.
“그깟 놈 빼고 우리 애들로 하면 됩니다.”
“그런 소리 말아. 그랬다가 스코어가 엉망이면 또 정지우 그놈 써야 한다고 난리, 난리가 날 텐데. 어후!”
문광국의 의견에 조동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놈은 다 몰라도 그놈은 불렀어야 하는데……. 가만있자, 그놈 소속팀이 어디지?”
“유니온 시티입니다.”
“이름하고는!”
조동익은 상체를 돌려 책상 위에 놓인 명함철을 가져왔다.
“그쪽에 광고 비용을 지불하는 거로 하자.”
“예?”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라도 해서 일단 불러들여야지. 잘못하면 협회가 선수 일정조차 제대로 모르고 평가전 잡았다고 욕먹게 생겼는데 그럼 이걸 그냥 둬?”
조동익이 명함철을 넘기며 번호를 찾을 때였다.
“부회장님, 그러지 마시고 이번 경기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문광국이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봐! 브라질이야! 브라질! 공연히 나섰다가 자네만 문제 돼.”
“어차피 제대로 된 해외파는 한 명도 안 부른 거 아닙니까? 그럴 바에야 있는 인원 가지고 붙어 보시죠. 크게 지면 역시 해외파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거고, 좋은 경기를 하면 그만큼 좋은 소리를 들을 거 아닙니까?”
“후우.”
조동익은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문 감독.”
“예, 부회장님.”
“이번 평가전을 하는 이유를 좀 잘 생각해 봐. 우리 애들을 제대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야. 아!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대표 선수는 이 선수들밖에 없구나! 실력 차이가 이렇게 났구나! 그런 거!”
조동익은 명함철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특정 선수만 싸고돈다는 소리가 또 나오면 당장 외국인 감독 들여오라고 난리가 날 텐데! 그럼 대한민국 축구를 외국인이 좌지우지하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되면 박용근이나 김문호가 문제가 아니야.”
말을 마친 조동익이 원하던 명함을 찾은 것처럼 검지로 이름과 번호를 확인했다.
***
이틀 만에 쥬피터 회장의 사무실을 방문한 마틴은 오늘만큼은 결판을 내야겠다고 여겼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자 평소와 다르게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오게, 마틴.”
쥬피터가 2명의 남자들과 자리에서 일어나 마틴을 맞았다. 유니온 시티 축구팀의 이사들로, 쥬피터의 좌우 심복쯤 되는 인물들이었다.
“반갑네.”
“오랜만이군.”
마틴은 그들과 악수를 나누며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고, 홍차를 부탁한 뒤에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앞으로도 유니온 시티를 자네에게 부탁할까 해서라네.”
쥬피터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다는 전제하에 자네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용하지.”
“고맙습니다.”
뜻밖에도 쥬피터는 마틴이 제시한 세 가지를 모두 받아들였다.
“Ji와의 계약은 그의 에이전시를 통해서 하면 되겠나?”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이루어졌는데?
마틴은 ‘이 늙은이를 상대하다가 보니 의심만 늘었구나.’ 싶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말일세. 나와 위원회가 자네의 뜻을 모두 들어주었으니 자네도 하나쯤은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럼 그렇지.
쥬피터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마틴은 그의 부탁이 무엇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Ji를 차출하고 싶어 하는 모양인데 말일세.”
설마, 이 늙은이가 그걸 양보하자고?
“나는 Ji가 국가대표에 선발되는 것이 우리 유니온 시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일세. 그래서 이번 차출에 협조하면 어떨까 싶은데?”
“흠.”
마틴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FA컵과 리그 승격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작 일주일 다녀오는 게 아닌가?”
“남은 승점이 1점이라고 해도 아직 승격이 확정된 건 아닙니다. 게다가 FA컵 우승까지 기대하던 회장님이 이렇게 나오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Ji가 국가대표가 된다면 우리에게 광고를 주겠다는 한국의 기업이 있는 모양이야. 구단을 운영하면서 그런 점을 외면할 수는 없지.”
이런 거였구나.
마틴은 분명하게 쥬피터의 뜻을 알아들었다.
“한국에서 Ji에 대한 평가가 그 정도로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분명히 후원할 기업이 있을 거라는 답을 들은 겁니까?”
“믿을 만한 곳에서 연락이 있었지.”
돈 냄새를 맡는 능력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사람이 쥬피터였다.
“Ji가 거절하면 구단은 강제로 그를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네에게 부탁하지 않나? 그리고 구단이 조건을 모두 수용했으니 적어도 자네를 통한 이런 부탁쯤은 협조해 줘야지. 무엇보다 구단의 수익과 직결되는 문제라면 말이지.”
“일단 말은 해 보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겠네. 그리고 계약과 관련된 세부 내용은 우리 변호사를 통해서 보내 주도록 하지.”
쥬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팀을 잘 이끌어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두 사람과 악수를 나눈 마틴은 곧바로 쥬피터의 사무실을 나섰다.
***
레드 블레이트에 들러 운동을 마친 정지우는 점심을 먹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마틴이 앞서서 나서고, 유정호가 뒤에서 일을 보아준다.
계약이 제대로 성사된다면, 지금처럼 꾸준한 실력을 보인다면, 박용근 축구 교실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이 모처럼 정지우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버스에서 내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3명이나 정지우를 알아봐 주었다.
웃는 얼굴로 병원에 들어선 정지우는 먼저 클레이의 병실을 찾았다.
“어서 와, Ji.”
깁스를 두툼하게 한 다리를 받침대에 올린 그가 손을 들며 인사했다. 며칠이나 면도를 안 했는지 완전히 노란 털 원숭이의 형상이었다.
“기분은?”
“좋아.”
정지우는 클레이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볼일 보는 게 정말 불편해.”
그때, 녀석이 엉뚱한 소리를 지껄여서 둘이 웃고 말았다.
“밤벤트리와의 경기는 봤어.”
“네가 없으니까 그렇게 졌어.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
클레이가 허튼소리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쉬워. 이제 겨우 수비수가 어떤 움직임을 가져야 하는지, 또 골키퍼와의 동선을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 알게 되었는데…….”
“10개월이면 복귀한다던데?”
“응.”
클레이가 힐끔 깁스를 바라보며 답을 했다.
“그런데 Ji가 알려 줬던 건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몸이 반응하는 거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레믹을 막을 때나 그날 경기에서 라우쓰 선수들을 막아섰을 때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거 같았거든.”
클레이는 정지우가 공을 보고 반응할 때와 거의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감각을 제대로 몸에 익혔으면 분명 실력이 늘었을 텐데, 그럴 기회를 놓친 것이 가장 아쉬워. 그날은 유독 몸이 앞서가더라고. 그 공을 걷어 내면 분명 한 골을 더 넣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고.”
클레이가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멜슨보다는 좀 낫지?”
“질문이 너무 공격적이지 않냐?”
“그런가? 그럼 질문을 바꾸지. 멜슨이 나보다 좀 못하지?”
정지우가 웃는 것을 본 클레이가 비슷하게 웃었다.
“꼬마 때부터 아버지와 축구를 했었어. 둘이서 유니온 시티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러 다니고, 시간 날 때면 함께 공을 차기도 했고. 축구를 하면서 제일 행복했거든.”
클레이는 노란 털 원숭이처럼 북슬북슬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어냈다.
“Ji에게 축구는 어떤 의미야?”
“뭐?”
그런데 녀석이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바로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Ji를 보면서 부러웠거든. Ji가 가진 재능은 노력으로 따라갈 수가 없는 거 같아서, 그런 선수들에게 축구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
정지우는 어쩐지 클레이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