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39화 (39/262)

제5장.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3)

선공을 시작한 밤벤트리의 진영에서 공이 돌았다.

레믹과 브라운이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물러나는 동안, 라파엘은 평소처럼 수비 라인을 위로 끌어 올렸다.

좁은 공간에 8명이 두 줄로 서서 밤벤트리 선수들을 압박하는 형태였다.

챔피언십 우승 후보 유니온 시티와 14위 밤벤트리의 실력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라인을 올리고 데이빗과 포그이를 중심으로 압박을 가하자 밤벤트리 선수들이 급하게 공을 돌리며 압박을 벗어나려 애썼다.

분위기는 좋았다.

투욱!

그리고 상대 팀의 패스를 가로챈 포그이가 앞쪽으로 공을 뿌려 주며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레믹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달려들어 슈팅을 날렸으나 아쉽게도 공은 골포스트를 살짝 벗어나고 말았다.

“우!”

레믹과 관중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아쉬움을 토해 냈고, 밤벤트리 선수들과 원정 응원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반 10분까지 가장 멋진 장면이었다.

밤벤트리의 골키퍼가 길게 차 준 공을 카알이 뛰어올라 따냈다.

왼편에 있던 맥슨이 공을 받아서 치고 달리다가 중앙에 있던 데이빗에게 넘겨주었고, 데이빗은 다시 반대편 브라운을 향해 공을 차 주었다.

“우- 와아!”

함성이 요란하게 울리는가 싶을 때 브라운은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오던 꼼빠니에게 공을 넘겨주고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밤벤트리는 수비를 악착같이 세우고 허투루 나서지 않았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져서 승점 3점을 주지는 않겠다는 전략처럼 보였다.

센터링을 날려야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 꼼빠니는 공을 다시 뒤로 돌렸다.

멜스가 받아서 라파엘에게 공을 넘겼고, 라파엘은 데이빗에게 차 주었다.

여기까지는 정말 좋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촘촘하게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 서 있는 밤벤트리의 수비진을 뚫을 방법이 없었다.

이후로 몇 번이나 수비수 틈으로 공을 찔러 넣거나 높다랗게 띄워 줘 봤지만, 공은 번번이 밤벤트리 선수들이 걷어 냈다.

전반 10분 이후로 레믹은 밤벤트리의 선수가 밀착 마크를 하다시피 따라다니고 있어서 제대로 움직임을 가져가지 못했다.

공격은 잘되고 있는데 결실이 없는 축구.

지금 유니온 시티의 경기가 꼭 그랬다.

그런데도 유니온 시티가 공을 잡고 공격할 때마다 홈 관중들의 응원은 열기를 더해 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무승부만 해도 13년 만에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할 자격을 얻는다는 기쁨이 레드 블레이트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우와- 아!”

맥슨이 왼편에서 공을 날려 주는 순간,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가장 먼저 레믹이 뛰어올랐고, 다음으로 데이빗과 카알이 동시에 솟구쳤는데 공은 아슬아슬하게 넘어가 라인 밖으로 굴러갔다.

전반 30분이 되도록 계속해서 비슷한 양상이었다.

정지우는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라인을 있는 대로 올린 유니온 시티는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공격을 퍼붓는 거고, 밤벤트리는 얻어맞고 있는 모습이어도 단단하게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퍼엉!

밤벤트리의 골키퍼가 또다시 기다랗게 공을 차 주었다.

미드필더를 거쳐 앞으로 가려고 해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워낙 빽빽하게 달려들고 있어서 차라리 길게 차 주는 것이 낫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투욱!

그런데 2명이 뛰어올라 헤딩을 하면서 상황이 확 뒤집혔다.

카알이 머리로 떨군 공을 밤벤트리 선수가 받았다. 그리고 그는 받는 즉시 라파엘과 멜스 사이를 통해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공을 보내 주었다.

“우와- 아!”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달려간 밤벤트리의 9번 선수에게 라파엘과 멜스가 뒤늦게 달려들었다.

퍼엉!

그러나 슈팅이 반 박자 빨랐다.

얀센이 급하게 다리를 뻗어 냈고,

틱!

그의 다리에 걸린 공이 앞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슈팅을 날리고 뛰어드는 밤벤트리의 9번 선수 정면으로 공이 날아가고 만 거다.

머리를 가져다 댈 틈도 없어서 밤벤트리 9번 선수는 가슴으로 공을 밀었다.

공은 정말이지 떼구루루 굴러서 골대로 향했다.

슬라이딩을 한 라파엘이 미끄러지는 틈에 걷어 내려 애썼지만, 공은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예에에에!”

관중석 한쪽에 자리한 밤벤트리 원정 응원단이 펄쩍펄쩍 뛰며 함성을 질러 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전반 내내 얻어맞던 밤벤트리가 40분 근처에 날린 유효 슈팅 하나를 골로 연결해서 스코어를 0 대 1로 만든 것은.

얀센도, 라파엘도, 멜스도 맥이 빠진 얼굴로 밤벤트리 선수들의 세레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반 추가 시간은 2분이 주어졌다.

“우와- 아!”

레믹이 라인을 따라 들어가다 페널티 에어리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패스를 주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레믹은 공을 잡은 채로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을 기웃거렸다. 어차피 패스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까 혼자서 해결하겠다는 느낌처럼 보였다.

“우!”

밤벤트리의 수비수 2명이 달려들어 레믹의 공을 걷어 냈다.

마틴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보았다.

한 골을 먹고 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갑자기 흐트러지는 느낌이었다.

조직력이 급격하게 무너질 때 리더가 필요하다.

마틴의 시선에 공을 따라 뛰는 데이빗이 들어왔다.

늘 프리미어리그 팀에서의 오퍼를 받기 위해 애쓰던 그는 아스널전 이후에 팀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실점한 이후로 데이빗은 중심을 전혀 잡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를 계속 맡게 된다면 누굴 남기고, 누굴 다른 팀으로 보내야 할까?

마틴은 새로운 시선으로 선수들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팀을 맡게 된다면 당장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상대로 승점을 노려야 하는 관계가 된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어 전반 종료를 알리자 마틴은 그대로 일어나 터널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레믹이 뻔뻔스러운 얼굴로 ‘내게 공을 줘!’라고 떠드는 것을 보며 다 같이 웃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후반에는 3골쯤 넣어야지!”

“패스 3개만 달라니까.”

카알이 던진 농담을 레믹이 멋지게 받아넘겨서 또다시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한 골을 먹고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막아 보겠다는 노력처럼 보였다.

물을 마시고, 잠시 쉬고 났을 때였다.

마틴이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후반에도 압박을 늦추지 마.”

마틴은 선수들을 쭉 둘러보았다.

“공격할 때 반드시 슈팅으로 마무리해서 또 역습에 당하지 않도록 하고, 특히 라파엘과 카알은 밤벤트리 9번과 10번 놓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마틴의 지시를 들을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한 골만 넣고 경기 끝내면 프리미어리그 승격이다. 데이빗, 혹시 동점골이 터진다면 라인을 내리고 그대로 경기를 마무리해. 밤벤트리도 무리해서 달려들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러죠.”

마틴이 지시를 내렸고, 데이빗이 답을 했다.

전반 시작 전보다는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홈 관중들의 응원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자! 후반에 반드시 한 골을 넣어서 준비해 놓은 샴페인을 터트리자!”

데이빗이 분위기를 잡기 위해 손뼉을 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정지우는 레믹을 힐끔 보았다.

이미 오퍼를 받았다는 놈이다. 그런데도 욕심이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조건을 얻고 싶은 건지, 아니면 오늘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후반을 앞두고 선수들 사이에 묘한 감정이 떠도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14위 밤벤트리와의 대결이다.

한 골만 넣으면 승격, 그 뒤에 유니온 시티는 변화를 맞아야 한다.

딩동. 딩동. 딩동.

후반을 알리는 신호에 따라 선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반도 진영만 바꾸었지 양상은 비슷했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유니온 시티의 공격을 밤벤트리는 끈질기게 막아 내며 경기를 끌어갔다.

심지어 후반에도 기습적인 공격을 통해 두 차례나 날카로운 슈팅을 날렸고, 그중 하나는 얀센이 겨우 막아 낼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홈 관중들의 다급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후반을 5분 남겨 둔 상황에서 또다시 밤벤트리의 패스가 라인을 있는 대로 올린 카알과 멜스의 사이를 뚫고 페널티 에어리어로 향했다.

솔직히 교과서 같은 공격이었다.

수비 라인 뒤에 붙다시피 서 있던 밤벤트리의 9번이 패스와 동시에 골대를 향해 달려 나갔고, 편안하고 가볍게 슈팅을 날렸다.

철렁!

“이예에에에에!”

웃옷을 벗어서 빙빙 돌리는 남자,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는 남자, 골을 넣은 9번 선수를 향해 연속으로 양손 엄지를 치켜세우는 여자.

밤벤트리의 원정 응원단은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급했을까?

탄탄하게 막아서다가 역습을 노렸다면 이번 경기에서 승점 1점을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마틴은 공격수를 3명이나 집어넣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썼다.

삐이익! 삐익! 삐이이익!

그러나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이예에에에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원정 응원단의 함성이 레드 블레이트에 가득했다.

경기를 뛴 선수들이 타월을 허리에 두르고 샤워실을 나오고서야 정지우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몸을 씻은 정지우가 옷을 갈아입고 일어섰을 때였다.

스크립터가 불쑥 고개를 디밀었다.

“Ji.”

마틴이 찾는다는 의미였다. 눈짓으로 답을 한 정지우는 곧바로 라커룸을 나섰다.

똑똑똑.

“들어와.”

안으로 들어간 정지우에게 마틴은 책상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커피? 홍차?”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틴이 책상 건너편에 앉았다.

“오늘은 엉망인 경기였어.”

감독이 저렇게 말을 해 버리면 선수는 할 말이 없다.

“그건 그렇고, 이런 공문이 날아왔는데 말이지.”

마틴이 책상 위에 놓인 누런 서류철을 넘기고 그 안에 담긴 A4 용지를 들어 정지우에게 건네주었다.

잘못 본 건가?

위에서부터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던 정지우는 마지막에 찍힌 협회장의 이름과 직인을 확인하고서야 시선을 들었다.

“한국의 국가대표팀 감독이 바뀌었더군. 그래서 그에 맞춰 새로운 선수를 선발하는 모양인데 거기에 자네가 포함된 거로 보이네.”

이 정도라면 임의 탈퇴까지 철회하겠다는 뜻이겠지?

아무렴 협회가 그 정도 생각 없이 정지우를 부르지는 않았을 거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거부해도 됩니까?”

“A-매치 데이가 아니어서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지. 대신 그렇게 하면 자네에 대한 평판이 엉망이 될 텐데, 그래도 괜찮겠나?”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공문을 마틴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도 중요한 게임이 많아서 자네가 거부하겠다면 오히려 고마운 입장이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다. 그리고 미스터 유에게 이 내용을 알려 두는 게 좋아.”

“그렇게 하죠.”

공문을 서류철에 넣은 마틴이 깍지 낀 손을 책상에 얹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정규 리그는 6게임 남았고, FA컵은 4게임이다. 자네의 몸값이 올라갈수록 모두가 행복한 그림이 나오는 것은 알겠지? 그래서 말인데…….”

“FA컵을 노리는 겁니까?”

마틴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주로 나온 질문은 FA컵에 자네를 몇 게임이나 기용하느냐더군. 심지어 승점 1점 남은 프리미어리그 승격은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나왔다.”

“나는 정해진 경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래. 그랬지.”

마틴은 답을 하고서 정지우의 얼굴을 살폈다.

“컨디션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좋아. 저녁에 쥬퍼터 회장을 만날 걸세. 오늘 승점을 얻지 못한 것이 불편한 모양이던데, 특별한 조건이 나온다면 따로 알려 주도록 하지.”

마틴은 대화가 끝난 것을 반드시 동작으로 알려 준다.

그가 일어서는 것을 본 정지우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