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38화 (38/262)

제5장.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2)

감정은 입을 통하지 않아도 눈빛이나 표정으로 충분히 전달된다.

집으로 돌아온 유정호는 ‘이 자식! 너를 평생 내 손아귀에 쥐고 오십이 넘도록 골문을 지키게 해 주마!’라는 말을 퍼부어 댔다. 물론 그 말에 담긴 유정호의 속을 알 수 있어서 정지우는 딱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잘해, 인마. 나도 아르바이트 다 때려치우고 네 일에 집중할게. 이번 기회, 놓치지 말자.”

유정호의 각오에 무언가 엉뚱한 것이 숨어 있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이후로 화제가 바뀌어서 알 길은 없었다.

다음 날, 유정호는 런던으로 돌아갔고, 정지우는 느긋하게 레드 블레이트로 향했다.

링거에 비타민을 넣는다고 하더니 감기 기운은 확실하게 잡혔는데 대신 좀 지친 느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앞둔 탓인지 레드 블레이트로 향하는 거리에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부쩍 늘었다.

커다란 가방을 다리 사이에 끼운 남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유니온 시티의 엠블럼이 찍힌 목도리를 펼쳐 보였다.

“Hey! Mr. AmaJing!”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목도리를 팔던 남자 역시 정지우를 알아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Hi!”

정지우가 손을 들어 답례를 한 다음이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점퍼를 벗고 상체를 돌려 등을 보여 주었다. 등 번호 13번, ‘Jiwoo Jung’이란 정지우의 영문 이름이 찍힌 유니폼이었다.

“고마워요!”

“Ji! 이걸 가져가!”

유니폼을 보여 준 남자가 목도리를 정지우에게 내밀었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프리미어리그로 우리 데려갈 거지!”

“최선을 다할게요.”

경기가 없는 날이라 가능한 대화였다.

정지우는 손을 들어 주고 선수 통로를 향해 걸었다.

매치데이 매거진, 유니온 시티 매거진과 햄버거 따위를 파는 부스들도 많이 늘었고, 경기가 없는 날인데도 영업을 하는 곳들이 절반쯤 되었다.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다면 저들 또한 좀 더 많은 수입이 생길 거다. 제대로 된 중계는 더 많은 관중을 불러 모으고, 입장료, 부스 임대료, 유니폼과 기념품 판매는 유니온 시티 축구팀의 재정을 단단하게 해 준다.

라커룸에 들어간 정지우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2층에 있는 근력 훈련장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혼자서 여유롭게 오전을 보낼 곳이었다.

“Ji!”

그런데 기구 운동을 하고 있던 세 녀석이 정지우를 향해 손을 들거나 눈짓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프로 선수들이 체력 훈련하는 것이 흠은 아니니까.

“좋은 아침이야.”

“그렇지.”

인사를 나눈 정지우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꼼빠니, 라파엘, 그리고 미첨 역시 나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

문광국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저는 2급 지도자 자격증밖에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 준다니까.”

한승관이 더는 말도 꺼내지 말란 투로 문광국의 말을 잘랐다.

“선배님,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이용해 제가 아침에 뭘 먹었는지도 알 수 있는 세상입니다. 중고등학교 지도 자격증으로 국가대표를 맡으면 언제고 문제가 생깁니다.”

“허어! 거참! 결과가 좋으면 아무도 뭐라고 안 그래. 그리고 협회 일정을 조절해서 자격증을 만들어 주겠다는데 왜 자꾸 그걸 고민해?”

한승관의 말에도 문광국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뭐? 또 왜? 막말로 진용이를 살려 줄 사람이 감독이 되어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 또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너랑 내가 한국 축구를 위해서 얼마나 애썼냐?”

문광국의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한승관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며 열변을 토해 냈다.

“야! 투혼회의 정신 잊었어? 한국 축구는 우리가 살려야 하는 거야! 이진용이가 슬럼프고, 대표팀 성적이 엉망인데 이걸 누가 맡아야 하겠냐?”

“흠.”

탁자에 시선을 내린 채로 문광국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생각해 봐라. 유럽 명문에서도 노리던 너는 국내 축구 발전을 위해 이렇게 헌신했는데, 돈에 팔려 고작 영국 2부 리그를 빌빌거리는 놈을 진용이 대신 써야겠냐? 그걸 원해?”

한승관은 막힘이 없었다.

“그렇게 저만 살겠다고 대한민국 축구를 외면한 놈이 실력이 좀 된다고 다시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게 말이나 되냐! 어?”

“그놈이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뭐?”

날카롭게 빛나는 문광국의 눈빛을 보며 한승관은 아차 싶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김문호 감독이랑 짝짜꿍이 돼서 박근용을 앞세우려고 난리도 아니다.”

“그놈 임의 탈퇴로 처리돼서 우리나라에 와 봐야 선수 생활 못하지 않습니까?”

“여론이 어디 그러냐? 지금 인터넷만 좀 쳐 봐라. 그놈 그거, 인터넷상에서는 아예 야신 대우다. 그동안 고생한 우리는 그런 인재도 못 알아본 얼치기 중의 상얼치기고. 그러니 협회 차원에서 놈의 징계를 풀려고 하는 거지.”

한승관은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하기 싫으면 말아. 나도 그놈 잘되는 꼴 보는 건 싫지만, 쯧! 뭐 어쩌겠냐? 네가 안 맡겠다면 김문호 감독에게 맡겨야지. 그럼 그 양반이 알아서 진용이 내리고 그놈 골키퍼로 세우겠지.”

등받이 위로 팔을 걸친 한승관은 아예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힐끔 문광국을 살폈다.

“잘 생각해라. 그놈이 활약하고, 박용근이 이름값 날리면 수년 내에 협회에 그놈들 들어선다. 우리가 피땀 흘려 이뤄 낸 이 협회를 그놈들이 날름 처먹는단 말이다. 제 놈들 따르는 선수들 키워 가면서. 그때 되면 누가 우리 대접이나 해 줄 것 같냐?”

“브라질하고 유고라고 하셨습니까?”

“어?”

한승관이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래! 브라질전에 그놈 세우고 수비 적당하게 꾸며. 그다음은 유고전에 진용이 내세우고. 확 표시 나잖냐.”

“브라질과의 실력 차를 계산하면 거꾸로 돼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승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차라리 실점이 엄청나면 정지우 그놈 단단히 씹힐 거다. 그리고 유고전에서 이진용이 기본만 해도 구관이 명관이니 이런 말 나오게 돼 있다. 기자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가 감독을 맡고 나서 대표팀 평가전으로 꾸미신다는 거죠?”

“그렇지!”

“선수 선발은 제게 다 맡기실 거구요?”

“그걸 말이라고 해! 유고전은 1.5군은 아니어도 1.2군 정도 되게 일정을 짤 거다. 입국한 다음 날 바로 뛰게 하면 되니까.”

문광국의 구미에 맞춘 답이 척척 나왔다.

***

축구에서 감독과 선수의 역할은 분명 구분되는 것이지만, 각각 ‘이거다.’라고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마틴은 밤벤트리와의 40라운드 홈경기에 골키퍼 선발로 얀센을 내세웠다.

상대에 맞춰 포메이션을 결정하고 그에 맞는 선수를 기용하는 것은 감독의 몫, 그리고 그 자리에서 최선의 실력을 다하며 동료들과 승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선수의 임무이다.

40라운드를 맞이한 레드 블레이트는 축제 분위기였다.

이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유니온 시티는 챔피언십 2위를 확정 지으며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확보하고, 남은 성적에 따라 챔피언십 우승이 가능하다.

레드 블레이트는 경기 시작 2시간 전부터 ‘파이널 카운트다운’이란 곡을 요란스럽게 틀어 댔다.

레드 블레이트에 몰려든 관중들은 핫도그나 햄버거를 파는 가게 앞에 줄을 서거나 혹은 목도리, 기념품 등을 구입했고, 양손 검지로 홈팀 응원단들을 가리키며 ‘프리미어로 가자!’라는 구호를 외쳐 댔다.

라커룸에 앉은 선수들 중앙에 마틴이 서 있었다.

밤벤트리는 리그 성적 14위에 올라 있는 딱 챔피언십에 어울리는 수준의 팀이었다.

평소보다 많은 방송국 취재 카메라와 기자들이 몰려 있었고, 얼굴을 익히 아는 스카우터들도 관중석에 자리한 상황이었다.

“명심해! 오늘 경기를 비겨도 우리는 프리미어리그로 올라간다. 하지만 엉성한 경기를 보이게 된다면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게 될 거다.”

마틴이 말한 많은 이들이 홈 관중보다는 취재진과 스카우터들을 의미한다는 건 모두 알아들었다.

리그 승격이 확정되는 순간 방송 카메라들이 그라운드에 있는 선수들을 향해 달려들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모습이 적어도 며칠은 계속 뉴스에 오르내릴 거고, 골을 넣거나 멋진 활약을 펼치면 마치 그 장면 하나 덕분에 승격된 것처럼 칭송도 받게 된다.

“흥분하지 마. 침착하게 우리 경기를 펼친다면, 밤벤트리는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예에!”

누군가 마틴의 말에 승리에 대한 확신처럼 고함을 질렀고, 선수들이 박수를 치며 그에 동조했다.

정지우는 장갑을 어루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기 기운은 확실하게 떨어졌지만, 컨디션이 최고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환호성, 아직도 틀고 있는 음악 소리, 그리고 발로 바닥을 찍는 쿵쿵 소리가 문밖에서 듣는 클럽 음악처럼 들렸다.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그런데 레믹은 말할 것도 없고, 선수들 모두 중심점을 잃고 활약하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힌 눈빛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데이빗의 눈빛에도 주장으로 팀을 이끌어 프리미어리그로 간다는 자부심이 잔뜩 담겨 있으니, 사실 말 다한 상황이었다.

이 경기를 제외하고도 6게임이나 남은 데다, 승점 1점을 남겨서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다. 거기에 현재 리그 14위의 팀을 상대하는 경기.

그러나 정지우는 오늘 경기가 쉽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레믹(10) 브라운(26)

맥슨(17) 데이빗(7) 포그이(8) 꼼빠니(15)

스웰던(3) 라파엘(5) 카알(6) 멜스(23)

얀센(1)

유니온 시티는 역시나 전형적인 4-4-2 포메이션을 선택했다.

골키퍼 얀센, 그 앞으로 라파엘, 카알을 세웠고, 왼쪽에 성격 거친 스웰던, 오른쪽을 멜스가 맡았다.

다음으로 주장 데이빗과 포그이가 중앙을 맡고, 왼편에 17번 맥슨, 오른편을 꼼빠니가 섰다.

공격은 왼편이 레믹, 오른편이 브라운이다.

뜻밖에도 마틴은 주전 무둔바를 대신해 23번 멜스를 내세웠는데, 이런 건 컨디션이나 후반 교체를 염두에 둔 감독의 재량이라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딩동. 딩동. 딩동.

선수들을 호출하는 신호가 울렸다.

가슴에 성호를 그은 라파엘의 동작을 끝으로 선수들이 일어나 라커룸을 빠져나갔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한순간에 달려든 함성을 맞이하며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밤벤트리 선수들과 함께 터널에 섰다.

선발 선수들이 앞서 나가고 정지우와 브라운, 그 외에 서브 선수들이 뒤를 따라 벤치로 움직였다.

날씨는 화창했다.

영국의 유니온 시티에서 오후 3시에 열리는 경기라서 지금 서울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일 거다.

벤치에 앉은 정지우는 운동복 점퍼를 입은 채로 무릎에 두꺼운 타월을 걸쳤다. 몸이 식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꽉 들어찬 관중들이 목청껏 함성을 지르며 유니온 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기대하고 있었다.

FA컵 16강전의 승부가 홈 관중에게 더 큰 기대를 심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밤벤트리의 선공이 결정되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움직여 심판진과 순서대로 손을 맞잡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많아진 중계진과 빈자리 없이 채워진 응원석이 레드 블레이트를 한껏 들뜨게 하고 있었다.

‘힘들겠는데?’

정지우는 밤벤트리 선수들의 표정을 살피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 경기에서 승격이 확정되면 밤벤트리는 뉴스에 나올 때마다 실패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반대로 밤벤트리가 승리한다면 전혀 다른 그림이 뉴스를 타게 될 거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눈에 독기가 잔뜩 올라 있었다.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의 좌우로 나뉘어 섰고,

삐이이익!

“우와아-!”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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