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레드와 Ji가 사이좋게 지냈지. (1)
거실로 들어선 유정호가 고개를 기울이며 정지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아팠냐?”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링거 맞고 오는 길이야.”
“쯧! 비 맞아서 그랬나 보다. 지금은 좀 어때?”
“살 것 같어.”
싱크대를 힐끔 들여다본 유정호가 탁자에 상자를 올려놓고 고갯짓을 했다. 케이크가 들어 있다면 꼭 맞을 크기의 누런색 종이 상자였는데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얼른 와. 이거 함께 먹으려고 런던에서 달려왔다.”
그가 종이 상자를 열어서 일회용 접시에 랩으로 감싼 음식들을 꺼냈다.
“뭐야?”
“런던에게 교민 축제가 있었잖냐. 보는 순간, 네 생각이 나서 거기서 사 왔어.”
유정호가 랩을 뜯는 동안, 정지우는 젓가락과 물 컵, 그리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탁자에 앉았다.
“봐봐. 죽이지?”
잡채, 수육, 만두, 떡.
음식이 주는 반가움에 유정호의 마음이 고마워서 정지우는 손이 나가지 않았다.
“빨리 먹자.”
“알았어.”
그렇다고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작은 아파트의 소파와 주방 사이에 놓인 둥그런 식탁에 앉아 둘이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넣었다.
잡채는 불었고, 수육과 만두는 식어서 차가웠다.
프라이팬에 잠시 데워서 먹었으면 더 좋았을지 모르는데, 정지우나 유정호 모두 그 정도로 꼼꼼한 성격은 아닌 거다.
일회용 접시에 담긴 음식을 다 먹는 데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다시 유정호가 일회용 접시를 치우는 동안, 정지우는 믹스 커피 한 잔과 뜨거운 물을 만들어 식탁으로 움직였다.
“오늘 자고 갈 거다.”
“그래.”
둘이서 뜨거운 물과 커피를 마셨다.
그동안 정지우는 마틴 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았다.
“젠장.”
유정호의 첫 번째 대꾸였다.
“형식상 변호사가 있기는 한데 자문을 받기도 그렇고, 이런 계약을 알리기는 뭐해서 입을 다물었더니……. 솔직히 선수라고 너 말고는 제대로 남은 선수도 없고.”
솔직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형은 그럼 생활 어떻게 해?”
“스포츠 의류 업체 일도 좀 봐주고, 이벤트 업체 일에 좀 끼어들기도 하고 그렇게 살지. 솔직히 네가 선덜랜드와 계약하는 것도 나로서는 좀 힘들기는 할 거다.”
유정호가 입맛을 다셨다.
“마틴 감독 말이 맞아. 네가 지금 보이는 활약이면 프리미어리그 중위권 팀에서도 입맛이 당기긴 할 거거든. 대신 세 게임 가지고 목을 매고 달려들기는 어려울 테니까 남은 경기에서 꾸준한 실력을 보여 줄 필요는 있지.”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게임에서 엉성하게 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뻗쳤던 오퍼들이 날아갈 거다. 거기에 한국의 축구 교실까지라는 엉뚱한 조건을 내세운다면 쥬피터 회장처럼 욕심 많은 사람이나 흥미를 가질 그런 선수로 인식될 게 뻔했다.
“그러지 말고, 마틴 감독에게 부탁해서 매니지먼트 회사 하나 알아봐 달라고 해.”
유정호가 잔을 만지작거리며 결심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중요한 시기다. 매니지먼트의 능력에 따라 상위 팀과 제대로 된 계약을 할 수도 있고, 잘못하면 하위 팀에 꽁꽁 묶이는 계약을 할 수도 있는 게 이 바닥이잖아.”
정지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나 영국에 데려오려고 형이 빌딩 탔었다며?”
정지우의 영국 진출을 위해 유정호는 명함과 정지우의 기록을 들고 매니지먼트 회사와 구단 스카우터의 사무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고 했었다.
그냥 따라다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선수 생활 접게 된다는 유정호의 조언과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축구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따라다니기만 했었다.
정지우를 힐끔 본 유정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선수 생활 접는 게 어쩐지 내 처지 같았었다. 그래서 그랬던 건데 그거 가지고 너 발목 잡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이쪽에 발 넓혀 놓으면 다른 선수들도 생기겠지 하는 욕심도 있었으니까.”
피식.
“웃지 마, 인마! 나는 괜찮으니까 마틴 감독하고 잘 의논해 봐서 정말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 구해.”
“형, 결혼도 해야 한다면서?”
“미친놈. 여자도 없는데 누구랑 하냐?”
“형 꿈이 영국 여자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유정호가 그런 말을 했던 모습이 쑥스럽다는 것처럼 웃었다.
“마틴 감독이 자기랑 일하는 동안 형도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가 될 수 있을 거래. 그러니까 우리 마틴 감독하고 손잡자.”
“그랬다가 이번엔 마틴에게 당하는 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왜 자꾸 웃어, 인마!”
“3년만 하자. 최대 기간을 그걸로 정하면 아무리 엉망인 계약을 하더라도 3년 뒤면 끝나겠지, 뭐. 그리고 속아서 주급 못 받으면 형이 내 계약금에서 받는 수당으로 둘이 사는 거고.”
“야! 네 인생은? 얼래? 왜 자꾸 웃어?”
“나 지금 정말 행복해, 형. 그러니까 우리 마틴 감독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 나 그러고 싶어.”
유리잔의 따듯한 느낌이 좋아서 정지우는 잔을 어루만졌다.
“한국에 계신 감독님하고 형 생각하면 정말 세계적인 팀에 갈 정도로 뛰어난 골키퍼가 돼 보고 싶어.”
“넌 그럴 자격이 있지.”
“감독님하고 형 없었으면 어차피 여기까지도 못 오고 그만뒀을 텐데, 뭘. 그나저나 형?”
“왜? 뭐?”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신 정지우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 거야?”
“뭐?”
“그게… 솔직히 내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지금처럼 먹히는 실력은 아닐 거 아냐?”
유정호는 먼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리그의 수준이 다르니까 실점이 있기는 하겠지. 그런데 최근 몇 경기만큼만 반응하면 그래도 세계 수준 아니겠냐?”
“내가 정말 그 정도였나?”
“혹시 잘난 척이냐?”
정지우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고, 유정호가 킬킬거리면서 따라 웃었다.
“지우야.”
실컷 웃고 난 다음이었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형, 우리 함께 고생한 게 6년이야. 어쩌면 이번에 정말 축구 접고 한국으로 갈 뻔했던 건데 형이 이렇게 잡아 줬잖아.”
유정호가 진지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나 정말 감독님하고 형 말고는 아는 사람도 없어. 그러니까 우리 그냥 지금처럼 살자. 내가 돈이 많아져도, 세계적인 선수가 돼도, 좋아해 주는 사람 없이 사는 건 좀 무서워.”
유정호는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그렇게 되면 네 주변에 사람이 바글바글할 거다.”
“그럴 때일수록 형이 옆에 있어 줘야지. 예쁜 영국 형수님하고.”
“뭐? 영국 형수?”
능글맞은 얼굴로 감동을 표현한 유정호 때문에 둘이서 또 웃고 말았다.
“다른 소리 말고 내일 마틴 감독이나 만나 주라. 그렇잖아도 형한테 전화하려고 했었거든.”
“그래. 그래, 보자. 하여간 나중에 후회하니 뭐하니 하면 가만 안 둘 거다.”
좋았다.
런던에서 이렇게 음식 접시를 들고 나타나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와 함께 축구라는 세상을 헤쳐 나간다는 것이.
그릇들을 대강 치운 정지우는 마틴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유정호와의 약속을 챙겼다.
[미스터 유를 만나라는 것은 자네의 의사도 그와 같다는 뜻인가?]
“나는 사실 바뀐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감독님과 8게임을 함께 헤쳐 나가기로 했었으니까요. 오히려 이렇게 된 점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좋아. 그렇다면 내일 오후 1시경이 어떤지 물어봐 주겠나? 장소는 지난번에 보았던 그곳으로 하고.]
정지우는 ‘잠시만요.’ 한 다음, 유정호에게 시간과 장소를 물어보았다.
“괜찮답니다. 그럼 그곳으로 나가라고 하겠습니다.”
[Ji.]
“예.”
마틴이 나직한 음성으로 불렀고, 정지우가 비슷한 느낌으로 답을 했다.
[이번에 일이 진행되면 이젠 되돌리기가 어려워. 신중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좋아.]
“감독님의 팀을 맡기겠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역할을 수행할 겁니다. 나머지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 감독님과 정호 형이 알아서 해 줄 일이라고 믿습니다.”
[흠, 알았다.]
전화를 끊은 정지우는 대화 내용을 알려 주었다.
“다음 경기가 밤벤트리지?”
“응.”
“내일 만나 보고 또 의논하기로 하자.”
정지우가 답을 했고, 둘이서 필요한 것들을 살피며 시간을 보냈다.
***
정지우와 즉석밥으로 점심을 먹은 유정호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와 간단한 식사, 그리고 맥주를 파는 ‘브라우저’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유정호는 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비록 정지우의 사정을 알게 돼서 손을 내밀었고, 그를 일본으로 소개했으며, 발품을 팔아 가며 영국으로 이끈 장본인이지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마음은 없었다.
‘유정호 인생, 이 정도면 잘 살았다.’
서른다섯인 유정호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가 등을 돌려도 할 말이 없을 처지인데, 녀석은 함께 가자고 간곡하게 말을 했고, 마틴을 만나 달라고 청했다.
더 뭘 바라겠나?
정지우의 마음을 보았으니 박용근 감독처럼 더는 바라는 것 없는 심정이었다.
정지우가 정말 잘되면, 그래서 커다란 성공을 이루면 한 번쯤 손 벌릴 수 있는 사이? 뭐 그 정도만 해도 훌륭한 거다.
짬짬이 일을 봐주는 스포츠 의류 생산 업체와 이벤트 업체에 부탁하면 일자리 하나쯤 생길 거다.
나중에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된 정지우에게 언제고 모델 좀 부탁할 수도 있는 능력 있는 남자 유정호!
유정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마틴이 손을 들었다.
창가에 놓인 고정된 좌석의 한중간이었다.
청바지에 셔츠, 그 위에 편안한 재킷을 입은 마틴은 나이에 비해 몸을 잘 관리해서 스타일이 나쁘지 않았다.
“미스터 유! 반가워요.”
“네. 저도 그렇습니다.”
자리에 앉자 주문을 받기 위해 여직원이 다가왔다.
“점심은?”
“지우와 먹었습니다. 커피를 한 잔 하고 싶은데요.”
마틴은 홍차에 우유를 주문하고는 유정호를 점잖게 바라보았다.
“Ji에게 들었을 거라고 믿소.”
“그렇습니다.”
“이면 계약은 파기했고, 좀 더 좋은 조건으로 다시 협상할 생각이오. 솔직히 내게 감독 자리를 제안한 곳이 두 곳 있는데, 유니온 시티와 함께 놓고 고민해서 가장 유리한 쪽으로 움직일 계획이오.”
“좋군요.”
여직원이 홍차와 커피를 가져다주어서 잠시 대화가 끊겼다.
“미스터 유가 있는데 내가 함부로 계약을 파기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유정호는 생각하고 있었던 점을 바로 꺼내기로 했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챔피언십이라면 몰라도 이 이상 높은 리그에 올라가 계약을 하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감독님이 지우를 위해 추천할 만한 매니지먼트가 있다면 오히려 부탁하고 싶습니다.”
마틴이 입가에 미소를 단 채로 유정호를 말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지우밖에 선수도 없습니다. 그동안 생계를 유지하느라 매니지먼트 일도 제대로 봐주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이번 계약처럼 터무니없는 짓도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마틴을 보며 유정호는 어딘가 모르게 서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정지우를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결심을 떠올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마틴 감독님이 따로 계획한 바가 있다면 그에 걸맞은 매니지먼트도 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속은 후련한데 뭔가 허전한 느낌. 말을 마친 유정호의 심정이 꼭 그랬다.
“Ji가 예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해서 좀 놀랐소.”
“예?”
“이곳으로 나오는데 전화를 했더군요. 미스터 유가 매니지먼트를 포기한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면서 그럴 경우 자신은 어떤 계약도 할 수 없는 거라고 꼭 전해 달라고 했었소. 내게도 그 점에 대해 두 번이나 다짐을 받았고.”
바보 같은 놈! 멍청한 놈! 영리하지 못한 놈!
유정호는 답답해진 가슴으로 마틴을 바라보았다.
“미스터 유, Ji가 한국에 있는 감독을 생각하는 마음과 미스터 유가 오늘 이 자리에서 보여 준 양보, 그리고 Ji의 행동을 보고 나니 나도 그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데 인정해 주겠소?”
“그게…….”
“우리 솔직해집시다. Ji가 지금과 같은 능력을 계속 보여 주지 못한다면 나와 Ji는 어차피 프리미어리그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거요.”
마틴은 홍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나도 Ji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오. 어떻소? 내가 오퍼를 챙기고, 다음으로 미스터 유가 당장은 내 변호사와 의논해서 계약을 진행하는 것이?”
유정호가 섣불리 답을 하지 못하고 바라보는 앞이다.
“나는 Ji와 팀을 만들기도 바쁠 거요. 그렇게 되면 Ji의 계약, 처우, 그 외에 광고 수입과 옵션 수입을 챙겨 줄 사람이 필요하지요. 미스터 유라면 나와 유기적으로 움직여 줄 것 같은데?”
사람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
유정호가 실없이 웃는 것을 본 마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지난 계약의 비밀이 지켜진 것과 오늘 모습으로 미스터 유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소. 그럼 내 계획을 털어놓을 테니 우리 좀 더 진지하게 사업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유정호는 또다시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지우가 했다는 말이 생각나서 웃었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야…….”
“그럼 하시려던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유정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