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내 소문 들었어? (3)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일어나야 할 시간임을 알렸다.
이 상태로 훈련에 참가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정지우는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두툼한 점퍼를 걸치고 거실로 나섰다.
열이 오른 만큼 한기가 느껴졌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전화기를 든 정지우는 저장해 놓은 번호를 뒤졌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다음이었다.
[Hello?]
영국인 특유의 길게 늘어지는 답이 건너왔다.
“정지우야. 몸이 안 좋아서 오늘 회복 훈련을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많이 안 좋아? 팀 닥터를 보낼까?]
“가벼운 감기 같은데 일단 오늘 훈련은 참가하기 어려운 상태야. 프런트에 그렇게 전해 줘.”
[오케이! 몸조리 잘해.]
간단하게 통화를 마친 정지우는 꾸역꾸역 주방으로 움직였다.
이럴 땐 따듯한 국물과 함께 무언가를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래야 몸이 낫는다.
라면을 꺼내 몇 번 만지던 정지우는 냄비에 물을 끓이고, 즉석밥을 부었다.
“흐으.”
식탁 의자에 앉자 당장 가스레인지를 꺼 버리고 침대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피식.
그동안의 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이대로 침대로 들어가면 며칠이고 쓰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스크립터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마틴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서브로 있으면서 그동안 제대로 경기를 나서지 못했던 그가 연달아 중요한 게임을 뛰었으니 충분히 지칠 만도 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어제 게임은 비에 젖은 채로 진행되었다.
“훈련 끝나면 가 볼 테니까 스미스에게 말해 두고, 주소를 확인해 줘.”
“예.”
스크립터가 나가는 것을 본 마틴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 뒤에 밤벤트리와의 40라운드 경기가 있다.
‘이상하게 끌려가게 되는군.’
마틴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라운드로 향했다.
유니온 시티 팀으로는 13년 만이고, 마틴이 맡은 때부터는 5년 만에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앞둔 시점이었다.
승격이 이루어지면 이곳 레드 블레이트의 모습도 많이 바뀔 게 분명했다.
못 보던 선수들이 뛸 테고, 지금 있는 선수 중 몇 명은 다시 챔피언십의 다른 팀으로 옮겨가게 될 거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최하위를 해도 당장 4천만 파운드(한화 680억) 근처의 방송 중계권료가 쥬피터의 손에 쥐어진다.
거기에 유니폼에 새겨질 광고, 성적에 따라 달라붙을 기업 광고까지 더하면…….
쥬피터가 과연 유니온 시티를 어떻게 운영할지는 모르지만, 욕심 많은 그가 현명하지 못하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통로를 나서자 맑은 햇살이 마틴을 맞았다.
클레이의 소식, 그리고 정지우의 훈련 불참.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의 표정이 복잡했다.
레드 블레이트, 스태프, 선수들 모두 다가올 변화를 준비해야 할 때였다.
죽처럼 끓인 즉석밥에 깻잎을 얹어 겨우 식사를 마쳤다.
설거지는 급할 게 없으니까.
정지우가 뜨거운 음식을 먹어 조금 풀린 몸을 식탁 의자에 걸치고 메모했던 노트를 읽고 있을 때였다.
찌르르르릉!
현관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몰골이 좀 흉한데…….
정지우는 얼굴을 맨손으로 쓸며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마틴일세.]
감독이 여기까지?
지난 6년과는, 그리고 유니온 시티의 앞선 4개월과는 참 많이 다른 반응이었다.
싱크대를 바라본 정지우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마틴 감독과 팀 닥터, 그리고 스크립터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가벼운 감기 같습니다.”
방으로 들어선 마틴이 거실을 잠시 둘러보고는 반찬 냄새가 나서인지 싱크대로 시선을 주었다.
“앉으시죠. 커피가 있는데 드릴까요?”
“고맙지만 지금은 됐어. 우선 스미스에게 상태를 먼저 점검하지. 아침은?”
“쌀로 된 수프를 먹었습니다.”
마틴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팀 닥터가 가방을 열며 정지우에게 의자를 가리켰다.
전자 체온계를 귀에 대고 잠시 기다렸던 그가 다음으로 의료용 랜턴을 꺼낸 뒤 입을 벌리게 했다.
“양치나 하고 하죠.”
“그 시간을 기다리라는 게 더 큰 실례야.”
정지우는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어서 청진기를 꺼내 든 팀 닥터를 위해 정지우는 점퍼 지퍼를 내려 주었다.
커다랗게 숨을 쉴 때마다 청진기를 옮기던 팀 닥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 꺼냈던 것들을 집어넣었다.
“목이 부었고, 열이 심해. 약을 먹은 게 있나?”
“아스피린 2알을 먹었습니다.”
“병원에 연락해 둘 테니까 가서 링거를 맞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게 좋겠어.”
말을 마친 팀 닥터가 마틴을 보았다.
“스미스, 자네는 클락과 먼저 돌아가게. 나는 Ji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고, 어차피 병원에도 들러 볼 참이었으니까 뭐하면 함께 병원에 들르는 것으로 하지.”
평소에 ‘닥터’라고만 불러서 스미스란 팀 닥터의 이름은 참 오랜만에 들었다.
“무리하지 말고, 따듯한 물을 자주 마셔.”
스미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립터인 클락과 함께 나섰다.
“Bye!”
손을 들어 보인 클락이 문을 닫자 거실에 마틴과 정지우만 남았다.
“클레이는 어떻습니까?”
“수술 경과가 좋다는 연락이 있었다. 다시 훈련하는 데 대략 10개월쯤 걸릴 거라고 예상하더군.”
정강이뼈가 부러져 철심을 박는다고 했으니 충분히 그 정도 걸릴 거다.
“병원에도 가 봐야 하니까 간단하게 끝내지.”
마틴이 창에 시선을 한 번 준 후에 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와 쥬피터 회장 간의 계약을 파기했다.”
이게 뭔 소리지? 계약을 파기했다고?
이런 경우마다 느끼지만, 영어를 잘못 이해한 건가 싶어서 정지우는 멍한 눈으로 마틴을 바라보았다.
“벌금이라고는 했지만, 그런 이면 계약이 문제가 되면 결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심할 경우, 승점 몰수는 물론이고, 쥬피터 회장 역시 다시는 구단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중징계가 나올 수도 있지.”
“감독님도 인정했던 일이잖습니까? 그래서 저와 따로 구두 약속까지 했었구요.”
“그랬지. 그렇지만 사정이 바뀌었다.”
정지우의 표정을 살피는 얼굴로 마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라우쓰와의 선발 명단을 결정한 날, 계약을 파기했었다. 자네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8게임에 최선을 다한 후에 대우받는 계약을 하게 할 이유에서였지.”
“FA컵에 내보낸 것도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입니까?”
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자네가 흔들리는 팀을 어느 정도까지 잡아 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렇게 컨디션이 망가질 줄 알았다면 물론 경기에 넣지 않았겠지.”
정지우는 잠자코 마틴을 바라보았다.
갈팡질팡, 계약을 듣고서는 자기와 비밀 계약을 하자고 했다가, 뜬금없이 혼자서 계약을 파기했다고 하고, 그 이유가 제대로 된 몸값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양반이 원하는 것이, 솔직한 속마음이 도대체 뭘까?
“7게임이나 남았는데 굳이 오늘 말씀하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마틴이 씁쓸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다음 밤벤트리와의 경기는 얀센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러니 컨디션 조절하면서 좀 쉬어.”
강렬하게 빛나는 정지우의 시선에 답을 하는 것처럼 마틴이 입을 열었다.
“현실을 봐. 오늘의 축구는 일종의 커다란 사업이다. 선수, 구단, 리그,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들 모두가 그에 속해 있지. 그 속에서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들이 원하는 쇼도 보여야 할 필요가 있어.”
“나는 축구를 하고 한국에 축구 교실만 만들면 됩니다.”
“한국에 어떤 축구 교실을 만들고 싶은 건가?”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만들기만 하면 다 되는 건가? 그래서 유지비를 자네가 감당한다고? 그 후는? 혹시 자네가 클레이처럼 부상당해서 은퇴해야 한다면 그 뒤는? 다시 문을 닫나?”
마틴의 질문이 정지우의 입을 막았다.
“세계적인 팀의 코치가 방문하는 축구 교실, 전 세계에 이름 떨치는 선수가 방문하는 축구 교실, 그리고 스카우트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축구 교실. 어때, 탐나지 않나?”
세계적인 팀이 축구 교실을 만들고 지도까지 한다고?
스카우트들이 관심을 가지고?
“욕심납니다.”
“Good(좋아)!”
마틴이 만족한 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축구 교실 문제는 내게 맡겨 줄 수 없겠나?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 자네가 나와 정식으로 손을 잡는다면 자네의 매니지먼트를 존중할 거고, 협력할 거다.”
단순히 골을 막기만 하란 말은 아닌 듯 보였다.
“내가 할 일은 뭡니까?”
“나와 함께 팀을 이끌어 주는 거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지난 게임에 자네를 내보낸 이유가 그 점을 확인하고 싶었던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꾸밀 팀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아 주었으면 싶다.”
“결국, 감독님과 함께 이적하자는 말씀이군요.”
“물론 성적이 좋으면 좋은 팀에서 연락이 있을 거고, 현재의 매니지먼트보다 능력 있는 회사에서도 자네를 탐내겠지.”
말을 마친 마틴이 목이 마른 모양인지 ‘물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정지우가 냉장고에서 작은 물병을 꺼내 건네주었고, 그가 시원하게 마셨다.
“충고를 먼저 하나 하지. 앞으로 제대로 된 계약을 하고 싶다면 매니지먼트를 바꿔. 이번처럼 위험한 계약을 하는 친구를 믿을 수는 없으니까.”
정지우의 표정을 본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그러지 않겠지. 한국에 있는 감독을 위해 그런 계약을 했던 거니까. 그렇다면 내 제안을 받을 만하지 않나? 자네가 정말 높은 곳에 갈 때까지 나와 함께하는 거다. 그 과정에서 매니지먼트도 성장할 거고, 무엇보다 한국의 박 감독도 제대로 된 축구 교실을 이끌게 될 거다.”
“팀을 옮길 생각입니까?”
“아직 결정 난 건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쥬피터 회장과도 협상해 볼 생각이다.”
“그렇군요.”
정지우의 답을 확인하는 것처럼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7게임 남았다. 그 안에 결정해 주는 것이 좋아.”
“알겠습니다.”
“좋아.”
마틴이 몸을 일으켰다.
“병원까지는 내가 태워다 주지.”
“지금 같으면 안 가도 될 것 같습니다.”
“몸이 재산인 선수가 그런 생각은 위험해.”
마틴의 표정이 워낙 단호해서 정지우는 지갑을 챙겨 들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몇 가지 질문과 답이 오갔지만 정작 중요한 건 별로 없었다.
간단한 진찰 후에 임시 병실에 들러 링거를 꽂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틴이 떠났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마틴이 나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본에 진출한 뒤로 최선을 다해 뛰어 본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몇 경기 만에 구단주와 감독이 뒤엉킬 정도로 세계적인 실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처음엔 다들 몇 경기 반짝한 것에 현혹되어서 그렇겠지 싶었고, 그래서 8경기 무실점 계약에도 반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마틴이 계속 저렇게까지 나서는 것을 보자니 느닷없이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 은근한 유혹의 손길이 뻗치던 6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도 들었다.
마틴이 만들 팀을 이끌어 보라고?
점점 좋아지는 거겠지?
정지우는 나른하게 몰려오는 잠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에 걸쳐 링거를 맞고 나자 몸과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마음 같으면 릴리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감기 기운이 있어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물론 클레이를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지우는 병원을 나서 집으로 향했다.
이럴 때 누군가 의논할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다.
집에 돌아가 유정호에게 전화할 생각으로 정지우는 버스에 올랐다.
사람이 얼이 빠질 때가 있다.
집에 도착한 정지우는 현관에 죽치고 앉아 있는 유정호를 보며 꼭 그런 느낌이었다.
“형?”
“야! 전화기 좀 가지고 다녀!”
“올 거면 미리 연락을 좀 하지.”
“서프라이즈하려는 놈이 연락을 하고 오냐?”
유정호가 양손에 하나씩 든 상자를 얼굴 높이까지 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