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내 소문 들었어? (2)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야노시가 제자리에서 몇 차례 발을 굴렀다.
“우와- 아!”
라우쓰 응원단의 함성이 그린메이트를 가득 메웠을 때였다.
“Go! Go! Go! Go! My Ji!”
그 틈을 헤치고 한 남자의 처절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막을 거니까 끝까지 지켜봐요!
정지우는 자세를 더욱 낮추며 야노시의 발을 노려보았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
그가 펄쩍 뛰어오른 것처럼 몸을 솟구쳤다가 공을 향해 움직였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몸의 중심을 야노시의 움직임에 맞춰 기울였다.
왼발이다. 놈이 왼발을 어떻게 디디느냐에 따라 공의 방향이 갈린다.
콰악!
공의 바로 앞에 야노시의 왼발이 놓였다.
코가 정면을 향했다. 정지우의 왼편으로 공이 올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아니었다면 놈의 왼발 코는 분명 정지우의 오른쪽을 가리켰어야 한다.
왼쪽이다! 왼쪽으로 온다!
움찔!
그 짧은 순간에 정지우는 상체를 오른쪽으로 흔들었다. 마지막에 혹시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던진 미끼였다.
투우욱!
야노시는 오른발 안쪽으로 공을 걷어찼다.
왼발을 벌렸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코를 정면에 놓았다면 오른발 발등으로 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
공은 왼쪽 골포스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보인다! 분명하게 봤다!
휘이익!
정지우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방향을 정확하게 잡았고, 높이까지 맞췄다.
‘제발!’
바닥을 스치듯 날아오는 공을 향해 정지우는 이를 악문 채로 최선을 다해 손을 뻗었다.
막고 싶다. 어깨가 빠지는 한이 있어도 막아 내고 싶다.
투욱!
“이예에에에에에!”
바닥에 떨어져 두 바퀴를 구른 정지우의 시선에 던져둔 수건을 넘어 굴러가는 공이 보였다.
벌떡 일어선 정지우가 왼편 가슴의 엠블럼을 두들기자,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골을 넣은 것만큼이나 열광적인 함성을 질러 주었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런 미친 골키퍼 놈!”
데이빗이 정지우의 머리를 두들겼고, 라파엘이 어깨를 감쌌으며, 꼼빠니가 뒤에서 목을 끌어안았다.
그사이에 마음 급한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코너킥을 위해 공을 세웠다.
“헤이! 멜스! 자리! 자리!”
정지우는 멜스를 향해 고함을 질렀고, 꼼빠니에게 뒤를 가리켰다.
삐익!
코너킥을 차라는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알레가 빠르게 공을 찼다.
퍼엉!
공은 정지우의 3미터쯤 앞으로 날아왔다.
그냥 둘 줄 알고?
정지우는 공이 떨어지는 지점을 향해 달려 나갔다.
라우쓰의 20번과 7번 블로이가 몸을 띄웠는데, 공은 정지우의 주먹에 먼저 걸렸다.
퍼엉. 콰직.
분명 옆구리를 팔꿈치로 얻어맞은 게 분명했다. 숨을 쉬기 거북해서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정지우는 이를 악물며 서 있었다.
‘달려! 이 뺀질아!’
튕겨 나간 공을 카알이 걷어차 주었고, 오늘 처음으로 공을 잡은 레믹이 라우쓰의 골대를 향해 죽어라고 달리고 있었다.
주저앉아서 시간을 끌어 줄 줄 알았어? 안 되겠으면 주심에게 자수라도 하던가.
수비에 가담하지 못한 20번 놈이 놀란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 아!”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옆구리가 뜨끔뜨끔했지만, 정지우는 레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왼쪽으로 몸을 틀던 레믹이 한순간에 오른쪽으로 공을 넘겼고, 다시 왼편으로 몸을 움찔하는가 싶더니 바로 오른쪽으로 치고 나갔다.
그 짧은 순간에 두 번이나 방향을 틀어 댄 거라서, 따라가던 수비수 셋이 뒤엉켰고, 한 놈은 바닥에 기다랗게 넘어졌다.
골키퍼가 달려 나온 것을 본 레믹이 오른쪽으로 공을 툭 찼다.
투욱!
“우와- 아!”
“이예에에에에!”
완전히 비어 버린 골대를 향해 공을 차 넣은 레믹은 바로 유니온 시티 응원단 앞으로 달렸다.
“끄응.”
정지우는 손을 위로 들지 못했다. 대신 쪼그리고 앉아서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축축한 바닥만큼이나 지저분한 경기를 이겨 내고 있는 거였다.
그래도 됐다. 이렇게라도 한 골 더 넣어서 저놈들을 꺾을 수만 있다면 이걸로 충분한 거다.
곳곳에서 라우쓰 FC 선수들이 머리를 감싸거나, 무릎에 양팔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패배를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세레머니가 끝나고 중앙선에서 라우쓰의 알레가 볼을 건드리는 순간,
삑. 삑. 삐이익.
주심이 오늘의 지저분하고 추한 경기를 끝냈다.
정지우는 천천히 원정 응원팀의 앞으로 걸었다. 아직 옆구리가 결려서 손을 높이 들지는 못했지만, 왼쪽 이마쯤으로 든 손으로 박수를 쳤다.
비에 흠뻑 젖은 관중들이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며 선수들을 향해 손을 뻗어 내고 있었다.
***
하여간 인터넷이 문제다.
새벽에 있었던 경기가 몇 분 뒤에 바로 기사로 올라와 버리니 협조를 구할 틈조차 없는 거다.
한승관은 답답한 심정으로 조동익 부회장의 방으로 들어섰다.
조동익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인지 여직원은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들어가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
한승관은 옷을 살피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부회장님.”
“앉아 봐.”
조동익의 앞쪽에 앉은 한승관은 잠자코 있었다.
여직원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녹차 티백이 담긴 잔을 놓아주고 나간 다음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확실하게 부탁은 했는데 프리랜서 기자들이 클릭 수를 노리고 자꾸만 기사를 올려서 그것까지는 막기가 어렵답니다.”
“흥! 데스크의 허락 없이 올라오는 기사가 어디 있다고!”
“죄송합니다.”
한승관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정지우가 페널티킥을 막아 낸 장면이 동영상으로 올라오면서 댓글 분위기는 제법 험악했다.
“미얀마야 그렇다고 쳐도 쿠웨이트에 지면 상황 심각해져. 그건 어쩌려고 그래?”
“선수를 찾고는 있는데 부회장님도 아시다시피 골키퍼는 워낙 뻔해서 당장 새 얼굴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아.”
조동익이 한심스럽다는 것처럼 탄식을 쏟아 냈다.
한승관을 두고 그런 것인지, 골키퍼를 두고 그런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강태섭이는 어때?”
“그 녀석은 김문호 라인입니다. 그리고…….”
“김문호가 박용근과 한통속이라는 거지?”
한승관이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주상도는?”
“상도를 발탁하면 정지우를 뽑지 않았다는 비난은 비난대로 받아야 하고, 거기에 괜히 지금 있는 이진용이와 비교까지 돼서 얻을 게 없습니다.”
“거참! 진용이 그놈이 좀 막아 주면 제일 좋은데, 왜 이렇게 슬럼프가 길어!”
조동익이 답답한 심정을 그대로 털어 냈다.
“아니! 선수들이 슬럼프가 오면 좀 지켜봐 주기도 해야지. 대뜸 바꾸라고만 해 대니, 원! 이진용이가 국대 올라온 게 이제 고작 4년밖에 안 됐구만.”
조동익의 불평이 터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법 없어?”
“저, 부회장님?”
“뭔데? 생각해 둔 게 있는 거야?”
조동익이 눈가를 좁히며 한승관의 답을 요구하고 나섰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영국 시즌이 끝나면 정지우를 국가대표로 발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그래서?”
한승관에게 무언가 복안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조동익이 다음 말을 재촉했다.
“놈을 우리가 데리고 있다가 평가전에 선발로 내세우는 겁니다. 유럽 강호와 브라질 정도 불러서 한 게임을 그 녀석에게 맡겨 보면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조동익이 고개를 갸웃한 다음이었다.
“어차피 수비수를 정하는 것은 감독의 몫입니다. 평가전만 잡아 주시면 더는 정지우를 대표로 쓰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제가 알아서 정리하겠습니다.”
“그랬다가 놈이 미친 척하고 활약하면?”
“시즌이 끝나고 오는 놈입니다. 바로 체력 훈련에 들어가서 뺑뺑이 돌린 다음 첫 게임을 맡기면 됩니다. 혹시 놈이 실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말씀드렸듯이 수비수와 처음 발을 맞추는 거고, 거기에 상대가 브라질 정도 된다면…….”
조동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브라질과의 평가전이라면 돈이 제법 들겠는데?”
“흥행도 어느 정도는 보장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감독은 어떻게 하고?”
“문광국으로 할까 합니다.”
상체를 세운 조동익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친구는 지도자 라이센스가 없잖아?”
“속성 과정으로 만들어 주시면 되잖겠습니까? 기자들이야 이번에 먹은 것이 있으니 입 다물 거고, 선수 중에 누가 떠들 것도 아니니까 그럭저럭 넘길 것 같습니다.”
“흐음, 그 친구라면 당장 반발은 덮고 가겠지?”
“외국인 감독을 쓰라는 말도 쏙 들어갈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이번엔 잘할 수 있겠어?”
“맡겨 주십시오. 대신 브라질하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번에는 확실하게 좀 해. 자칫하다가 외국인 감독 들어오면 지금껏 키운 애들 다 날아가. 무슨 말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한승관이 단단하게 답을 했다.
***
기분이 날아갈 것 같으면서 한쪽이 무거운 느낌?
박용근은 화환을 나르며 새벽에 보았던 FA컵 경기를 떠올렸다.
얼마나 좋던지. 정지우가 페널티킥을 막아 냈을 때는 튀어나오는 고함을 삼키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흐흐흐.”
화환이 솜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이렇게 웃고 살려고 노력하는 거지.”
1톤 용달 기사의 인사말을 적당하게 받아 준 박용근이 앞섶을 털며 가게로 들어섰다.
“여보, 나 산책 좀 하고 올게!”
“그래! 이제 한가하니까 천천히 돌아보고 와!”
박용근은 가게 문을 닫고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이렇게 15분쯤 걸으면 언덕이 나오고 그 길이 산책로처럼 건너편으로 연결된다.
빠르게 걸어서 몸을 덥힌 박용근은 언덕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잘했다, 이 녀석아!’
분명 상대 팀 선수의 팔꿈치에 맞았던 것 같은데도 끝까지 버티던 정지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상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데 가슴 한쪽이 무거운 이유였다.
“후후! 후후!”
두 번씩 숨을 끊어서 내쉬고 들이마시며 박용근은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그의 인생에서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축구.
지금 그에게 축구는 바로 정지우였다.
공을 못 차면 어떻고, 감독을 못하면 또 어떠냐?
고맙고 감사한 전은주가 있고, 정지우가 저렇게 멋지게 살아났는데…….
‘난 괜찮다. 정말 괜찮아.’
박용근은 언덕을 얼추 올라가 기다랗게 이어진 길을 따라 달렸다.
‘높이 날아. 널 인정해 주는 곳에서 최고의 선수가 돼서 돈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 좋은 사람 만나.’
박용근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절대 이곳 돌아보지 마라. 난 정말 잘 지낸다. 가끔 돼지 불고기 생각나면 그때나 연락하고.’
진심이었다.
박용근은 진심으로 정지우가 훨훨 날아오르는 데 거치적거리고 싶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유정호가 와서 전해 준 말을 들은 거로 됐다.
저런 활약을 해 놓고, 몇 개의 팀이 달려든다는데 사과를 하러 오겠다고 하지 않았나?
지난 6년을 흔들렸던 놈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나 했더니 고작 퇴물이 된 자신과 전은주에게 사과하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그래서 그 나이에 은퇴를 결심해서 그렇게 했다지 않던가.
“헉헉. 헉헉.”
숨이 턱에 차올랐지만, 박용근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언젠가 미련 없이 축구를 놓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달리기를 멈출 생각이었다.
***
날이 밝아 왔음에도 정지우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젖은 몸을 뜨거운 물로 풀고 싶었는데, 라우쓰 FC 샤워장의 물은 미지근한 정도여서, 오히려 그때부터 조금씩 한기가 느껴졌었다.
“후우.”
밤새 앓고 났는데도, 아스피린을 2알이나 먹었는데도 자꾸만 몸이 떨려서, 정지우는 동그랗게 구부린 자세로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지난 6년 동안 늘 혼자서 이겨 냈던 일들이다.
이렇게 조금 견디다가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나아진다.
더구나 지금은 라면도 있는 거다.
“흐으. 흐으.”
숨이 거칠게 나왔다.
보고 싶다.
고통 없을 어머니가, 이 녀석이 어디서 엄살을 부리느냐고 눈을 부릅뜰 박용근이, 열이 이렇게 나서 어떡하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떠 줄 전은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