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34화 (34/262)

제4장. 내 소문 들었어? (1)

다시 시작된 경기가 조심스럽게 진행될 거라고 여기면 정말 순진한 생각이다.

정규 시간을 5분 남겨 놓은 상태에서 꼼빠니의 패스로 경기가 시작되자 라우쓰 선수들은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다.

어차피 욕먹게 되어 버린 경기다. 그나마 무승부, 더 나아가서 승리를 거두는 게 라우쓰 FC 입장에서는 실리라도 챙긴 꼴이 되는 거였다.

퍼억!

공을 받았던 데이빗이 달려든 라우쓰의 선수에게 받혀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헤이!”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삐익! 삑! 삑!

데이빗이 뒹구는 동안, 주변 선수들이 잠시 뒤엉켰는데 양쪽 모두 함부로 나서지는 못했다.

유니온 시티만 해도 벌써 데이빗과 꼼빠니, 그리고 정지우가 옐로카드를 받은 상태여서 자칫하다간 한 명쯤 퇴장당할 수 있는 처지였다.

주심이 데이빗을 들이받은 라우쓰의 20번 선수에게 옐로카드를 높이 쳐들며 사태가 진정됐다.

“우!”

그때 대기심이 추가 시간을 알리는 패널을 좌우로 돌렸는데,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커다랗게 야유를 퍼부어 댔다.

15분이나 더 준다고?

클레이가 태클당했을 때 남은 시간이 15분이었는데?

홈팀의 이점이 있다고는 해도 오늘 경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아무튼, 경기를 진행해야 할 시간이었다.

투욱!

데이빗은 경험 많은 라파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또다시 라우쓰의 선수들이 라파엘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동료가 상대 팀의 거친 플레이에 부상당하고, 또 계속해서 쓰러지는 것을 보면 필드 플레이어는 당연히 움츠러들게 된다.

툭!

라파엘이 당황한 모습으로 정지우를 향해 공을 찼다.

물기가 흥건한 그라운드 사정을 생각하면 라파엘은 차라리 공을 바깥으로 내보냈어야 했다.

주춤하며 속도가 죽어 버린 공을 향해 정지우와 라우쓰의 20번 선수, 11번 알레가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고, 라파엘과 데이빗, 멜스가 뒤늦게 뛰어왔다.

거친 숨소리를 터트리며, 도저히 멈추거나 방향을 틀 수 없을 만큼 죽을힘을 다해 달려드는 2명의 상대 선수 앞에 공이 있었다.

철벅! 철벅!

선수들의 스파이크가 바닥을 찍으며 달려들었다.

겁먹을 줄 알아? 내가 피할 것 같냐고!

정지우는 이를 악문 채로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촤아아악!

바닥에 고였던 물이 몸을 적시는 순간, 정지우는 양손을 뻗어 공을 거머쥐었다.

철퍼덕!

그리고 거의 동시에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공에 걸려 앞으로 엎어졌고,

퍼억!

그 직후에 정지우의 배에 걸린 20번 선수가 허공에 붕 떴다가 좀 더 먼 곳에 쓰러졌다.

“우-!”

삐이익!

관중들의 탄성과 심판의 휘슬이 커다랗게 울렸는데, 정지우는 그때까지도 공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일부러 걷어찬 거구나 싶을 정도로 배에 통증이 심해서 정지우는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주변으로 또다시 선수들이 몰려들었고, ‘골키퍼 파울이잖아?’, ‘경기를 빨리 진행해.’ 따위의 말로 라우쓰의 선수들이 주심에게 항의하는 소리도 들렸다.

팀 닥터가 달려왔다.

지난 5년 동안 그라운드에서 팀 닥터의 도움을 받은 게 전부 합쳐서 두 번밖에 안 되는데, 최근에는 이상하게 경기만 나서면 도움을 받게 된다. 팀 닥터 도움 연속 기록이라도 세울 지경이었다.

정지우를 똑바로 눕힌 팀 닥터가 배를 눌렀다.

“끄응!”

“어떻게 아파? 통증을 설명해 봐.”

“얻어맞아서 울리는 느낌이요.”

“앉아 봐.”

팀 닥터가 정지우의 상체를 잡아 앉힌 다음이었다.

라우쓰 선수 한 명이 다가와 ‘그만 일어나!’ 하면서 어깨를 건드렸다.

경기를 하다 보면 피가 끓을 때가 있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놈들은 어쩐지 매너를 못 배운 놈들처럼 나서고 있었다.

마치 승패가 축구의 전부인 것처럼.

“계속할 거지?”

“그럼요.”

“교체할 키퍼도 없어.”

정지우가 일어나자 팀 닥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비가 그친 뒤에 내리쬐는 찬란한 햇살이 무색하게 경기는 더러운 모습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뭐가 그렇게 겁나?”

걱정된 얼굴로 다가온 라파엘의 볼을 툭툭 치며 정지우는 농담을 던졌다. 물론 피식 웃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골대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라인을 올려.”

말을 마친 정지우는 공을 바닥에 놓았다.

선수들이 자리를 지키며 노려보는 앞이다.

정지우는 양팔을 두 번쯤 앞으로 밀었다. 넘어가라는 뜻이다.

상대 골대 쪽으로 더 전진하라는 의미였다.

콕콕.

오른발 코로 바닥을 찍은 정지우가 공을 향해 움직일 때였다. 라우쓰의 20번 선수가 앞을 가로막기 위해 거칠게 뛰어들었다.

이놈은 축구를 모른다. 규정도, 매너도 무시한 채 그저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게 좋은 거라고 믿는 거고, 무식할 정도로 거칠게 뛰어서 상대를 짓누르면 좋은 줄 아는 거다.

정지우는 공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공 앞에서 높다랗게 몸을 띄웠던 라우쓰의 20번이 정지우를 들이받다시피 앞에 섰다.

“뭐야!”

정지우는 놈의 가슴을 뒤로 밀었다.

털썩!

웃기지도 않는다.

놈이 얼굴을 감싸 쥐고 바닥을 굴러 대고 있었다.

“우!”

삑! 삑! 삑! 삑!

또다시 라우쓰 선수들이 정지우에게 달려들었고, 곧바로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뒤엉켰다.

“뭐? 뭐 어쩔 건데? 저놈이 달려드는 거 못 봤어!”

물러서지 않는 정지우를 둘러싸며 유니온 선수들의 눈에 다시 독기가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삑! 삑! 삑! 삑!

주심이 선수들에게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물러나라는 뜻을 전했다.

“정말 왜 이래?”

정지우는 다가온 주심을 보며 20번 선수를 가리켰다.

“볼을 차는 순간에 이렇게 뛰어드는 건 반칙이잖아! 그리고 저건 시뮬레이션 동작이야. 파울 때문에 경고를 피하려고 오버하는 거라고.”

여기서 옐로카드를 꺼내면 정지우와 20번 선수 모두 동시에 퇴장인 거다.

주심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얼른 공을 차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쓰러진 선수에게 가서 ‘정말 안 일어나면 퇴장시킨다.’라고 말을 뱉었다.

쭈뼛쭈뼛.

놈이 어색한 표정으로 일어나 코와 입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주심에게 항의했다. 그러면서 힐끔 정지우를 살폈다.

“다 봤어. 가슴을 민 건 맞지만, 그 전에 달려든 행위도 충분히 경고감이야. 자꾸 이러면 둘 다 퇴장시킬 거다.”

이건 아니란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 놈이 뒤로 물러났다.

속을 모두 털어놓은 것처럼 한숨을 내쉰 주심이 정지우를 향해 공을 가리키고는 뒷걸음질로 중앙선 쪽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흐르는 건 좋은 거니까.

정지우는 다시 공 뒤로 움직여 양팔을 모아 앞을 가리킨 다음,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또 할래? 하고 싶으면 해 보고!

의도적으로 20번 선수에게 시선을 주고 나서야 정지우는 공을 향해 움직였다.

퍼엉!

높다랗게 떠서 날아간 공이 상대 진영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그런데 헤딩을 위해 뛰어오른 레믹이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숙였다.

주심도, 선심도 반칙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믹은 분명 상대 선수의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은 거였다.

승리를 위한 투지와 추잡한 행동을 구별 못하는 놈들, 실력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더러운 짓을 해서라도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모두 나왔다.

“우와- 아!”

그라운드의 배수 시설이 엉망이었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경기를 진행할 만했다.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공을 잡아서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세게 차 주었다.

멜스가 발을 뻗어 보았는데, 공은 그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7번 블로이 앞으로 굴러갔다.

“자리 지켜! 달려들지 마!”

정지우는 악을 쓴 후에 허리를 낮추며 자세를 잡았다.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 앞에서 라우쓰의 7번 블로이가 반대편으로 공을 넘겼다.

원래는 클레이가 맡았던 지역이다. 그가 빠지면서 꼼빠니가 대신 들어왔고, 레믹이 꼼빠니의 자리를 맡았다.

주춤. 주춤.

꼼빠니가 뒤로 물러나며 막자, 9번 야노시가 옆으로 달려온 20번 선수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2 대 1 패스? 아니면 중거리 슛?

20번 선수는 공을 받아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움직였다.

꼼빠니가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9번 야노시를 따라 골대로 달려왔다.

20번 놈의 앞이 텅 비었다. 게다가 꼼빠니 때문에 20번 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비켜!”

정지우가 악을 쓴 순간이었다.

퍼엉!

시야가 완벽하게 가려진 상태에서 20번 놈이 중거리 슛을 날렸다.

“우와- 아!”

흥건했던 물이 적당하게 빠져나간 그라운드,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은 잔디, 게다가 꼼빠니가 시야까지 가린 상태에서 날아온 공이다.

못 봤다! 소리가 들렸을 때 공을 확인하지 못했다.

클레이와는 다르게 호흡이 안 맞는 꼼빠니가 엉뚱한 곳으로 달려든 탓이었다.

휘익!

몸을 날린 정지우의 눈에 그제야 공이 보였다.

바닥에 튕긴 공이 있는 대로 뻗은 정지우의 오른손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익!’

정지우는 몸을 뻗은 상태에서 오른손을 위로 들었다.

틱!

손을 맞고 튀어 오른 공이 높다랗게 떴다가 앞으로 떨어졌다.

철벅!

차가운 물이 몸을 적실 때 정지우는 벌떡 일어났다.

퍼엉!

바닥에 떨어지는 공을 라우쓰의 10번 스테노가 그대로 걷어찼다.

휘익!

정지우는 다시 몸을 날렸다.

터억! 티잉!

“우!”

공이 허공에서 휘두른 정지우의 손을 맞은 후, 크로스바를 때린 다음 옆으로 흘렀다.

제발 좀 비켜!

꼼빠니가 제 딴에는 막아 주겠다고 앞에서 얼쩡거렸는데 솔직히 독이 되면 됐지, 도움은 아니었다.

벌떡 일어난 정지우는 공이 흘러간 골포스트에 바싹 붙었다.

뒤쪽 골대는 꼼짝없이 꼼빠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툭툭.

라우쓰의 7번 블로이가 공을 차며 다가왔고, 멜스가 달려들었다.

‘멍청이!’

달려들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멜스는 공을 뺏겠다는 욕심에 7번 블로이에게 달려들었다.

툭!

“우와- 아!”

블로이가 멜스의 다리 사이로 공을 차며 옆을 치고 달렸다.

콰악!

당황한 멜스는 최악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왼쪽 다리를 쭉 뻗어 버린 거였다.

철퍼덕!

블로이가 앞으로 커다랗게 엎어진 순간,

삐이익!

“우와- 아!”

주심이 오른손을 길게 뻗으며 뛰어왔다. 페널티킥을 의미하는 동작이었다.

둥둥! 둥둥둥!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둥둥! 둥둥둥!

“The world has ever seen!”

고개를 떨군 멜스,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데이빗과 라파엘의 표정이 북을 두드리며 외치는 라우쓰 응원단과 완벽하게 대조를 이뤘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숨을 커다랗게 쉬며 수건을 집어 장갑의 안을 닦았다.

라우쓰의 9번 야노시가 상의에 공을 닦아 바닥에 세워 놓고,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에는 선수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왼쪽? 가운데? 오른쪽? 위? 아래?

페널티킥은 방향을 우선 정하고, 다음으로 높낮이를 짚는다.

정지우는 수건으로 장갑을 박박 문지르며 야노시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놈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Goddamn it! Hurry up! Fucker!”

관중석에서 ‘염병할! 빨리 좀 움직이라구! 망할 놈아!’ 하는 거친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라우쓰 FC를 응원하는 입장에선 속이 타들어 갈 일이다.

이 상태에서 페널티킥이 실패하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고, 이 골을 넣어도 객관적 실력 차이가 있는 유니온 시티와 재경기를 해야 하니까.

삑! 삑!

주심이 빨리 포지션에 서라고 정지우를 향해 휘슬을 불어 댔다.

정지우는 높다랗게 들어 보인 수건을 라인 밖으로 던지고 천천히 걸어서 골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럴 때는 정말 외롭다. 이 넓은 그라운드에 달랑 혼자 서 있는 느낌, 달려드는 상대 팀 11명을 혼자서 모조리 상대하는 느낌이 들 때면 무엇보다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이 먼저 몰려들었다.

“후우.”

막는다. 막을 거다.

보이면 막을 수 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희처럼 더럽게 하는 축구에는 지지 않을 거다.

정지우는 골대의 중앙에 서서 허리를 낮춘 자세로 양팔을 길게 폈다.

후욱. 후욱.

긴장되지? 솔직히 너도 죽을 맛이지?

왼쪽이나 오른쪽, 골키퍼가 몰려 있는 반대쪽 코너로 정확하게 차 넣으면 절대 못 막는 게 페널티킥이잖아?

바닥이 젖어서 유리한 상황에서 절대로 넣어야 할 이 골을 못 넣을까 봐 두렵지?

그래서 너희가 지게 될까 봐 심장이 쿵쾅거리잖아?

내 소문 들었어?

누구도 내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다는 거?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커다랗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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