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33화 (33/262)

제3장. 지금 뭐하는 거야? (2)

라커룸에 들어선 선수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얼굴을 닦았다.

교체가 불만스러운 얀센, 뛰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한 레믹을 제외하고 다들 표정도 밝았다.

5분쯤 지났을 때 마틴이 들어섰다.

“좋아! 8강이다! 수비 라인은 Ji의 지시에 따르고 후반에도 지금 포메이션을 유지해!”

그는 평소보다 반 톤쯤 높은 음성으로 후반을 간단하게 지시했다.

“다들 토너먼트인 것 알지?”

“물론이죠!”

마틴이 라커룸을 둘러보며 던진 질문에 데이빗이 대표로 답을 했다.

“자! 자! 후반에는 라우쓰가 바짝 올리고 달려들 거야. 허리 싸움에서 지지 말고, 혹시 공을 잡게 되면 데이빗의 판단에 따라 기습을 하든, 정비를 하든 해.”

말을 마친 마틴은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라커룸을 쭉 둘러본 후 밖으로 나갔다.

굳이 마틴의 말이 아니어도 단판 승부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후반에 라우쓰가 좀 더 거칠게 밀고 들어올 거라는 것 역시 모두가 짐작하는 일이었다.

이런 승부에서 1점을 앞서고 있다는 것은 막말로 칼자루를 쥐었다는 의미였다.

“꼼빠니, 이대로 끝나면 식사 한 번 사야지?”

데이빗이 분위기 쇄신을 위해 농담을 던졌고, 꼼빠니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정말 나쁘지 않았다.

삐익. 삐익. 삐익.

후반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몇 푼 하지도 않을 텐데 저놈의 벨 좀 듣기 좋은 소리로 바꾸면 안 되는 건가?

장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는 선수들을 따라 라커룸을 나섰다.

전반전에 느꼈던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는데 낡은 터널, 그리고 듣기 거북한 벨 소리 때문인가 생각했다.

밖으로 나섰을 때는 금방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후반을 반기는 관중들의 박수가 울려 나오는 가운데 정지우는 본부석의 오른쪽 골대로 움직였다.

“후우!”

버릇처럼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고, 골대의 양쪽 포스트 사이를 확실하게 점검했다.

양 팀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맞섰고, 그 한가운데에 선 주심이 휘슬을 입에 문 채로 좌우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삐이이익!

경기가 시작되었다.

유니온 시티의 선공. 데이빗이 뒤로 돌려 준 공을 라파엘이 받아서 클레이에게 넘겨주었다.

클레이는 꼼빠니에게, 꼼빠니가 카알에게, 카알이 다시 라파엘에게, 공은 쉴 새 없이 유니온 시티 진영을 돌았다.

4-4-2의 진영은 4명과 4명이 만들어 낸 두 줄의 간격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그리고 그 중심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팀 운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전술이다.

먼저 골대 바로 앞에서 라파엘이 4명을 이끌고, 다음 4명의 라인을 데이빗이 지휘한다.

데이빗은 유니온 시티의 라인을 전체적으로 골대 가깝게 두었다. 한마디로 촘촘하게 선 8명의 선수가 페널티 에어리어 앞쪽을 확실하게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후반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라 라우쓰 FC도 극단적인 공격보다는 한두 명의 선수가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 흘러가는 시간은 명백하게 유니온 시티의 편이었다.

공을 몰고 중앙선을 넘어갔던 꼼빠니가 다시 기다랗게 차서 뒤편에 있던 데이빗에게 넘겨주었다.

데이빗은 바로 공을 라파엘에게 주었고, 라파엘은 그대로 정지우를 향해 공을 찼다.

기회를 노리던 라우쓰의 7번 블로이와 11번 알레가 죽을힘을 다해 정지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어설프게 굴었다가 실수라도 하면 게임을 망친다.

정지우는 굴러오는 공을 있는 힘껏 걷어 냈다.

퍼엉!

공은 높다랗게 떠서 라우쓰의 진영을 향해 날아갔다.

앞쪽에서 몸싸움이 있었는데, 라우쓰의 3번 클랍이 공을 따냈다.

둥둥! 둥둥둥!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둥둥! 둥둥둥!

“The world has ever seen!”

잠잠하던 라우쓰 홈 관중들이 북을 울리며 응원 구호를 외치는 순간이었다.

잔디 곳곳에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제법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지우는 골키퍼 장갑을 유니폼에 대고 문질렀다. 금방 젖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손바닥을 덜 젖게 하기 위해서였다.

쏴아아아아!

그러나 점점 강해진 빗줄기는 ‘어디 한번 해 보시지?’ 하는 것처럼 시원하게 쏟아졌다.

그냥 봄비가 아니라 장마철에나 봄 직한 장대비였다.

빗물 때문에 자꾸만 시야가 흘려져 정지우는 몇 번이나 팔등으로 눈을 닦았다.

느닷없이 엄청나게 퍼붓는 비 때문에 중앙선 부근에서는 어처구니없는 공방이 펼쳐졌다.

패스를 한답시고 차 준 공이 중간에 멈춰 서는 것은 기본이었고, 드리블을 하던 선수가 공이 물구덩이에 서는 바람에 덜렁 혼자서 달리는 꼴도 나왔다.

우비를 입은 관중들이 반, 온몸이 홀랑 젖었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관중이 나머지 반쯤 됐다.

애처로운 홈팀 관중들의 응원 구호가 몇 번 나오는 동안, 골키퍼의 실수를 기대하며 멀리서 내지른 슛이 서너 차례 있었다.

물론 위협적인 슈팅은 하나도 없었다.

15분쯤 내렸던 비가 가위로 뚝 자른 것처럼 멈췄고, 거짓말처럼 햇살이 그린메이트를 비추었다.

정지우는 벤치를 향해 양손을 흔들었다. 골키퍼 장갑과 마른 수건을 부탁한 건데, 선수 교체나 혹은 공이 아웃된 상황을 이용해 장갑을 바꿔 낄 생각이었다.

주심, 선심, 선수들이 흠뻑 젖은 채로 뛰었다.

죽어라 뛰고 난 선수들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어서 누가 더 열심히 뛰고 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후반 30분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흘렀다.

비가 그치자 물이 제법 빠져서 그나마 정상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는데, 아직은 달리거나 방향을 틀던 선수들이 제 풀에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나왔다.

정지우는 고개를 좌우로 비틀며 경기에 집중했다.

필드 플레이어와 달라서 골키퍼는 비를 맞으면 몸이 식는다. 거기에 수비수가 넘어지거나 고인 물에 튕긴 공이 이상한 바운드를 그려 내는 것 모두 골키퍼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삐익!

공이 터치라인 바깥으로 나간 뒤였다. 주심이 휘슬을 불어 선수 교체를 지시했다.

라우쓰는 무려 3명의 선수를 동시에 교체하고 있었다.

10여 분 남은 시간에 승부를 걸겠다는 의미일 테니까 지금 들어오는 선수들은 거의 공격을 담당하게 될 거다.

정지우는 빠르게 달려가서 장갑을 던져 주고, 마른 수건에 손을 닦은 다음, 새 장갑을 받아 들었다.

라우쓰 FC의 골키퍼 해드슨도 교체를 위해 대기 중인 선수들 건너편에서 장갑을 교체하는 것이 보였다.

정지우는 장갑을 손에 끼우며 골대로 달렸다.

자세를 잡은 정지우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 역시나 수비수들이 줄줄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라파엘! 중거리! 중거리 슛을 조심해!”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이! 함부로 달려들지 말고 위치를 지켜!”

“오케이!”

클레이가 알았다는 것처럼 말과 함께 손을 들었다.

“멜스! 헤이! 멜스!”

멜스가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위치를 지켜 줘! 중거리 슛을 막게!”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정지우는 골대의 좌우를 살피고 그 중간에 섰다.

세 번이나 고함을 친 덕분에 유니온 선수들 대부분은 정지우가 중거리 슛을 경계한다는 것을 대강 다 알아들었다.

교체가 끝나고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라우쓰의 수비수가 길게 던져 준 공을 새로 들어온 20번 선수가 받아 골대 쪽으로 길게 차 주었다.

정말이지 극단적이란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라우쓰의 선수 대부분이 골대 앞으로 달려들었다.

데이빗이 점프를 하는 앞과 뒤로 라우쓰의 9번 야노시와 교체해 들어온 26번 선수가 동시에 몸을 띄웠다.

야노시의 머리를 맞고 날아간 공을 라우쓰의 11번 알레가 잡았다.

그가 10번 스테노에게 공을 패스해 줄 때, 라파엘이 이끄는 수비 라인 사이사이로 라우쓰의 선수들이 끼어들었다.

공을 찬 이후에 골대로 달려들면 당연하게 오프사이드 반칙이 아니다. 그러니 수비수 사이에 서 있는 라우쓰 선수들 모두 센터링이 날아오는 순간에 일제히 골대로 달려들겠다는 의미였다.

주춤주춤!

클레이가 자세를 잔뜩 낮추고 스테노의 움직임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한순간 스테노가 공을 툭 차며 클레이의 옆을 뚫고 달렸다.

“우!”

그런데 바닥에 물이 고였던지 라우쓰의 10번 스테노가 달려 나간 뒤로 공이 덜렁 남았다.

당연하게 클레이가 공을 걷어 내기 위해 뛰었다.

저기서 제대로만 걷어 내면 공격을 위해 모두 달려든 라우쓰의 배후를 멋지게 뚫어 낼…….

촤아악!

그 순간, 라우쓰의 26번 선수가 다리를 높게 든 자세로 클레이에게 몸을 던졌다.

콰작!

“아아악!”

“우우!”

세 가지 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삑! 삑! 삑! 삑!

라우쓰의 26번 선수를 향해 데이빗, 꼼빠니, 카알, 라파엘이 달려들었고, 주심은 26번 선수를 등 뒤로 감싸고 손을 뻗는 동작으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뒤로 밀어냈다.

팀 닥터와 스태프가 달려오는 동안 클레이는 비명을 멈추지 못했다.

클레이에게 뛰어간 정지우는 다가오는 라우쓰 선수들을 밀쳐 냈다.

몇몇 선수들이 정지우에게 대놓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삑! 삑!

주심이 정지우를 가리키며 휘슬을 불었고, 라우쓰 선수들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신호를 연달아 보냈다.

안다. 미안해서, 조금이나마 자신들의 동료가 했던 일을 사과하려는 제스처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정도라는 것이 있는 거다.

동업자로서, 몸이 전 재산인 프로 선수로서, 조금 전의 태클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을 만큼 끔찍한 범죄였다.

주심의 손짓에 따라 라우쓰 선수들이 뒤로 물러난 다음이었다.

“교체해야 돼!”

팀 닥터가 벤치를 향해 양손 검지를 마주 대고 둥글게 돌려 댔고, 주심이 스태프들에게 들것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끄으으!”

그사이 3배 가까이 부어 버린 클레이의 발목이 보였다.

팀 닥터가 가위로 그의 축구화 끈을 잘라 내는 동안, 클레이가 얼굴을 가렸다.

녀석은 울고 있었다.

이기기 어려운 고통 때문에, 그리고 지금의 부상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들것이 들어오고,

“One, Two, Three!”

팀 닥터와 스태프들이 달려들어 클레이를 그 위에 눕혔다.

스태프들이 녀석을 들어 운동장 바깥으로 움직이는 동안,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주었다.

클레이가 통로로 모습을 감춘 다음이었다. 당연하게 주심이 레드카드를 꺼내서 교체해 들어온 26번 선수를 향해 높다랗게 들었다.

통상 누군가 퇴장 명령을 받으면 상대 팀은 당연하게 가벼운 함성과 함께 박수를 친다.

그런데도 유니온 시티 관중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경기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옐로카드를 꺼내 든 주심은 데이빗과 꼼빠니, 그리고 정지우를 향해 높다랗게 들었다.

“What!”

데이빗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주심을 향해 양손을 벌려 보였고, 라파엘이 뛰어와 거칠게 소리 지르는 정지우를 안고 골대로 움직였다.

“What the hell are you doing(너 지금 뭐하는 거야)?”

정지우가 고함을 지른 직후였다.

삑! 삑!

휘슬을 분 주심이 다시 정지우를 향해 걸어왔다.

중간에서 말리려는 데이빗과 카알을 손짓으로 밀쳐 낸 주심이 정지우의 앞에 서서 시선을 똑바로 들었다.

사십 중반의 마른 영국인. 그는 또 한 번 옐로카드를 꺼낼지, 아니면 구두 경고로 끝낼지를 망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정지우가 먼저 자세를 누그러트릴 것을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경고를 받아야 하는데!”

정지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리가 부러져 쓰러진 동료를 지키는 게 죄가 된다고? 상대 팀 선수들이 내 동료에게 손을 뻗는 걸 지켜보라고? 그걸 막은 게 경고를 받을 일이야?”

주심의 눈가로 정지우의 능숙한 영어에 놀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지금 떠듬거렸다면 이 사람은 분명 옐로카드를 또 꺼내 들었을 거다.

아닌 척하지만, 법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지만, 영국인들 중에도 동양인을 무시하는 이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봐! 진정해! 일을 키워서 어쩌자고! 그리고 분명 네가 먼저 상대 선수에게 손을 댄 건 사실이잖아! 더 이상 내 판정에 대놓고 불만을 터트리면 나도 그냥은 못 지나가!”

주심이 손을 펴서 허공을 가로로 자르는 동작을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주심 입장에서 보면 유니온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커다란 양보를 한 꼴이기도 했다.

“알았어? 더는 안 돼!”

주심이 또다시 손을 들어 제법 단호한 척 허공을 베는 동작을 펼쳐 보였다.

이 정도면 참아야 할 때다.

말을 마친 주심이 뒷걸음질로 뛰면서 정지우에게 멀어졌다.

주장 데이빗이 다가와 정지우의 어깨를 감쌌고, 라파엘이 등을 두드렸으며, 카알이 뛰어와 머리를 툭툭 때렸다.

새로 선수가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라운드로 들어온 놈은 레믹이었다.

놈이 뻔뻔한 얼굴로 유니온 선수들을 둘러보는 동안, 정지우는 골대 앞에 섰다.

삐익!

주심이 경기를 시작하라는 휘슬을 길게 불 때였다.

‘너희 같은 놈들이 골을 넣겠다고?’

정지우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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