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하늘을 이렇게 날아서. (2)
솔직히 놀랍기는 했었지만, 정지우의 반응과 답이 마틴에게는 어쩐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한편으로는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반대로 덜컥 이적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선 정지우를 보았다면 실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보석을 쥔 건지, 괴물이 달려든 건지 당최 모르겠군.’
마틴은 마음 한쪽이 정지우에게 기우는 것을 느끼고 혼자 웃고 말았다.
이틀 연속 쥬피터의 호출을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 하려는 일이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 마틴은 나직하게 숨을 내쉰 다음에야 건물로 들어섰다.
“어서 오게.”
단순한 인사말 하나에 쥬피터는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표시하며 마틴을 맞았다.
“홍차 하겠나?”
“마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앉지.”
굳은 얼굴의 쥬피터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딱딱한 얼굴을 하고 마틴은 전기 벽난로 앞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자네와 내가 제법 잘 통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던 건가?”
“얀센을 선발로 세운 것을 말씀하는 겁니까?”
“우리 사이에 다른 문제가 또 있나?”
쥬피터가 눈썹에까지 힘을 잔뜩 준 얼굴로 마틴을 노려보았다.
“팀에 중요한 경기를 이토록 쉽게 포기하겠다면 나는 팀에 대한 자네의 의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네.”
구단주와의 분쟁이 이 바닥에서는 절대 좋을 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쥬피터라는 인물 역시 이 바닥에서 평가가 좋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의 욕심 탓이었다.
오죽하면 다른 팀은 3명까지 있는 골키퍼를 고작 2명, 그것도 한 명은 임대로 데려온 정지우로 메우고 있었겠나.
마틴은 용기를 내기 위해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쥬피터를 마주 보았다.
결단과 그에 걸맞은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를 탐내는 구단이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오! 이런! 마틴! 오퍼라는 것은 언제고 우리 주변을 떠돌지. 그것이 모두 오피셜로 발표된다면 아마 한 시즌에 백 명은 이적할 걸세.”
쥬피터는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중요한 경기를 포기한 감독을 받아 줄 팀이 있을까?”
그러면서 다른 구단에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의지를 다음 말에 덧발랐다.
순간 마틴은 이 모습이 정지우가 보여 주었던 것과 참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박용근의 입장을 고려해서 좋은 조건의 이적에 고개를 저은 정지우와 말이다.
“흠.”
대놓고 숨을 내쉬는 동안 마틴은 마음을 단단하게 굳혔다.
“Ji를 데리고 이적하겠습니다.”
쥬피터의 눈이 흉측하게 벌어지는 것을 마틴은 분명하게 보았다.
“그가 우리 팀, 아니 회장님과 한 계약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실점을 하지 않는 이상, 다른 팀으로 이적하는 것에 제약은 없더군요.”
“What!”
쥬피터가 악을 쓰는 것처럼 외마디 단어를 질러 댄 직후에,
“What the hell did you say!”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막말을 쏟아 냈다.
“그런 계약이 아무런 문제없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That’s not your business!”
쥬피터가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그건 네가 상관한 일이 아니야.’라고 으르렁거렸다.
“더는 대화가 어려울 것 같아서 돌아가겠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만약 나에 관한 어떤 추문이라도 듣게 된다면, 나는 이번 계약을 협회에 공개하겠습니다.”
붉게 물든 볼과 거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쥬피터는 잠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우선 말이 거칠었던 것에 대해서 사과하네.”
“만약 그 계약이 밝혀진다면 유니온 시티는 단숨에 챔피언십에서도 퇴출당할 거고, 회장님 역시 다시는 구단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을 겁니다.”
“Ji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나?”
“그와 그의 매니지먼트는 벌금쯤에서 끝날 일로 알 겁니다.”
쥬피터가 매서운 눈으로 마틴을 노려보았다.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Ji의 매니지먼트와 우연히 알게 되어서 몇 가지 조언했을 뿐입니다.”
“자네가 한국인과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군.”
“우리 팀에 한국인 선수가 있으니까요.”
억지로 웃으려 했던 모양인지 쥬피터의 입끝이 파르르 떨렸다.
분통이 터지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게 뭔가?”
“Ji와의 계약을 없던 것으로 하십시오. 그게 그동안 몸담았던 팀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요구입니다.”
“Ji의 매니지먼트는?”
“내가 알아서 조치하겠습니다.”
“기가 막히는군.”
새삼 마틴의 태도가 놀랍다는 듯 쥬피터는 비꼬는 눈빛을 띠었다.
“자네는 아예 팀을 떠날 생각이군.”
“회장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쥬피터가 들으란 것처럼 ‘흥!’ 하는 코웃음을 뱉어 냈다.
“Ji는?”
“그의 활약과 미래 가치에 따른 정당한 계약을 제시하면 됩니다.”
“그것도 자네가 조언하겠지?”
“이왕 시작한 일이니까요.”
쥬피터는 가슴을 들썩여 가며 웃었다.
“이보게, 마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나? 그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나 소나기야. 자네와 나처럼 영국 축구를 위해 희생할 인물이 아니라! 우리 리그에서 단순히 돈만 벌려고 온 황인종이란 말이다!”
그러나 말을 하다가 화가 뻗쳤는지 마지막에 그는 고함처럼 악을 썼다.
“지금 인종차별 발언을 하신 겁니까?”
쥬피터가 움찔하며 마틴을 보았다.
구단주가 인종차별 발언을 한 사실을 감독이 공개한다면?
“나이를 먹으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지. 혹시 내가 실수한 것이 있나?”
“절대 입 밖에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를 들은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확신은 없는 거지? 이후에 갑자기 떠오른다거나 하는 일 말일세?”
“그럴 것 같습니다.”
더럽게 걸렸구나 하는 눈빛을 하고도 쥬피터는 미소를 지어냈다.
마틴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어쩐지 역겨웠다.
의리 있는 동양인 선수를 터무니없는 계약으로 묶어 놓고도 아직 욕심을 털어 내지 못하는 잘난 영국 구단주의 모습을 보는 것이 말이다.
“알았네. 계약은 없던 것으로 하지.”
“괜찮으시면 제가 보는 앞에서 파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쩐지 앞에 들었던 어렴풋한 단어가 깨끗하게 사라질 것 같습니다.”
“흐흐! 흐하하하!”
얼굴이 붉어지도록 웃음을 토해 낸 쥬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틴은 정말이지 그가 왜 그렇게까지 웃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 확인해 보게.”
쥬퍼터가 건넨 계약서를 받아 든 마틴은 그것이 원본임을 확신했다.
“이왕이면 자네 손으로 처리해 주겠나?”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찌이익! 찌익! 찌익! 찌익!
“Ji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군.”
마지막까지 계약서를 악착같이 찢으며 마틴은 욕심쟁이 늙은이가 참 멋진 표현을 쓰는구나 싶었다.
“이제 가 보게.”
“언제고 오늘 이 일에 대해 고마워하실 때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마틴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문을 향해 움직일 때였다.
“이보게, 마틴. 그런데 왜 그 동양인 선수 일에 이렇게까지 나서나?”
쥬피터의 질문이 날아와서 마틴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날개를 달아 주었으니 그의 등에 올라타 볼 생각입니다.”
쥬티퍼의 또 ‘흥!’ 하는 코웃음을 듣고 나서 마틴은 사무실을 나섰다.
‘정말 내가 그의 등에 올라탈 수 있을까?’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마틴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쩐지 날개를 단 정지우가 저 높은 하늘로 힘차게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였다.
***
FA컵 16강전은 라우쓰 FC의 홈구장인 그린메이트 스타디움에서 있었다.
유니온 시티와는 버스로 2시간 거리여서 마틴 감독과 선발 11명이 한 대, 그 외에 서브 7명과 스태프들이 두 번째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정지우는 널찍한 자리에 몸을 의지한 채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오늘은 날씨가 우중충했다.
프로 선수로 뛰어 보면 쉬운 경기란 정말 없다.
어느 날은 발이 정말 척척 맞아서 언더독(under dog, 경기에 지거나 혹은 약체 팀을 일컫는 말)인 유니온 시티가 자이언트 킬링(giant killing, 상대적으로 강팀을 이기는 일)을 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언더독에게 질질 끌려가다 자이언트 킬링을 당할 때도 많았다.
정지우는 창을 통해 보이는 어두운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저 하늘 어딘가에 어머니가 있어서 지금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미안해, 지우야.’
‘그런 소리 마세요.’
‘엄마가 우리 아들 앞길을 막았어.’
‘그런 적 없어요, 엄마!’
‘대신 엄마가 하늘에서 우리 아들 뛰는 거 꼭 지켜볼게.’
‘엄마! 제발……!’
독한 약 냄새를 맡을 때면 어머니가 떠오르곤 했다.
마지막 순간에 링거 색처럼 노랗게 된 눈에 눈물을 함빡 담고서 정지우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길 때문에 노란색을 보면 그럴 때도 있었다.
‘내가 하늘 가리킬 때 혹시 나 보이세요?’
그런 걸 믿기에 스물여섯의 나이는 좀 많다.
‘나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외로운 거 빼구요.
마지막 생각은 어머니 몰래 한 거니까 못 들었을 거다.
‘고마웠어요, 엄마.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게 해 준 거, 그리고 감사해요. 이런 재능 남겨 준 거, 그 외 나머지 전부요.’
날씨가 그래서인지 자꾸만 감정이 가라앉는 것 같아서 정지우는 이어셋을 귀에 걸었다.
그린메이트 스타디움은 한마디로 낡은 경기장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라커룸으로 가는 터널은 금방이라도 물이 떨어질 것같이 음산했고, 라커룸의 개인 라커는 백 년쯤 된 건가 싶을 정도였다.
뭐, 경기를 라커룸에서 하는 건 아니니까.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정지우는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대략 한 시간 이내로 주어지는 이 시간에 잔디의 특성 정도는 파악해 두어야 하는데, 그린메이트는 잔디가 제법 길었다.
다 아는 것처럼 잔디가 짧을수록 공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잔디가 길수록 패스를 할 때 공의 속도가 죽는다.
여기에 물을 얼마나 뿌리느냐에 따라 또 속도가 달라지는데, 어느 팀이건 홈팀이 유리한 이유는 익숙한 잔디가 주는 이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정지우는 페널티 에어리어 사이를 천천히 뛰며 주변 잔디를 유심히 살폈다.
홈경기에 이기고 싶은 걸 누가 탓할 수 있겠나.
그런데 라우쓰 FC는 골키퍼 에어리어 바깥에서부터 골대 방향으로 잔디를 점점 짧게 잘라 놓았다.
이건 좀 심하다. 중거리 슛을 막을 때 공이 바운드되는 상황이 생기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공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라우쓰 FC는 분명 낮게 깔리는 중거리 슛을 자주 날릴 거라는 데 라면 5개 걸 수 있을 정도의 확신이었다.
오늘 선발로 나올 선수들이 서로 마주 잡은 채로 몸을 푼다. 그리고 골키퍼 얀센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골대 사이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그들 사이에서 서 있는 마틴 감독이 평소와 다르게 밝은 표정으로 선수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적 협상이 잘 풀렸나?’
프리미어리그 중위 팀에서 오퍼를 냈고, 협상이 잘되었다면 얼굴이 펴질 만도 하겠다.
해가 구름 뒤에 있어서 뛰기에는 최고의 날씨였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관중들이 제법 들어오고 있었다.
한 수 위인 유니온 시티를 이긴다면 라우쓰 FC 홈 관중에게는 FA 8강에 진출하는 잊지 못할 멋진 경기로 남을 거고, 진다면?
그냥 아쉬운 경기쯤 되는 거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사인이 있었다.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라커룸으로 들어가 물을 마시고 수건과 장갑을 챙겼다.
북소리와 함께 흔한 응원가 소리가 라커룸을 파고들었다.
긴장한 놈, 무언가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는 놈, 아무 생각 없는 놈, 그리고 정지우를 힐끔거리는 클레이.
“지난번처럼만 해. 그럼 누구도 너를 쉽게 뚫지 못해.”
놈이 만족한 듯 웃을 때였다.
삐익. 삐익. 삐익.
특수부대의 비상 출동을 지시하는 듯한 벨이 울렸다.
“후우.”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먼저 선발 선수들이 나가고, 서브 선수들은 그 뒤에 벤치로 바로 이동한다.
라커룸의 문을 열자 느닷없이 볼륨을 키운 것처럼 북소리와 응원가 소리가 훅 하고 달려들었다.
자그락. 자그락.
데이빗이 가장 앞서 나가고 다음으로 카알, 그리고 얀센의 순서로 라커룸을 나갔다.
정지우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가장 뒤에서 라커룸을 나섰다.
이상하게 불안함이 느껴지는 경기였다.